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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41)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오승은(吳承恩, 1500-약1582), 자는 여충(汝忠), 호는 사양산인(射陽山人), 산음(山陰, 현 회안淮安) 사람으로 명(明)대 소설가다. 청년 시절 공생(貢生)이 됐고 장흥승(長興丞)을 역임했다. 만년에 벼슬길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 전문적으로 창작에 임했다. 많은 시문이 있으며 『우정기禹鼎記』를 편찬했으나 산실됐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서유기西遊記』와 『사양선생존고存稿』가 있는데 그중 『서유기』는 사람들에 의해 대대로 칭송되고 있는 고대소설 중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유기』의 작가는 강소성 회안 사람 오승은인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고 교과서에도 그렇게 쓰여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각종 『서유기』의 고대 판본을 보면 ‘오승은’이라는 서명이 돼 있는 작품은 하나도 없다.

 

『서유기』와 관련된 명간본(明刊本)과 청(淸)간본에는 ‘주정신찬朱鼎臣撰’이나 ‘구처기邱處機’ 저라고 서명돼 있거나 심지어는 저자의 성명조차도 없이 교열한 사람이 ‘화양동천주인華陽洞天主人’이라 쓰여 있거나 ‘이지李贄’처럼 평점(評點)한 사람 이름만 기록된 것들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보면 오승은이 『서유기』의 작가라는 데에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비교적 일찍 『서유기』를 오승은이 지었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은 청나라 완규생(阮葵生)이다. 그는 『차여객화茶餘客話』에서 “세간에 도를 증명하는 서적이라 부르며 비평하면서 억지로 금단(金丹)의 요지와 일치한다고 말한다. 앞서 우도원(虞道園)이 서를 쓰고 장춘도인(長春道人)의 비본이라 떠받들었으나 거짓됨에 웃길 따름이다. ……그중 방언 속어를 볼 때 모두 회안(淮安)의 지방 사투리다. ……회안 사람의 손에 의해 쓰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했다. 완규생은 『서유기』 속의 방언을 보면 분명 회안 사람의 손에 의해 쓰였을 것이고 그 회안 사람이 바로 오승은이라고 생각했다.

 

오승은은 어릴 적부터 총명한 자질을 지녔다고 한다. 여러 가지에 흥미를 보였고 광범위한 취미를 가졌으며 여러 방면에 재능이 있었다. 회화에도 뛰어났으며 서법에도 능했고 사를 짓고 곡을 쓰기를 즐겼으며 바둑에도 정통했다. 그리고 명인의 서화와 서체를 소장하기를 즐겼다. 그는 과거 실패로 처한 환경이 좋지 않아 빈곤한 생활을 했지만 평생 세속에 물들지 않았고 강직하게 살았다.

 

『서유기』를 오승은이 만년에 지었다고는 하지만 일생동안 준비한 것이다. 어릴 적에 오승은은 부친을 따라 자주 회안 근교의 고찰 총림에 놀러갔다. 그러면서 아름답고 신비한 이야기들을 자주 들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진기한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서당에서 공부할 때 부친과 선생님을 속이면서까지 ‘야언패사野言稗史’를 몰래 읽었다. 나이가 들면서도 호기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30세 후 진기한 이야기를 찾는데 열중하면서 창작할 계획을 가지게 됐다. 50세 전후에 『서유기』 앞부분을 지은 후 몇 년간 중단했다가 만년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야 『서유기』 전편을 완성할 수 있었다.

 

『서유기』는 오승은의 유일한 지괴소설(志怪小說)이 아니다. 그는 신화소설 『우정기』도 지었다. 그는 서문에서 자신의 신화소설은 비록 신선과 귀신, 요괴들의 이야기를 썼지만 사실 본뜻은 ‘인간 세상’에 있다고 했다. 목적은 그의 정치적 이상을 기탁해 사악한 무리를 엄하게 꾸짖고 독자들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케 만들어 생각을 바꾸게 하는데 있지 결코 아무 뜻이 없거나 기괴하고 희한한 것들을 모아두고서 담소거리로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신화소설을 쓴 목적이 이렇다면 그가 『서유기』를 창작한 목적도 같을 것이다.

