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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3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명(明) 성조(成祖) 주체(朱棣)는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넷째 아들로 연왕(燕王)에 봉해져 북평(北平, 현 북경)에 번(藩)을 세웠다. 건문제(建文帝)가 번을 없애겠다는 명을 내리자 대노해 건문 원년(1399) 7월 ‘청군측(淸君側, 군왕의 곁을 깨끗하게 한다)’는 명분아래 북평에서 기병해 4년 후 남경을 함락시키고 영락(永樂)이라 연호를 정하고 칭제했다. 즉위 후 5차례 막북(漠北)을 친정하고 정화(鄭和)를 7차례나 서양으로 파견했다. 그의 문치와 무공은 그의 부친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락 22년(1424) 7월 북벌 전쟁 중 병사했다.

 

명 성조 주체는 중국 역사상 정치적으로는 나름대로 영향력이 있는 황제로 꼽힌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고집스럽고 강퍅하며 너무 독단적이었다. 질투하고 의심이 많았으며 살인을 밥 먹듯이 한 황제였다. 영락 말년 그는 궁녀와 환관을 마구 도살했다. 그 학살 사건 중에 피살된 궁녀는 3천여 명이 넘는다. 명대 최대 살육 사건이다. 3천이나 되는 궁녀를 살육한 명 성조의 뜻은?

 

 

 

사실 성조가 궁녀들을 살육한 사건은 영락 중기에도 발생한 적이 있었다. 그 사건을 말하자면 공헌비(恭獻妃) 권(權) 씨에서부터 얘기해야 할 것이다. 영락 초년, 국가가 점차 강대해지기 시작했다. 주체가 향락을 추구하자 후궁의 미녀도 점차 많아졌다. 영락 5년(1407), 황후 서(徐) 씨가 병사한 후 황후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왕귀비(王貴妃)와 현비(賢妃) 권 씨는 성조가 가장 총애하는 비였다. 권 씨는 조선에서 선발된 절세미녀였다.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남달리 총명하고 노래와 춤에 뛰어났으며 더욱이 옥퉁소를 잘 불어 성조의 사랑을 받았다. 영락 8년(1410) 성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출정하면서 특별히 권현비를 데리고 갔다. 군대가 개선하는 도중 천자의 총애를 받던 권 씨가 임성(臨城)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세상을 뜬다. 성조는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때마침 그때 궁중에서 여(呂) 씨 성을 가진 조선 출신 궁녀 2명과 환관이 사랑을 맺는 사건이 발생한다. 원래 역대로 궁중의 궁녀와 환관이 거짓으로 부부를 맺어 같이 생활하는 현상이 있었다. 명대에도 그런 관계를 맺는 일은 계속됐다. 궁중에서는 이를 ‘대식(對食)’이라 부르고 그런 궁녀를 환관의 ‘채호(菜戶)’라고 불렀다.

 

궁에는 많은 궁녀와 비빈(妃嬪)이 있어 황제가 매 사람과 같이 있을 수가 없었다. 환관은 부부의 행위를 하지 못하지만 남자는 남자였다. 궁녀와 ‘대식’ 관계를 맺으면 같이 생활하면서 서로 여러 가지를 도울 수 있고 마음으로도 안위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거짓 부부를 맺어 왕래했다. 명 왕조 후기의 황제들은 그런 일을 방임했다. 심지어 명 희종(熹宗)은 자신이 직접 환관과 궁녀를 뽑아 대식의 관계를 맺어주기도 했다. 물론 명 성조 때에는 그런 일이 많지 않았기도 했고 자신이 사랑하는 비를 잃었으니 성조의 마음이 좋지 않을 때 공교롭게도 여(呂) 씨라는 조선여자와 환관이 서로 관계를 맺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로써 궁내에 참화의 불씨가 당겨졌다.

