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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훈의 시평세평] 그 많던 제비들은 어디로 갔을까?

 

 

오늘 아침 무심히 달력을 보다 깜짝 놀랐다. 삼월삼짇날이 지난 지 어느덧 엿새째라는 사실 때문이다. 삼짇날하면 제비인데, 제비는커녕 텅 빈 하늘엔 비 머금은 희뿌연 먼지만 가득한 '슬픈 봄'이 거기 있었다.

 

지난 한 달 가까이 봄맞이 타령으로 들뜬 채 그렇게 맞은 봄이 사실은 반쪽짜리라는 슬픈 현실과 그것을 자각(自覺)조차 하지 못한 미욱함이 한없는 부끄럼으로 가슴을 때린다.

봄은 본디 빛으로 오고, 소리로 오는 법이다.

 

새로이 움트는 잎의 푸르름과 울긋불긋 피어나는 꽃들의 잔치는 봄의 화사한 얼굴이요, 겨우내 깊게 가라앉혔던 목청을 틔운 새들의 지저귐은 봄의 생동(生動)하는 리듬이다.

 

봄빛은 정태적(靜態的)이지만 연한 듯 강하게 마음을 물들이고, 봄의 소리는 기운을 솟구치게 해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게 한다. 굳이 한 편을 들라면 후자가 동적(動的)이라 더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듯하지만 실제론 함께라야 온전하고 그것이 바로 자연스러운 봄맞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봄이 그저 화선지에 물감 번지듯 다가와 소리 없이 휑한데도 그것이 당연한 일인 양 돼버린 게 이 땅의 현실이니 참담할 따름이다. 활기찬 비상(飛上), 상쾌한 지저귐으로 봄을 몰고 오는 제비가 우리 곁에서 사라진 건 더할 나위없는 비극이다.

 

제비의 날렵한 날갯짓은 봄의 액션이요, 쉴 새없는 재잘거림은 영춘(迎春)의 교향악이었으니까. 예전엔 앞산이 진달래꽃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울자락에 개나리꽃이 벙글면 동네 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고무줄놀이를 하며 부르는 노래가 있었다.

'정이월(正二月) 다 가고 삼월(三月)이라네/ 강남(江南) 갔던 제비가 돌아 오면은/ 이 땅에도 또 다시 봄이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江南)을 어서나 가세'

바로 '그리운 강남(江南)'이란 노래다. 60대라면 남녀노소 누구나 잘 아는 노래로 4절까지 이어지는 단골 봄노래다.

 

일제 때인 1929년 언론인 출신 문인 김형원(金炯元ᆞ1901~?)이 발표한 시에 성악가이자 작곡가인 안기영(安基永ᆞ1900~80)이 곡을 붙여 만든 신민요인데 날씨가 얼추 풀리는 듯싶으면 동네마다 울려퍼지곤 했고,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어김없이 남쪽 하늘로 부터 "지지배배 지지배배" 소리와 함께 제비가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무명으로 지은 흰 저고리, 검은 통치마에 단발머리를 한 계집애들이 폴짝폴짝 뛰어올라 고무줄을 희롱하면서 부르는 노래가 마치 '강남'까지 들린 것처럼 말이다.

 

 

제비는 주인(?)집과 한 지붕 아래 둥지를 틀고 새끼를 치는 까닭에 한 식구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행랑채 바깥 처마부터 시작해 봉당이 있는 대문간을 거쳐 안채 처마를 빙 두르고 대청마루 대들보에까지 곳곳에 제비집이 들어차 그네들 식구가 정작 '진짜 우리 식구'보다 많았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강남 갔던 제비가 허공을 가르며 저만치 나타나면 어서 오라는 손짓인 풍등(風登)으로 환영하는 게 우리네 풍습이다. 어릴 적에 제비는 요즘의 반려동물과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일종의 도덕ᆞ윤리의 모델이라고나 할까?

 

흥부놀부 얘기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던 터라 제비와 함께 산다는 것 자체를 복(福)이라 여기는 분위기 속에 제비를 통해 보은(報恩)과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뜻을 되새기곤 했으니까.

 

어디 그 뿐인가?

 

지리한 장마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때문에 먹이를 못 구해 안절부절하는 어미를 향해 노랑부리를 한껏 벌린 채 배고프다며 보채는 새끼들의 철없는 성화하며, 결국 새끼들의 떼를 이기지 못해 기어코 비바람을 뚫고 사냥에 나서는 어미의 가슴 뭉클한 모정을 지켜보며 '부모'란 두 글자의 의미를 가슴깊이 진하게 새길 수 있었다.

 

지금도 칭얼대는 어린 것들을 볼 때마다 그 시절 제비집 풍경이 떠오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테다.
제비는 주로 모기나 잠자리, 벌 등 곤충을 모이로 삼을 뿐 아무리 배고파도 곡식을 축내지 않는 대신 동물적 본능으로 천재지변을 미리 알려주는 영물(靈物)이기도 해 단순한 길조(吉鳥)를 넘어 '천녀(天女)'대접을 받기도 했다.

