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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훈의 '제주근대경제사 신문읽기'(5) 최영 장군과 목호, 그리고 조선의 등장

또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경제학·사회복지학 분야에 능통한 진관훈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의 ‘제주근대경제사 신문읽기’입니다. 비록 지금의 경제시스템과 여건이 구비돼 있다하지만 제주 역시 과거의 실타래가 얽히고 설킨 땅입니다. 기업과 산업이 척박했던 제주에도 그 맹아가 등장하던 시기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제주사회와 경제상황을 살핀 ‘신문’을 통해 그 시절의 기업·경제가 지금 우리 제주의 삶과 어떻게 연관·연동되고 있는지 가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고후(高厚) 고청(高淸) 고계(高季) 삼위형제는 왕명을 받들어 신라국에 입조한 즉 조정에서 이국신자(異國神子)가 왔다 하야 대단히 기뻐하며 대연(大宴)을 배설하고 린국(隣國)의 우의를 돈독케 하며 훈장을 각각 주어 사작(賜爵)하고 국호를 탐라(耽羅)라 하고 보개(寶蓋)와 의대(衣帶)를 주어 보내니 정치는 날로 밝아지며 탐라국은 안락의 복지로 세계에 전파케 되어 입국자는 날로 더하며 백성은 격앙을 놀래하였다(전설의 제주도 성주왕자전 1, 1929. 12. 24. 동아일보).

 

탐라기년(耽羅紀年)에 의하면, 고을나(高乙那) 15대손 고후(高厚) 고청(高淸) 고계(高季) 3형제가 탐진(耽津, 현 康津)을 거쳐 신라에 입조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문주왕(文周王) 2년(서기 476년)에 탐라의 사자(使者)가 방물(方物)을 백제에 헌납하니 왕이 기뻐하여 그 사자에게 은율(恩率)이라는 관직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탐라국은 성주 왕자를 주축으로 반독립적인 정치형태를 누려왔다. 고려 숙종 10년부터 고려의 군현이 되었지만 지리적 여건이 작용한 탓에 반독립적인 위치를 누리면서 나름의 정치적 독자성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아진다. 그러나 삼별초의 난(일명 통정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내도하였던 원나라 장수 홍다구, 흔도가 본국에 장계하여 제주에 달로화적총관부(達魯花赤摠管府)를 설치하게 되면서 원나라의 식민지가 된 탐라는 주권과 독자성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성주왕자는 통정의 시체를 희생하야 사직에 제하며 관민은 김방경을 칭송하고 대연을 배설하야 태평을 즐기었다. 송보연으로 군사를 통솔하고 유진케 하며 흔도는 명병 오백을 머믈러 유숙케한 후 김방경은 개선가를 부르며 본국에 돌아가니 사방에 일이 업고 천하가 태평하였다.

 

탐라국에 통정의 란은 그쳤으나 몽장(蒙將) 홍다구(洪茶邱) 흔도(炘都)가 원국(元國)에 장계하되 탐라국은 남송(南宋)과 일본의 요충이 된다 하야 운국에서 달로화적총관부(達魯花赤摠管府)를 탐라국에 무리로 설치하였다(전설의 제주도 성주왕자전 4, 1929. 12. 28. 동아일보).

 

이에 성주왕자는 절대로 거절하였으나 약고불가이적강(弱固不可以敵强)이오, 과고불가이적중(寡固不可以敵衆)이라 한손에 칼을 들고 한손에 금을 들어 금으로 달래며 칼로 위협하니 슬프다.

 

어느 시대에는 란신적자가 없었으리오. 매국적들이 금력에 팔리어 조약을 허락하였나 여지없이 원국에 부속이 되었다. 이른바 삭을 쫓고 범을 불러 스스로 호위함과 같다(전설의 제주도 성주왕자전 5, 1930. 01. 09. 동아일보).

 

이후에는 원국에서 무력으로 설치한 화적총관부에서 탐라를 통치했고 성주왕자는 호위로 감금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 반독립적인 정치적 위상을 지녔던 탐라 위신은 없어지고 도민의 생활은 날로 곤궁하여 졌다.

 

화적총관부에서는 도내 곳곳에 사찰과 신당을 건축하였으며 또한 도내 10목장을 설치하여 우마를 길러 훌륭한 우마는 모두 원국으로 실려 보냈다. 이 뿐만 아니라 농산물 해산물 전부를 화적총관부에서 독점하여 도민들의 삶은 피폐할 때로 피폐해 졌다.