 

 

 

 

여 씨는 조선 상인의 딸이었다. 역사서에는 ‘가여(賈呂)’라 부르는 여 씨가 또 있었다. 조선에서 선발돼 입궁한 궁인(宮人) 여 씨는 모두 조선인이고 동성이어서 가여는 여 씨와 교류하며 친교를 맺고 싶었다. 그런데 여 씨는 가여의 사람됨을 경시해 거절했다. 그래서 가여는 마음속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북방 정벌 후 개선하는 도중 성조의 현비 권 씨가 죽을 때 마침 현비를 시봉하고 있었다. 이에 가여는 여 씨가 차에 독약을 넣어 현비를 죽였다고 무고했다. 명 성조 주체는 상심하고 있던 터라 그 말을 듣고는 대노해 사실을 확인하지도 않고 여 씨와 그와 관련 있다 싶은 궁녀와 환관 수백 명을 참살해 버렸다.

 

영락 18년(1420) 성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면서 황후로 앉히려던 왕귀비마저 죽자 성조는 다시 상심에 빠졌다. 가여와 궁인 어(魚) 씨가 사사로이 환관과 ‘대식’ 관계를 맺는 사건이 발생한다. 성조는 대노해 불같이 화를 냈다. 가여와 어 씨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 목을 매 자살해 버렸다. 성조는 까닭이 있을 것이라 여겨 친히 가여의 시비(侍婢)를 고문했는데 몇몇 궁녀들이 황제를 모살하려 했다는 생각지도 못한 자백을 듣게 된다. 이에 황제는 화를 참지 못하고 친히 궁녀들에게 혹형을 가했다. 그 와중에 연루돼 죽은 궁녀가 근 2800명에 달했다. 성조가 매번 친히 잔혹하게 형벌을 가하자 어떤 궁녀는 사형을 당하기 전에 성조에게 “당신 자신이 나이가 들어 양물이 서지도 않는데 궁녀와 환관이 서로 좋아하기로서니 무슨 죄가 있다는 말이더냐!”고 욕하기도 했다. 주체는 화공에게 가여와 환관이 서로 껴안은 그림을 그리게 해 궁녀들을 모욕 주는 동시에 대대적인 살육을 멈추지 않았다. 그야말로 도살이었다.

 

『조선실록朝鮮實錄』에 따르면 궁중의 궁녀들이 참살을 당할 때 마침 궁전에 벼락이 떨어졌다. 주체가 과보를 받을까 두려워 살인을 멈출 것이라는 기대감에 기뻐했다. 그러나 주체는 여전히 살육을 자행했다. “계시라 생각하지 않고 주륙을 자행함이 평일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황제라는 끝 모를 권력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다.

 

 

 

 

두 차례 걸친 학살 사건으로 주살된 궁녀와 환관은 3000여 명을 넘었다. 명 성조가 이처럼 궁인들을 참살할 것은 만년에 얻은 질환에 의한 것이라 보는 사람들도 있다. “명 성조 만년에 질환을 얻어 자주 쉽게 격노했다. 발작하면 제어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히스테리가 발작하는 것과 같았다. 그 본인이 잔인하고 살인을 즐겼고 만년에 질병이 더해져 정상적이지 못하고 광폭하게 됐다.” 그가 무슨 병에 결렸는지는 모른다. 『명사』나 『실록』을 편찬하면서 그저 그가 만년에 쉽게 격노했다는 것만 기록하고 있을 뿐 무슨 질병이 걸렸고 발병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다. 역사상 그와 관련된 기록은 더 이상 찾아볼 길이 없다.

 

그러나 질병이란 도피처일 뿐이다. 조카 건문제의 황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살육한 명신, 명장이 몇이던가? 궁인이란 자기의 소유물로 알고 있던 주체, 그가 과연 사람 목숨을 하늘이 내린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살아 있는 궁녀와 환관의 살을 도려내며 죽였는데. 천하가 모두 황제의 것이었는데, 그런 봉건 사회의 최고 권위였는데…….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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