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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곡물수집제도에 과도한 부담, 식량·물자배급 비리 등 사회경제적 갈등

또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경제학·사회복지학 분야에 능통한 진관훈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의 ‘제주근대경제사 신문읽기’입니다. 비록 지금의 경제시스템과 여건이 구비돼 있다하지만 제주 역시 과거의 실타래가 얽히고 설킨 땅입니다. 기업과 산업이 척박했던 제주에도 그 맹아가 등장하던 시기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제주사회와 경제상황을 살핀 ‘신문’을 통해 그 시절의 기업·경제가 지금 우리 제주의 삶과 어떻게 연관·연동되고 있는지 가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1938년 일제는 ‘국가총동원령’을 내렸다. 1938년부터 일제는 중일(中日)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전시체제로 돌입하고 전쟁에 필요한 각종 군수물자 징발에 혈안이 되었다. 당시 도정(島政)은 징병(徵兵), 징용(徵用), 공출(供出) 등 3대 사업에 총력을 기우렸다. 주요 공출 품목은 20여 종으로 농산물인 보리, 벼, 절간 고구마, 면화, 잠사(蠶絲) 등과 목탄(木炭), 장작, 우마(牛馬) 목초(牧草), 미역, 감태(甘苔), 야생(野生)저마(苧麻), 백동(白銅), 청동(靑銅), 화루, 유기(鍮器)그릇 등이다.

 

특히 당시 제주지역에서 생산한 고구마(甘藷)는 절량(絶糧)시 식량 대용으로 일부만 도내에 남기고 전량 매입(공출)하여 외부로 반출시켰다.

조선소주원료회사(朝鮮燒酒原料會社)에서는 전남 제주도(全南 濟州島)의 감저 이백삽만관(甘藷二百卅萬貫)의 매입(買入)을 결정(決定)하엿는데 계약치(契約値)는 절간일관당 사십구전오리(切干一貫當四十九錢五厘)이다. 또 동회사(同會社)에서는 현하(現下)의 대용식량문제(代用食糧問題)에 대처(對處)하기 위(爲)하야 필요(必要)에 응(應)하야 우계약감저(右契約甘藷)의 일부(一部)를 제공선처(提供善處)의 방침(方針)이다(동아일보, 1939 11월 12일).

 

또한 제주지역에서 생산되는 많은 농산물이 전시물자 조달로 인해 부족하자 이를 통제할 목적으로 배급통제조합(配給統制組合)을 창립하여 식량 배급을 최소한으로 통제하기 시작했다.

 

도(島)임시(臨時) 식량배급통제조합(食糧配給統制組合)에 준하야 제주도지방식량배급통제조합(濟州島地方食糧配給統制組合)을 지난 칠(七)일에 결성하고 당일부터 규약을 시행하게 되엿다(동아일보, 1939년 12월 14일).

 

일제강점기 제주지역을 ‘절량의 공포’ 속에 몰아 놓았던 농산물 공출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다. 1946년 식량생산량은 1935~1939년 기간 평균생산량의 71%에 불과했다. 이러한 식량생산의 감소는 화학비료 생산의 격감으로 인한 비료 부족 때문이었다.

 

또한 1935~1939년 평균의 71%로 줄어 든 경작지 면적의 감소도 생산 감소의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방 후 귀환동포 및 월남민 증가로 인한 인구증가는 식량난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외에도 미곡 수집상의 부조리, 모리배의 매점매석, 식량배급 및 수배(受配)상의 부정행위, 소비증가에 그 원인이 있었다.

 

당초 미군정(美軍政)은 미곡(米穀)의 자유시장을 허가하였으나 식량부족 사태가 발생하자 1947년에는 반통제(反統制) 성격을 띤 공정가격(公定價格)과 자유가격의 이중양곡(糧穀)체계를 실시하고 ‘미곡법(米穀法)’을 공포하였다.

 

미군정의 미곡 수집령(收集令)에 따르면, 농민이나 지주는 현미(玄米)나 백미(白米) 0.45석(石)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적당한 한 가격“으로 정부에 매도하도록 하였다. 수집방법은 일제하의 기존 행정조직을 그대로 이용하여 군수, 부윤, 읍, 면장에게 책임을 지웠는데, 이러한 일제의 공출 경험과 행정 조직을 활용한 수집은 실시 초기부터 혼란을 가중시켰다.

