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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31)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장삼풍(張三豊), 생졸 미상, 명(明)나라 때 도사, 이름은 전일(全一), 호는 원원자(元元子), 요동(遼東) 사람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거북이 모양에 학의 등, 큰 귀, 둥근 눈에 미늘창과 같은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고 한다. 명 영종(英宗) 때 ‘통미현화진인(通微顯化眞人)’에 봉해졌다. 무당파 무술의 창시자로 사람들은 알고 있다.

 

무술(武術)은 중국의 국수(國粹) 중 하나로 유구한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다. 명나라 때는 상무(尙武) 풍조가 성행해 무술 문파가 다투어 임립했다. 무술 대발전의 시기였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최초의 무술 분류는 청(淸)대 황종희(黃宗羲)의 『왕정남묘지명(王征南墓誌銘)』에 있다.

 

그중 무술을 주로 외가(外家)와 내가(內家) 양대 파로 나누었다. 소림파(少林派)는 외가로 때리고 공격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 반면 무당파는 내가로 막아서서 방어를 위주로 한다. 소림파의 강한 무공과는 정반대로 무당파의 무공은 정(靜)으로 동(動)을 제어하고 유(柔)함으로 강(剛)을 즉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소림파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무당파는 중국 무술계의 중요한 유파로, 양대 파는 중국 무술의 주류를 이룬다고 평가받는다. 그래서 무술계에는 “북숭소림,남존무당(北崇少林,南尊武當)”이라는 말이 존재한다.

 

 

 

 

역대 무술사가들의 고증과 연구를 통해 소림파의 역사와 원류에 대해서는 현재 실마리를 풀었고 대체적으로 일치된 결론을 도출해 냈다. 그러나 유독 무당파의 원류는 여전히 모호하다. 많은 이론들이 있어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무당파 그 자체는 정을(正乙)파, 전진(全眞)파, 현무(玄武)파, 삼풍(三豊)파 4개의 큰 파로 나눈다. 이것은 최근에 고증하여 얻은 결론 중 하나다. 이 4대 파를 하나하나 알아보자.

 

무당 정을파는 무당산 본궁 내부에서 전수된 일파다. 이 파의 무공은 일반적으로 외부로 전수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일전에 김자도(金子弢)에 의해 세인들에게 이 일파의 무공 ‘무당태을유박이십삼식(武當太乙揉撲二十三式)’이 알려진 적이 있다. 이합림(李合林) 도장(道長)에게서 이 권법을 배우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전수해서는 안 된다는 맹세를 했다고 한다. 이합림 도장은 이 권법의 유래에 대해 알려 줬다.

 

이 권법은 명나라 홍치(弘治) 연간(1488-1504) 정을파의 선배들이 본궁과 도문 유파 중의 토납(吐納), 도인(導引), 기격(技擊) 등을 융합해 완성한 것이라고 했다. 이 파는 권술의 동작을 중시한다. 기격 각도에서 보면 동작이 완만하고 폭이 비교적 작다. 적절하게 숨을 조절할 것을 요구한다. 마음과 호흡이 서로 맞아야 한다. 동작이 완만하기에 허리가 사타구니를 따라 움직이고 동과 정이 자유자재로 들어가고 나와야 한다. 처녀처럼 정(靜)하고 뱀이 움직이는 것처럼 동(動)해야 한다. 누에가 고치를 짜듯이 안으로 기운을 운용해야 한다. 그리고 방위의 식별이 무척 정확해야 한다. 털끝만큼의 차이가 나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순식간에 펼쳐지는 금나(擒拿) 중에 상대의 퇴로를 막아 상대를 제어할 수 있다. 이 일파는 전통을 중시한다. 이 일파의 무공은 끊임없이 갱신됐고 발전했지만 여전이 확고한 고전적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전진파와 현무파의 무공 부류는 대단히 번잡하다. 그들은 많은 권술과 검술을 포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권술로는 팔괘장(八卦掌), 태극권(太極拳), 형의권(形意拳)이 있다. 그런데 어문권(魚門拳), 원노복지권(猿猱伏地拳), 육보산수(六步散手) 등 민간에서 전해지는 진귀한 권법 종류도 이 일파에 속하는 무공이다. 검술에는 무당검, 백홍검(白虹劍) 등이 있다. 전해 내려온 제자들의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인원도 복잡하다. 이 일파에 대해 고증을 진행하면 격렬한 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예를 들어 태극권은 진가구(陳家溝)에서 유래했는가? 팔괘장의 창시자가 동해천(董海川)인가? 이러한 문제는 아직까지도 의문부호로 남아 있다.

 

 

 

 

역대로 무당파의 비조는 무당 삼풍파라고 알려져 왔다. 많은 자료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무당권술비결(武當拳術秘訣)』에서 무당의 정종(正宗) 심법(心法)은 무당 삼풍의 요결이라 기록하고 있다. 1928년 여름 만뢰성(萬籟聲)은 그가 편찬한 『무술회종(武術匯宗)』에서 무당 종동현(宗洞玄) 진인 장삼풍이야말로 무당파의 조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배석영(裵錫英), 이춘생(李春生) 주편의 『무당무공』에서는 명대 도인 장삼풍이 무당 무술을 창립했고 수백 년 동안 무수한 도가 고수들이 발전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초에는 그저 간단한 ‘팔문오수(八門五手)’ 식의 십삼세권(十三勢拳)의 무당 무술이 현재 태극권, 팔괘장, 형의권, 무당태극권, 무당팔극권, 무당검, 현무곤, 삼합도, 용문십삼창(龍門十三槍) 등 수많은 부류를 포함하는 큰 문파로 발전했다고 본 것이다.

