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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은 풍요의 상징 뱀 … 제주에 와 좌정한 사연

 새 봄을 맞아 또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문영택 전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의 ‘탐라역사문화기행’입니다. 지난달 말 우도초·중통합교 교장직을 끝으로 평생의 업을 마감한 문 전 국장은 교육계 재직 기간 뜨거운 교육열로 후학 양성에 진력했던 분입니다. 그는 학교에 봉직하면서도 틈만 나면 제주 구석구석을 찾아 선현의 지혜와 역사의 숨결을 끊임없이 기록하고 그 의미를 정리했습니다. 그가 정리한 제주역사와 문화의 실타래를 이제 하나씩 풀어갑니다. 많은 애독을 바랍니다. /편집자 주

 

눈섬과 매바위섬을 감상하며 올레길을 걷기 시작한 우리는 전설의 바다와 한라영봉의 풍광을 바라보며 생이기정이라 불리는 해안 가 절벽 위의 길을 걸었다. 저 너머 차귀도와 마주한 수월봉과 그 아래 펼쳐진 들판이 어서 오라 손짓했다.

 

옛날에 ‘법서용궁또’라는 뱀 신을 모신 당이 있는데서 유래한 당산봉을 올랐다. 당오름이라 부르기도 하는 당산봉에는 당산봉수가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지석묘도 있었고, 신석기 동굴집자리도 발견되었다.

 

특히 지금의 리사무소 근처인 고산리 2228번지에 차귀진성이 있었다. 리사무소의 안내로 찾아간 진성에는 기단석이라 보이기에는 너무 초라한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다음은 근처에 있는 차귀진성 표지석의 내용이다.

 

 

 

차귀진(遮歸鎭) 터: 차귀방호소를 두었던 터. 원래 이곳은 몽고가 축성하여 아막(阿幕)을 설치하고 목마 관리를 하던 곳이었다. 1625년 (효종 3년) 이원진 목사가 진을 설치하고 여수(旅帥)를 두었다. 성의 둘레는 1천4백66척 높이 10척이며 동시에 성문과 객사 군기고 등이 있었다. 제주 서북지역의 해상방위를 위한 요충지로서 처음에는 만 호를 두었으나 1716년 이후 이를 혁파하고 조방장 1명 방군 1백21인 등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제주사회는 절 오백 당 오백이란 말이 전해올 정도로 민간신앙의 뿌리가 깊다. 마을마다 수호신을 모시는 당은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토대이자 기둥이었다. 거기다가 유배 온 사람들의 훈학과 조선조의 유교문화가 파급되면서 무속과 유교문화가 공존하기도 했다.

 

다음은 1679년(숙종 5년) 제주암행어사 겸 순무어사로 제주에 왔던 이증이, 제주에 5개월간 체류하며 보고 들은 것들을 일 기체로 적은 남사일록의 한 대목이다.

 

차귀당은 차귀악(지금의 당산봉)의 기슭에 있는데, 뱀 귀신을 위한 무속사당이다. 지붕, 벽, 들보, 초석에 무리진 뱀들이 서리서리 얽혀 있으나, 제를 지낼 때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 상서롭다.

 

 

 

① 3대 국당의 하나인 차귀당

 

당오름에 있었던 성황사(城隍祠)인 차귀당은 뱀 신을 모셔 제사하던 곳이다. 다음은 고산리 입구 당오름 주변에 세워진 차귀당에 대한 안내의 글이다.

 

차귀당(遮歸堂)의 옛 터전: 이곳은 옛적부터 대정현 성황사(城隍 祠)인 차귀당이라고 하여 뱀 귀신을 모셔 제사하던 곳이다. 성황신은 중국에서도 마을 수호신으로 모셔왔다. 토속신앙에서 서낭당•산 신당이라 불려졌으며 사직단•성황당•여단(厲檀)을 삼단(三壇)이라 하며 조정에서는 각 군현에 이를 세워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대정현에서는 조정의 지시로 성황사를 새로 짓지 않고 차귀당으로 대신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곳에 기와 파편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관(官)에서 관리하는 성황당이라 기와집으로 지었었다. 제례의식은 유고적이 아닌 무속적 굿이었다.

 

입춘굿이 목사 이하 관원이 참석한 가운데 신방의 굿으로 진행하였던 것으로 이해가 간다. 이 당은 1704년 목사 이형상에 의해 소각되고 또 수년이 지나 복원되어 지내다가 1882년(고종 19년)에 마지막 훼철되었다.

 

왕조마다 종묘사직을 세워 나라를 운영 한데서 보듯 지방에서도 농사신과 지신을 모신 사직단과 성황당이 제주에서도 세워져 제의를 지내기도 했다. 다음은 제주시 목관아지 건너 향사당 부근에 있었던 성황당과 여단에 대한 안내 글이다.

 

 

 

(이곳은) 성황당과 여단이 있었던 터(이다). 성황사는 원래 주남 16리 한라산 아래 있었으나 이곳으로 옮겨 여단 옆에 설치되었다. 성황당에서는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신에게 성황발고 제가 봉행되었으며, 여단에서는 못된 전염병에 죽은 사람 등 제사를 받지 못하는 억울한 여귀들을 위하여 봄, 가을, 겨울에 걸쳐 일년에 세 번 제사를 지냈다.

 

제주의 마을마다 있었던 성황당에는 당신의 내력담(來歷談)이 전해 온다. 그것은 부락민을 보호해주는 당신의 내력이면서 동시에 부락민 자신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즉, 제의식인 재차(祭次)에 서 당신의 근본을 심방이 구술하면, 그 내력이 자신의 내력과 비슷함을 깨닫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는 다시 사람들 사이로 전해지게 된다.

 

그리하여 당신의 내력담은 마을 사람들 마음에 쌓여 있는 한도 풀어낸다.