 

그럭저럭 세월은 흘렀다. 백여년이 지내가고 원국백성의 핍박은 날로 심하였다. 탐라국민의 호소는 한울에 사무치게 되인지 신명이 탐라국을 도우심인지 원국은 국위(國位)가 떨어지고 명나라(明國)가 통치권을 가지게 되었다. 원국은 형세 위급함을 당하야 도읍을 탐라국으로 옮기고자 하야 원목수(元木手) 등 수백인과 건축재료품(建築材料品)도 많이 수송하야 거의 원나라 천도지(遷都地)가 될 뻔하였다(전설의 제주도 성주왕자전 5, 1930. 01. 09. 동아일보).

 

고려 공민왕 23년경 명나라에서 고려에 말 이천 필을 청구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문하평의(門下評議) 한방언(韓邦彦) 간마사(揀馬使) 유경원(劉景元)등을 탐라에 파견하여 목사 리용장(李用藏)으로 하여금 원관부(元官府)에 교섭하여 말 이천 필을 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관부 목호(牧胡) 석질리(石迭里)가 고려 국신 리용장과 유경원, 한방언을 죽이고 자칭 동합흡적(東西哈赤)이라 하며 횡포가 날로 심하여 갔다. 이때 성주 고신걸(高臣傑)과 왕자 문공제(文公濟)가 말 이백 필을 주선하여 고려에 보내며 리용장, 한방언 들을 죽인 연유와 그 간의 목호들의 횡포를 고려 공민왕에게 주달(奏達)하였다.

 

처조사신(天朝使臣) 리용재 유경원 한방언들을 원관부 목사 석질리가 원마(元馬)를 무리로 청구한다 하고 오월 십칠일에 죽이고 횡포가 날로 심하오니 청컨대 대책을 쓰사 대국의 모욕을 씻으시고 탐라국민의 생명을 구원하야 주시압소서. 탐라국 성주 고신걸 왕자 문공제 백배 고려국왕 전하(전설의 제주도 성주왕자전 5, 1930. 01. 09. 동아일보).

 

이 글을 본 공민왕은 대노하여, 목호군을 진압시키고자 최영(崔塋)을 주축으로 염흥방(廉興邦), 목인길(睦仁吉), 김유(金庾) 등의 장수와 전선 이백사십여척, 군사 이만륙천오백여명을 탐라에 파병했다. 명월포를 통해 제주도에 들어온 최영은 샛별오름에서 대승을 거두고 산남 호도(虎島, 범섬)까지 도망간 호적(胡適)들을 전부 소탕하였다.

 

최영대장은 여페를 다 정리하고 석질리 등 팔십명과 민간유죄자 십여명의 포로를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갈 새 성주 고신걸(高臣傑)과 왕자 문공제(文公濟)는 최영의 손을 붙잡고 고려국과 동맹하야 보호받기를 청하였다.

 

탐라국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노래하니 탐라백성의 기쁨은 하늘에 닿은 듯하였다. 성주왕자 새로 이상적 정부를 건설하고 안녕질서를 정돈하였었다(전설의 제주도 성주왕자전 8, 1930. 01. 13. 동아일보).

 

고려군에 의해 석질리의 난이 진압되자 탐라국 성주와 왕자는 고려국과 동맹하여 보호받기를 청하였으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믿을 수 없는 것은 세상일이라 고려국과 공수동맹(攻守同盟)하자 하였으나 불과 이삼십년간에 고려국은 망하고 이조(李朝)는 신정부를 창설하고 문치와 덕화를 사방에 베푸니 그 덕이 탐라에도 미치었다.

 

성주 고봉례(星主 高鳳禮)와 왕자 문충세(王子 文忠世)는 문치와 덕화에 감화되어 납토(納土)할 생각이 났었다. 이조 개국 일년 경에 성주왕자가 납토를 청하매 왕이 그를 허락하시고 성주왕자 이름이 참람하다 하야 성주로 좌도지관(左都知官)을 배하고 왕자로 우도지관(右都知官)을 배하며 또 나라 이름을 제주(濟州)라 고치고 고인하야 군현제(郡縣制)를 베풀었다(전설의 제주도 성주왕자전 8, 1930. 01. 13. 동아일보).

 

조선 태종 2년, 성주 고봉례와 왕자 문충세가 입조하여 성주왕자의 작위 및 탐라국호를 조선 조정에 납토(納土, 그 국가의 땅과 모든 것을 주어 의지함)함으로써 탐라국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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