『서유기』 45회를 보면 손오공(孫悟空)이 자연의 신을 배치하고 구름을 부르고 번개를 내리고 비를 뿌릴 때에 뇌공(雷公) 등천군(鄧天君)에게 특별히 “등천군아, 나를 대신해 뇌물을 받아먹고 법을 어기는 관리들과 불효막심한 놈들을 하나하나 다 찾아 몇 명을 본보기로 때려죽이고 대중들에게 보이라!”고 명령하는 대목이 있다. 뇌물을 받아먹고 법을 어기는 탐관오리는 손오공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다. 이는 오승은이 창작한 많은 시문 속에서 표현한 탐관오리를 경멸하는 사상과 일치한다.

 

 

 

 

『서유기』 속 신화의 세계 곳곳에 인간 세상의 형상을 표현했다. 신성한 천궁은 표면상 그럴듯하지만 지고무상의 옥황상제는 현명함과 아둔함을 제대로 분별도 못하고 우매하기 그지없으니 천궁이나 인간 세상의 왕조나 별 차이가 없고 ; 황천은 삼엄하나 관리들끼리 서로 비호하고 탐관오리들이 횡횡해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함을 풀 데 없으니 인간 세상의 아문과 별 차이가 없으며 ; 귀신 요괴들이 사람을 죽이고 잡아먹으며 재물을 탐하고 색을 밝히며 마법과 법술을 부리고 군림하면서 갖은 악행을 저지르고 있으니 그야말로 인간 세상의 악질 토호나 관료들의 화신인 셈이다.

 

『서유기』에서 인간의 나라도 묘사하고 있는데 그곳의 통치자들은 “문관도 현명하지 못하고 무관도 불량하며 군주도 도의를 모른다”고 했다. 이는 명 왕조의 조정 대신들이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죄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이런 것들을 고려해 볼 때 오승은이 『서유기』의 작가가 틀림이 없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근대 학자 호적(胡適)은 1923년 제6기 『독서잡지讀書雜誌』에 『서유기고증』이라는 장편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서유기』의 작가는 ‘구애받지 않으면서 술을 빚고 해학에 능한’ 대문호”라고 했다. 그 대문호가 바로 오승은이라 했으며 초보적이나마 오승은의 연보를 썼다.

 

이듬해 7월 노신(魯迅)은 서안에서 강의할 때 “세인들은 대부분 『서유기』를 원나라 때 도사 구장춘(邱長春, 구처기)이 썼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구장춘 본인이 쓴 것은 다른 『서유기』3권이 있지만 기행문이다. 지금도 ‘도장道藏’으로 보존되고 있다. 서명이 같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같은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이에 더해 청나라 초기 『서유기』 소설을 출판한 자가 우집(虞集)에 있는 ‘씨춘진인氏春眞人’ 『서유기서序』를 취해 첫머리에 놓아둠으로써 『서유기』를 구장춘이 썼다고 더 믿게 만들었다. ―기실 『서유기』를 쓴 사람은 강소 산음 사람 오승은이다.”(『중국소설의 역사 변천』)라고 했다. 이때부터 노신과 호적의 의견을 학술계의 대다수 사람들이 인정하게 됐다.

 

그렇다면 정의의 화신 손오공(孫悟空)은 또 어떤가?
다 알다시피 손오공은 중국 고대소설 중 신화된 인물이다. 당 삼장(三藏)이 서역으로 불경을 구하러 갈 때 같이 동행한 일원이다. 나쁜 일이나 나쁜 사람을 원수처럼 싫어하고 선덕을 선양하고 악행을 제거하는 선명한 성격의 소유자다. 여행 도중 사부를 보호하면서 서천에서 불경을 가져오는데 성공하게 만들었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실 『서유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명대의 신화소설이다. 낭만주의 색채가 농후해 옛 사람들이 ‘제일기서第一奇書’라 불렀다. 이 소설은 광범위하게 전파되면서 소설 중의 주인공 미후왕(美猴王) 손오공은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책이 만들어지면서 사람들은 손오공의 유래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1920년대 사람들은 인도(印度) 고대 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na』에서 미후왕의 단서를 발견했다. 그 시 속에는 총명하고 날 수 있으며 곤란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돕는 지략과 용기를 겸비한 ‘하누만Hanuman’이란 원숭이가 있다. 그 원숭이가 『서유기』 속의 손오공 형상의 원형이라 본다.