 

무당 조사(祖師) 장삼풍의 생애에 대해서는 『명사․장삼풍전』, 『삼풍회집(三豊會集)』, 그리고 『무당산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장삼풍은 요동 사람이다. 요동에서 태어나 나중에 섬서(陝西) 종남산(終南山)에서 화룡(火龍)진인에게서 도를 배우고 도를 완성한 후 제자들을 데리고 무당산에 은거했다. 그리고 기격가(技擊家) 내공의 조사가 됐다. 무당산에 은거하면서 도관을 세우고 수도하면서 무예도 전수하고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현지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태악태화산지(太岳太和山志)』의 기록을 연구한 결과 장삼풍은 태극 음양 속에 숨겨진 오묘한 이치를 깨치고 거북이와 학의 동태를 자세히 관찰한 후 장수의 비결을 탐구해 마침내 심득하게 됐다고 했다. 무당 무공은 장삼풍이 도가의 이학 내공과 민간 예술을 융화시켜 창립한 것이라 했다.

 

그런데 『무당권술비결』에는 또 ‘무당의 정종’으로 일컫는 장삼풍이 창립한 무공은 사실 소림 무공에서 탈태해 이루어진 것이라 했다. 즉 무당파의 원류는 역시 무림 비조 소림파라는 얘기다. 장삼풍이 처음에 소림파에서 권법을 배웠다는 데서 그 근거를 들고 있다. 장상품은 원래 소림파의 오권의 정수를 배우고 십팔식(十八式)을 맥락으로 하는 무공 요결을 터득한 후 그가 배운 권법을 새 것으로 창조했다. 십팔식을 십팔자로 변형시켰고 오권 형식을 십단면(十段綿)의 장권(長拳)으로 변모시켰다. 그가 창립한 십단면 중에는 오권 십팔식과 십팔자의 요체가 통일된 것이라는 말이다.

 

 

 

 

과연 사실일까? 무당파는 정말 소림파에서 나왔을까? 이 모든 것은 장삼풍의 행적을 알아야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장삼풍에 대한 역사 문헌의 관점은 다르다. 『신선감(神仙鑒)』에서는 남조(南朝) 유송(劉宋) 때에 장산봉(張山峰)이라는 도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장산봉이 장삼풍인지는 알 길이 없다. 황종희가 지은 『왕정남묘지명』에서 장삼풍은 무당의 연단(煉丹) 도사라 기록하고 있다. 송 휘종(徽宗)이 그를 소견하려 했으나 그의 성정이 강직해 만나지 않았다. 꿈속에서 현제(玄帝)를 만나 권법을 전수받았다. 이렇게 해서 무당 내가 권법은 장삼풍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장삼풍은 북송(北宋) 시대 사람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도통원류지(道通源流志)』에도 장삼풍 진인이 기록돼 있는데 이름은 군보(君寶)로 원(元)말 명(明)초의 요동 의주(懿州, 현 요녕성 흑산黑山경내) 사람으로 돼 있다. 고증을 통해 라좌운(羅佐雲)은 『무림(武林)』 1985년 제9기에 장산봉과 장삼풍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황종희는 『신선감』 속의 남조 유송 때의 장산봉을 송나라 때의 장삼풍으로 오해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장삼풍이 원래 무술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꿈속에서 무공을 완성했다는 신화와 같은 전설은 와전이라 했다.

 

동시에 그는 『도통원류지』에 기재된 원말 명초의 장삼풍도 무당파의 개산비조가 될 수 없다고 했다. 무당산은 명나라 성조(成祖) 주체(朱棣)가 30만 명의 인력과 말을 동원해 건축한 중국 도교의 중요한 성지인데 『명사․장삼풍전』 및 『방기전(方伎傳)』에 그 장삼풍의 사람됨과 무공에 대해 한 글자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런 까닭에 얻는 결론은 만약 무당 무술이 장삼풍에게서 나왔다면 소림 무술이 불교 선종 달마조사에서 나왔다는 것과 같이 황당하고 논할 가치도 없다고 했다.

 

황종희의 아들 황백가(黃百家)는 왕정남(王征南)의 장문 제자다. 그는 강희(康熙) 연간 편찬한 『내가권법』 중 『무당권술비결』과 같은 관점을 기록하고 있다. 장삼풍은 내가 고수요 소림에서 무예를 배웠고 소림 무공을 수정하고 발전시켰다고 했다. 이 두 책을 근거로 라좌운도 황백가가 이미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무당은 소림에서 나왔다는 일을 설명했기 때문에 무당은 소림에서 기원했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그러나 관련 자료의 희소성이라는 제약 때문에 라좌운도 이런 관점에 대해 더 상세하게 논증하지 못하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이어온 ‘중문경무(重文輕武)’ 사상의 영향으로 무술의 역사와 전설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깊은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다. 비록 민국(民國) 시기에 출판된 무술 서적들은 종류도 많고 수도 많으나 편찬자들 모두 자신의 사전(師傳)과 문파를 좋게 쓰기 위해 역사를 고치는 것도 마다치 않아 자신들에 불리한 사실을 지워 버리고 자화자찬하기에 바빴다. 이를 위해 그들은 날조하거나 영웅, 위인을 그 문파의 개산 비조로 가탁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이렇게 호도해 만들어진 결론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고집스레 이어지고 있다.

 

만약 거짓을 없애고 진실이 무엇인지를 찾으려면 중국 무술계의 고질적인 파벌간의 편견을 버려야 한다. 관련된 사료를 실증적으로 연구하고 토론하지 않으면 무당파 무술의 원류에 대한 수수께끼는 결코 풀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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