그 해 비가 많을 것 같으면 제비가 둥지를 집 안 깊숙이 들여 짓고, 태풍 등 바람이 많을 듯 하면 지푸라기 등을 많이 넣어 거칠지만 튼튼하게 집을 짓곤 했으니···. 그래서 제비가 죽으면 집안이 망한다고까지 믿었다.

 

또 제비가 물을 차면 비가 올 징조라고 믿었는데 비가 오기 전 기압이 낮아지면서 먹이인 모기 등이 낮게 날아 이를 좇기 때문으로 과학적 근거가 있는 얘기다.

 

이 같은 제비에 대한 돈독한 믿음은 《흥부전》에서 보듯이 하늘의 뜻을 전하는 '정의의 심판자'로까지 승격(?)되고, 심지어는 《논어(論語)》를 할줄 아는 새로 칭송받기도 했을 정도다.

제비가 《논어》위정(爲政)편에 나오는 '지지위지지(知之謂知之) 부지위부지(不知謂不知) 시지야(是知也)'를 늘 입에 달고 다닌다는 것이다. 이는 '아는 걸 안다고 하고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란 뜻으로 제비의 지저귀는 소리가 마치 원문을 빨리 읽는 것과 같다는 주장이다.

"지지배배"를 "시시비비(是是非非)"의 음사(音似)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의 그 시절 개그(?)지만 제비를 대하는 수준이 어떠한 지 가늠하고도 남는 에피소드인 건 분명하다. 이런 정감(情感)은 현대에도 이어져 우리나라가 붙여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태풍의 이름에도 '제비'가 들어있을 정도다.

 

제비에 대한 사랑은 중국도 마찬가지여서 제비를 뜻하는 '燕'자(한마리 제비의 모습ᆞ갑골문 사진참조)는 '宴'자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잔치'를 뜻하는 글자로 쓰이기도 했다.

 

제비과(科)에 속하는 새는 세계적으로 모두 99종으로 우리나라엔 한국전쟁 전까지 제비, 귀제비, 갈색제비, 흰털발제비 등 4종이 서식했으나 전쟁 후 앞선 두 종만 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왕가물에 콩나듯 아주 외진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종이 되고 말았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서울 근교에서도 흔히 눈에 띄던 놈들이 불과 몇 년만에 자취를 감추어 새 밀레니엄이 시작되고는 단 한마리도 보지 못했다.

 

실제로 30대 초반인 자식들에게 물어보니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다며 제비란 그저 조류도감에서나 볼 수 있는 새의 한 종류일 뿐이라고 말한다.

 

참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

 

그 많던 제비가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우리 곁을 떠나 관념속에만 박제(剝製)된 채 남은 존재가 돼버렸단 말인가?

 

전문가들에 따르면 무엇보다 전통가옥이 없어지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제비가 둥지를 틀고 깃들 공간이 없어진 게 가장 큰 이유라지만 선뜻 와 닿지 않음을 어찌하리!

 

일찍이 1980년대 초 그 유명한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ᆞ1907~64)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을 읽고 공감과 충격을 동시에 받았을 때도 적어도 제비만큼은 내 생전에 보지 못할 일이 절대로 없으리라 확신했으니···.

 

제비는 대충 섭씨 10도 가량의 기온을 좇아 움직이는데 그 때문에 삼월삼짇날 찾아왔다가 9월9일 강남으로 돌아가는 '양(陽)의 새'란 믿음을 얻었다.

 

고추가 새빨갛게 약이 한창 오를 때가 되면 마당 가장자리 바지랑대 높이 걸린 빨랫줄에 일렬횡대(一列橫隊)로 앉았다가 어느 정도 떼를 이루면 "내년에 다시 오겠다"는 듯이 한참을 지저귀고는 마침내 겨울을 날 강남을 향해 힘차게. 날갯짓을 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강남이란 양자강 남쪽을 일컫는 말로 중국의 소주(蘇州)나 항주(杭州)까지만 해도 직선으로 550km나 되고, 태국까지는 3840km, 말레이시아까진 무려 4800여km에 이르는 머나먼 남쪽 땅이다.

 

이 멀고도 먼 장정(長程)을 단 15g밖에 안되는 체수로 감당해내며 옛집을 찾아 오고 가는 제비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르침을 주는 '의리(義理)의 표상(表象)'이었다.

 

매년 10월 초순이면 고향근처인 태릉 배밭에 2만여마리가 강남행을 앞두고 한데 모여 채비를 하던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壯觀)이었다. 하지만 제비가 떠나고 덩그마니 남은 빈 둥지를 보면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했는지 아릿했던 기억이 여전하다.

 

이상화(李尙和) 시인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며 나라를 빼앗긴 현실에 피를 토했지만, 오늘 나는 '제비가 사라진 들에 오는 봄은 진짜 봄인가' 외쳐본다. [제이누리=이만훈 전 중앙일보 라이팅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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