 

그 서사시 이외에 고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된 불교 서적 속에 인도 신화들이 들어있다. 삼국시대 인도에서 번역된 『육도집경六度集經』, 남북조시기에 들어온 『출삼장기요出三藏紀要』, 『잡보장경雜寶藏經』과 같은 불경 서적에는 1천여 년 전에 “인왕人王과 후왕猴王이 힘을 합쳐 사악한 용과 싸웠다”, “원숭이가 천궁에서 소동을 피웠다”와 같은 인도 신화가 보인다. 이런 이야기는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

 

 

 

 

당나라 때 현장(玄奘)은 불법을 구하기 위해 멀리 천축(天竺)까지 건너가 불경을 가지고 돌아왔다. 영웅적 기개와 낭만주의 색채가 충만한 그런 사실은 민중 속으로 넓게 퍼져 나갔다. 입으로 전해지면서 점차 신비하며 기괴한 내용이 더해 졌다.

 

명나라 때에 와서 그런 내용을 집대성한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민감하며 지혜로운’ 『서유기』의 작가 ‘사양산인’ 오승은이다. 오승은은 일찍이 ‘여러 서적을 널리 섭렵했고’, ‘야언패사’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대당삼장취경시화』등 ‘속강俗講’의 종교문학 및 천축의 ‘신후법신神猴法身’의 진기한 이야기에 대해 이해가 빠른 것은 당연했다. 바로 노신이 『중국소설사략』에서 “위진魏晉 이래로 점차 불경이 전파되고 천축의 이야기들이 세상에 유전되면서 문인들이 그 기발함에 매료돼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활용하면서 중국적인 것으로 탈바꿈…….”라고 말한 것처럼 손오공은 ‘하누만’을 원형으로 중국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 이외에 중국 원고 신화 중에 우(禹)의 아들 계(啓)처럼 천지간에 돌이 깨지고 사람이 태어났다는 설이 보이는데 손오공은 바로 중국 전통 신화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곳에서도 이상한 원숭이와 관련된 기록들이 보인다.

 

『국어․노어』에 “기夔는 외발인데 월인越人들은 그것을 가리켜 노猱라고 부른다. 사람 얼굴에 원숭이 몸을 하고 있고 말할 수 있다”고 기록돼 있고, 『오월춘추』, 『수신기』, 당대 전기 및 후대의 화본 설창 등에 후인(猴人), 물의 신 무지기(無支祁) 등 하얀 원숭이(백원白猿)가 요괴가 돼 말썽을 일으키는 신비한 이야기들이 많이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신화 전설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하누만’의 영향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각 민족끼리 서로 영향을 주고 교류하는 것은 인류 발전의 일반적인 유형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민족주의적 인식이 강한 중국학자들이라도 손오공 형상은 인도 문화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최근 소식에 따르면 아프리카 서부 나이지리아에서 고고학 발굴을 했는데 지하 3.5미터 고대 능에서 위풍당당한 ‘제천대성齊天大聖―손오공’과 같은 조각상이 발견됐다고 한다. 머리에 쓴 황관과 몸에 두른 금박의 전포, 오른발로 운무를 밟고 있는 비취조각이었다. 벽옥 후왕은 의복이나 자태를 보면 중국 전설 중의 미후왕 손오공의 형상과 무척 닮았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손오공과 같은 형상이 아프리카 서부에서 발굴된 것인가? 손오공의 형상이 전해진 것인가 아니면 인류가 공유하는 전형인가? 중국 문화의 영향이 크다손 아프리카까지 전파됐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고. 그렇다면 인도문화의 영향인가? 아니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원숭이의 전형’이 인류의 보편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손오공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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