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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39)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청(淸)나라 순치(順治) 황제는 불교를 숭상해 스스로 ‘치도인痴道人’이라 불렀다. 일생 동안 몇 차례 공문(空門)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결국 출가해 승려가 된 역사적 현안을 남겼다. 명나라 때에도 도교를 숭상해 스스로 ‘자극선옹紫極仙翁’이라 부른 황제가 있었다. 비록 출가해 도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조정 대사를 자신이 믿는 도교신앙과 연계시켰다. 조정을 그의 도장(道場)으로 만들었고 재상도 축문을 쓸 줄 아는 도교 방사를 앉혔다. 그 ‘자극선옹’이 바로 명 세종(世宗) 가정(嘉靖)이다.

 

명 세종의 부친 흥헌왕(興獻王)은 헌종(憲宗)의 아들로 번왕(藩王)에 봉해져 호북(湖北) 안륙(安陸)에 있었다. 어린 시절 세종 주후총(朱厚熜)은 부모를 따라 호북 일대에서 생활했다. 당시 호북은 도교가 성행했던 지방이었다. 명 세종은 어릴 적에 자주 보고 들어 익숙하고 습관이 된 도교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체력이 약하고 병이 많아 황제가 되고 나서는 용체의 귀중함을 알고 병을 없애고 장수하려는 희망을 도교에 기탁했다.

 

도교에서는 사람이 병을 얻는 것은 신체 각 부위의 신(神)이 놀러 나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의 본성은 한가롭고 여유로운 곳에 거주하기를 즐기고 혼탁한 곳에 거주하려고 하지 않는다. 신을 본래 자리로 돌아오게 하려면 반드시 도장에서 재계해야만 가능하다. 신이 돌아오면 병은 자연히 없어지게 되고. 재계하지 않으면 신체 각 부위는 혼탁하게 돼 신은 인체 속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면 병이 더 쌓이게 되고 결국은 죽게 된다. 이것이 하늘이 인간에게 내리는 징벌이라는 것이다. 결국 한 마디로 얘기하면 제단을 만들고 기도를 하면 재액을 없앨 수 있다는 말이다.

 

 

 

 

세종은 도교를 신봉했다. 제단을 만들고 기도하는 것을 본무로 삼았다. 가정 2년(1523)부터 궁중에 제단을 만들고 기도했다. 연중 쉬는 날이 없었다. 가정 15년(1536) 이후는 더 심해졌다. 시시때때로 재궁(齋宫) 비전(秘殿)을 세움으로써 10여 곳에 이르렀고 수만 명을 노역에 동원했다. 매년 비용이 수백만 량이나 됐으며 한 번 제를 지내고 기도하는 소식(蔬食) 비용만 1만8천 량에 이르렀다.

 

재궁을 다 지은 후 문들과 편액에 금으로 글자를 쓰게 하고 매 번 제단을 만들고 기도를 하면서 황금 수천 량을 소비했다. 금가루를 만들 때마다 수십 그릇을 채웠다. 글자를 쓰는 중서(中書) 관원들은 순금을 자기 것으로 여겨 벼락부자가 되기도 했다. 재단이 완성되면 진향(進香)해야 했는데 매 년 황백랍(黃白蠟) 30여 만 근이 소요됐다.

 

당시 가장 진귀한 것이 ‘용연향(龍涎香)’이었는데 관원들 중에는 용연향을 진공해 높은 관직을 얻은 사람이 많았다. 제때에 헌향하지 못한 관원들은 파직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외국 상인이 무역하러 입국할 때 용연향을 구하는 것이 선결 조건이었다. 용연향이 명 세종이 가장 먼저 찾는 물품이라는 것이 조야에 알려지자 사기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가정 34년(1555) 오상요(吳尙堯)라는 호광(湖廣) 마성(麻城) 사람이 자신은 조정의 중서 관원이라 속이고 도중문(陶仲文)의 글씨를 도용해 운남 정변(定邊) 현에 명령을 내려 용연향을 조정에 바치라고 했다. 현지 현령은 사람을 모두 동원해 석동 현애에서 용연향을 찾도록 했다. 종유석 틈새에서 비슷한 모양의 물건을 구해 용연향이라며 오상요에게 보냈다. 오상요은 그것을 상인에게 되팔고 세종에게 진상하라고 하고는 자신은 중간에서 폭리를 취했다.

 

이렇듯 세종은 제단을 만들고 기도하기 위해 대신들과 백성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고 사치와 낭비를 일삼았다. 백성들은 갈수록 삶이 어려워 졌으니 당시 민간에는 “가정(嘉靖) 가정, 모든 가정(家庭)이 다 궁해지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네(광정하게 돼 버렸네.(광정光淨은 깨끗하게 다 써버렸다는 뜻))”라는 노래가 퍼졌다.