 

미군정의 하곡(夏穀)에 대한 공출(제주지역에서는 성출이라고도 했다)은 중앙식량행정처가 설치되고 처음으로 공포한 식량규칙 제1호 ‘하곡수집’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하곡에 대한 강제공출은 일제하에서도 실시되지 않았던 것으로, 하곡은 농민의 주된 식량이었기 때문에 하곡공출은 미곡공출보다 더 큰 농민 저항을 야기시켰다.

 

이러한 미군정 곡물수집정책은 제주지역 농촌 실정에 비해 과다한 부담을 주었고 이로 인해 제주도민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미군정은 관리, 경찰인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공출작업에 나섰다. 제주도의 1946년 추곡 수매할당량은 5,000석이었으나 수집량은 1947년 1월말까지 0.1%에 그쳤으며 1947년 하곡 수매량도 할당량 17,000석 중 18.8%인 3,189석에 그쳤다. 이는 전국 수매율 97.9%에 비해 크게 저조한 실적이다.

 

1947년도 하곡 수확예상량은 약 8만5천석 정도이며 할당량의 59.5%인 10,100석 밖에 수집되지 않았다. 이는 하곡(麥作)이 대 폭풍우로 작황이 좋지 않은데 원인이 있기도 했지만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의 경찰발포사건으로 인하여 사회질서가 극도로 혼란해지고 남조선 남로당이 ‘양곡수집거부운동’을 전개한데 부분적인 원인도 있다. 이러다 보니 무리한 양곡 수집으로 많은 민원이 발생했고 수집과정에서도 생산 농민들과 곡물수집 관리들과의 마찰이 잦아지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군정의 강압적인 곡물수집정책은 제주농업의 생산력 기반을 크게 악화시켰다. 생산비 이하의 저가격 수준으로 곡물 수집을 강제함으로써 농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고 나아가 영농의욕을 저하시켰다. 그러다가 ‘제주 4․3’이 발생으로 치안질서가 극도로 악화되고 하곡 수확량이 급감하자 1948년 6월 27일, 제주비상경비사령관 최천(崔天)은 제주지구의 토벌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미군 제6사단 제20연대장 브라운 육군대령과의 담화 후, 제주도의 하곡 수집정책을 철폐시켰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군정은 초기 제주지역 농업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곡물자유 판매를 실시하여 곡물의 수급문제를 시장경쟁 원리에 따라 해결하려 하였다. 이로 인해 지주독점과 곡물에 대한 투기, 매점, 과소비, 수요증가 등이 발생해 심각한 식량부족 사태를 초래시켰다.

 

이렇게 되자 1946년 2월 미군정은 자유시장제를 취소하고 일제강점기 방식(方式)과 같은 곡물수집제도를 부활시켰다. 이러한 미군정 곡물수집은 제주도 농촌사회에 과도한 부담을 주게 되었고 도민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켜 이로 인해 민․관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외에 민․관의 감정을 악화시켰던 사건으로 식량부족과 물자부족, 그에 따른 배급에 있어 관에 의한 여러 가지 부조리 행태들을 들 수 있다. 미군정기 제주지역은 생산량 절대 부족, 미곡 수집상의 모순, 모리배의 매점매석, 소비 증가 등으로 인해 식량과 각종 생필품 부족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식량 및 생필품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군정은 식량 및 물자 배급을 실시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비리가 노출되었다. 예를 들면, 지역별로 불평등한 식량배급 체계가 생겨났고, 도민들에게는 배급표를 나눠 주지도 않고 모든 식량표를 면장실에 보관한 후 이를 정치적 무기로 이용하는 등 부조리한 배급행정 사례들이 생겨났다. 또한 도민 수요에 비해 생필품 보급이 턱없이 모자랐으며 배급과정에 있어서 관의 횡포가 심했다.

 

위와 같은 사건들로 인하여 제주도민과 미군정, 지역관리, 경찰과의 민․관갈등이 더 악화되었는데, 경제사적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제주도민과 통치당국과의 사회경제적 갈등이 '제주 4․3'의 발생과 전개에 부분적이나마 악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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