 

대정현에서는 조정의 지시에 따라 성황사를 새로 짓지 아니하고 차귀당으로 대신하였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기와 파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관에서 관리하는 성황당을 기와집으로 지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제례의식을 입춘굿처럼 심방굿으로 하였던 이 당은 1704년 이형상 목사에 의해 파괴되었다.

 

수년 후 복원되었다가 1882년 마지막으로 훼철되어, 지금은 그 자리에 표지석과 함께 자그마 한 신당이 세워져 있다. 표지석을 읽으며 휘둘러보다가 야트막한 오름을 오르다 보니 이내 정상에 올라 정자에서 쉬며 주변 경치에 넋을 잃기도 했다.

 

당산봉에 있던 차귀당은 탐라시대부터 제주시의 광양당(지금의 삼성혈 부근에 있었음)과 안덕면 덕수리의 광정(廣靜)당과 함께 3대 국당(國堂)이라 전해진다. 광양당은 한라산 수호신을 모시는 당이었고, 차귀당과 광정당은 사신(蛇神)을 모시는 당이었다. 1871년 대원군의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90년 지역 주민에 의해 차귀본향당으로 복원되었다.

 

제주도를 흔히 신들의 고향이라 한다. 제주선인들은 달을 보고 조수의 간만을 알고, 별자리를 보고 배의 방향을 잡았으며, 하늘과 바다와 구름을 보고 바람을 예측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항해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위험이 따르므로 제주선인들은 다양한 신들을 섬겼었다.

 

제주선인들이 섬겼던 신들의 총본산은 광양당(廣壤堂, 현 상섬혈 부근)이었다. 1486년(성종 17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1653년(효종 4년) 이원진 목사가 편찬한 탐라지에는 광양당을 한라호국신사(漢拏護國神祠)로도 기록하고 있다. 1702년 이형상 목사는 숭유정책의 일환으로 도내의 음사, 절간 등 130개소를 불태워 없애고 광양당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유교 예식에 따라 제례를 행하였는데, 300년 전까지만 해도 광양당의 원형은 상당부분 보존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 조정의 정책인 유교의 혹독한 음사탄압에도 광양당 신관의 대사(臺詞)는 비밀리에 전승되어 이두문으로 기록되고, 이것이 다시 제주인 문창헌에 의해 풍속무 음(風俗巫音)이라는 이름으로 필사 편집되어 오늘에 이른다고 향 토사학자 고용희는 전한다. 다음은 이원진 목사의 탐라지초본의 한 대목이다.

 

광양당은 고을나 신을 모신 곳이다. 송나라 호종조(胡宗朝: 제주에서는 호종단 또는 고종달이로 전한다.)가 제주땅에 와서 기운을 눌러버리고 바다를 건너 돌아가는데 신으로 변하여 매가 되어 날아올라 돛대의 맨 꼭대기에 앉았다.

 

순식간에 북풍이 크게 불어 호종조의 배를 격쇄하여 버리니, 비양도 바위 사이에 빠졌다. 조정에서는 그 신령스럽고 이상한 것을 포양하여 광양왕에 봉하고 해마다 향폐(香幣)를 내려서 제사하게 하였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대정현 산방 서북쪽 큰길가에 부정한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 (淫祠)이 있는데, 광정당(지금의 안덕면 덕수리 소재의 신당)이라고 한다. 지나가는 사람이 말에서 내리지 않으면 말이 걸음을 멈추고 다리를 전다. 목사 이형상이 순행하며 지나갈 때, 서리가 말을 내리라고 하자 듣지 않아서 말이 과연 발을 절면서 구부려졌다.

 

친히 그 당으로 가서 무당으로 하여금 말을 죽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나, 그 신은 볼 수가 없고 요망한 이무기가 나와서 독을 뿜으며 물으려 하니, 사명기(司命旗)를 세워 마침내 그 뱀을 베고 그 당을 불태우니 음사가 마침내 끊겼다.

 

 

 

제주도에는 부락마다 1, 2개씩 있을 정도로 260여 개의 당이 있었다. 제주선인들은 성황당이 부락의 모든 액을 막아주는 수호신이 상주하는 곳으로 여기기도 했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당신에게 제사를 드리며 당을 성스러운 곳으로 받아들였다.

 

제의 과정 중에 당에 매인 심방이 당신을 구송하는데 이것이 본 풀이이다. 본풀이는 종교적인 엄숙성과 함께 마을 사람들의 일상사와 관련이 깊다. 제의에서 구술되는 당신의 내력은 동네 사람들의 생활과 마음이 그대로 투영되었다.

 

즉, 당신들은 초월적인 신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동거하면서 그들의 길흉화복을 주재해 주고 그 값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봉양을 받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마을마다 있었던 성황당신의 내력담을 모으면 제주사람들의 삶이 형상화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당신을 찾는 사람들은 심방과 만나 자신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면서 이야기는 더욱 다양화된다. 그래서 본풀이는 주술성과 예술성을 함께 지니게 된다. 제주도의 당신 본풀이에는 보편적 이미지와 함께 사회성과 역사성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당신이 마을에 좌정하게 된 경위와 주민들이 마을을 이루어 정착해 가는 과정이 나타나있다. 그 사례를 뱀신 신앙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뱀은 풍요의 상징물이자 반인간적인 속성을 지니기에, 본풀이에서의 뱀은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은 존재로 나타난다.

 

배척을 받았기에 인간에 대한 복수심을 갖고 있으면서 한편으론 관계를 개선하려 한다. 자기를 위해 주는 자에게는 풍요를, 배척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준다. 이렇듯 뱀은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아서 결국 방황하다가 제주에 와서 좌정한다. 그 사연을 들어보자.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를 두고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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