 

세종이 도를 닦고 신선이 되고자 갈망하면서 신선술을 펼치는 사람들을 흠모했다. 가정 연간에 스스로 ‘신선神仙’이요 ‘진인眞人’이라 칭하는 평범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금성에 운집했다. 도교는 장천사(張天師)를 신봉한다. 당시 장언우(張彦頨)라는 도사가 자신이 장천사의 후대요 전인이라고 했다. 세종은 그를 입궁하게 하여 그와 도법을 논하면서 의기투합했다.

 

한 번은 세종이 장언우에게 제를 지내라고 했다. 그 도사는 향의 연기가 자욱한 재궁에서 제단을 열고 천존(天尊)을 부르고 축문을 낭송했다. 향화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를 때 마침 붉은 해가 하늘에 떠 있었다. 구름과 연기가 서로 비추며 형형색색의 빛을 발하면서 기이한 경관을 연출했다. 그때 백학(白鶴) 두 쌍이 구름을 뚫고 제단을 휘감아 돌며 내려왔다. 세종은 신선이 현령했다고 여기고 놀람과 기쁨 속에서 급히 하늘에 절했다. 궁으로 돌아온 후 백관들에게 만세삼창하게 하고 함께 축하하며 기쁨을 나눴다. 세종은 신을 섬기면 좋은 결과가 있다고 더더욱 믿게 됐으며 장언우를 ‘정일사교진인正一嗣敎眞人’에 특별히 봉하고 금관, 옥대, 망의(蟒衣)를 하사했으며 북경의 저택을 상으로 내렸다.

 

 

 

세종은 가정 원년(1522)에 결혼했으나 가정 9년(1530)이 됐어도 후사가 생기지 않았다. 가정 10년(1531) 세종은 어화원(御花園) 내에 ‘기사초祈嗣醮’를 세워 문무 대신들에게 매일 진향하게 했다. 가정 15년(1536)에 소원절(邵元節)이 황궁 초단에서 후사를 기원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교묘하게도 며칠이 지나지 않아 후궁이 임신했고 오래지 않아 아들을 낳았다. 세종은 소원절 법술이 현령했다고 생각하고 그를 예부상서에 봉하고 1품 봉록을 내렸으며 백금, 보관, 법복, 초구(貂裘)를 하사했다. 얼마 없어 소원절이 병사하자 세종은 비통해하면서 ‘소사少師’ 칭호를 내리고 백작(伯爵)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소원절이 죽으면서 그의 친구 도중문을 세종에게 추천했다. 도중문은 세종이 자신의 법술을 의심치 못하도록 가정 18년(1539)에 장난을 쳤다. 그해 세종이 호북 지역을 순시할 때 하남(河南) 위휘(衛輝)를 지나고 있었다. 화창한 날씨 속에 세종은 아름다운 경치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수레 앞 정기(旌旗)를 휘감아 돌자 말들이 울부짖었다.

 

세종의 마음속에 의심이 생겨 급히 도중문을 불러오게 한 후 회오리바람이 무슨 징조냐고 물었다. 도중문은 “신은 이미 점치고 있었습니다. 오늘 밤에 화재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세종이 놀라 “화재가 난다면 빨리 초제(醮祭)를 올려 후환을 피해야 할 것 아니요”라고 하자 도중문은 고의로 “재앙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초제도 이미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제단을 설치하기에도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상께서는 성심으로 법술을 믿으시니 어떤 상해도 당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현혹시켰다.

 

밤이 되자 과연 행궁 후면에서 화재가 났다. 맹렬하게 활활 타오르며 눈 깜짝할 사이에 행궁은 잿더미가 됐고 궁인들도 거반이 죽었다. 세종은 금의위(錦衣衛) 지휘사(指揮使)가 구조하여 생명을 건졌다. 그 일을 겪은 후 세종은 도중문을 더욱 믿었고 ‘신소보국선교고사神霄保國宣敎高士’를 제수했다. 사실 그 화재는 모두 도중문이 속임수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는 세종이 자신의 예언을 믿게 하기 위해 부하들에게 행궁에 불을 붙일 것을 명했다.

 

원래는 행궁의 거처 한 두 개만을 불태울 생각이었는데 불이 바람을 타고 맹렬하게 번지면서 커다란 화재가 돼 버렸다. 도중문은 남을 해치면서 자기만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기 행각을 서슴지 않으며 세종의 신임을 얻은 것이었다.

 

하남을 순시하면서 세종은 더더욱 도교를 믿게 되었다. 세종은 남순(南巡)을 하면서 네 살밖에 되지 않은 태자에게 나랏일을 맡겼다. 9월 환궁한 후 세종은 조정에서 물러나 은거할 생각이었다. 당시 태부경(太仆卿) 양최(楊最)가 반대했다. 세종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양최를 옥에 가두도록 했다. 양최는 옥에서 매 맞아 폭사했다. 세종은 중신들의 간언을 막기 위해 더더욱 도중문을 믿었고 그를 ‘충효병일진인忠孝秉一眞人’으로 봉했다.

 

세종은 조정 일에 상관하지 않았다. 도중문과 다른 방사들이 요구를 받아들여 상주서를 후전으로 들여보내게 했다. 전전(前殿)의 관원들은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게 만들었다. 방사들은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세종의 수도(修道)는 결코 마음을 평정시키고 욕심을 줄이는데 있지 않았다. 총애하는 비들을 며칠에 한 번씩 바꾸고 궁녀들을 학대했다. 가정 21년(1542) 후궁의 궁녀들이 세종이 잠든 틈을 타 모살하려던 ‘임인궁변任寅宮變’이 발생할 정도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세종은 귀신이 보우한 것으로 여기고 더더욱 도교를 맹신하게 됐다. 그때부터 옛 궁전인 서원(西苑)으로 옮기고 스스로 속세 밖에 있는 사람이라 부르며 모든 조정의 대소사는 대학사 엄숭(嚴嵩)이 주재하도록 했다.

 

 

 

 

세종이 초제를 지낼 때 천고문(薦告文)을 읽었다. 도중문은 그 천고문이 위로는 천신과 통하게 하고 천신과 대화하게 하여 영험하다고 했다. 천고문은 일반적으로 붉은 색으로 파란 등나무 종이 위에 썼기 때문에 ‘청사靑詞’라 불렀다. 세종은 ‘청사’를 공양하면서 대부분 사신(詞臣)에게 집필하도록 했다. 글에 능한 대신은 청사를 써 진공하면서 총애를 받기도 했다. 가정 연간에 재상에 입각한 사람은 청사를 잘 쓴 사람이었다. 그들의 자리가 공고한지 않은지는 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래서 가정 연간에는 ‘청사재상靑詞宰相’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그중 가장 의기투합한 인물이 엄숭이었다.

 

엄숭은 세종의 뜻을 잘 받들 줄 알았고 여러 해 동안 학문을 닦아 청사를 쓴 글씨가 고아할 뿐만 아니라 문장도 뛰어났다. 엄숭은 사람됨이 간사하고 과시하는데 능숙했다. 세종은 어떤 때엔 한밤중에 심혈이 정점에 이르러 천신에게 알려야 될 일이 생겼다고 생각 들면 신하들에게 청사를 쓰게 했다. 그런 상황 때마다 엄숭이 먼저 그 소식을 접하고 황망하게 일어나 등을 켜고 청사 초고를 보면서 명상에 잠겨 침식도 잊은 듯한 모습을 했다. 세종이 그런 행동을 보고 엄숭이 직무에 충실하다고 생각하며 기뻐했다.

 

청사는 대부분 변려체(騈驪體)로 썼다. 당시 사회의 문인들은 대수롭지 않은 관직이나마 얻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그런 문체를 공부했다. 그렇게 일시에 조야의 문인들이 변려체의 재능을 겨누게 됐고 그런 일이 30여 년 동안 계속됐다. 세종이 도교를 신봉해 ‘청사재상’을 임용함으로써 청사는 당시의 문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됐다.

 

세종은 신선이 되기를 갈망하면서 도법을 수련하는 것 이외에 자신의 도호(道號)를 끊임없이 새로이 봉했다. 너무 많지만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태상대라천선자극장생성지소영통삼원증응왕허총장오뢰대진인현도경만수제군太上大羅天仙紫極長生聖智昭靈統三元證應王虛總掌五雷大眞人玄都境萬壽帝君”이다. 얼마나 허황된가. 자신이 자신에게 내린 도호다. 당시 백성들은 그를 ‘자극선옹紫極仙翁’이라 불렀다.

 

그 ‘자극선옹’ 도사 황제는 장생불로를 추구하며 장기간 선단(仙丹)을 복용했다. 어느 날 선약이 작용해 신선이 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서. 선단이 그를 장생하게 하기 전에 그 약으로 인해 생명을 앗아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장생불로를 추구했던 그 ‘선옹’은 가정 45년(1566) 겨울에 감고 싶지 않았던 두 눈을 감고 천신과 이야기를 나누려 세상을 떠났다.

 

 

 

 

진정한 도인의 길을 간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장생불로만을 추구했던 희대의 황제는 그렇게 허망하게 떠났다. 황후를 멋대로 갈아치우고 궁녀들을 학살했으며 자신만의 환락의 세계를 추구했던 인물, 그가 황제 자리에 앉아 천하를 농락했으니……. 아! 동양의 전제 군주제도의 폐해가 그 얼마던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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