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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훈의 '제주근대경제사 신문읽기'(3) 쌍안경의 등장과 높아진 생산성

또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경제학·사회복지학 분야에 능통한 진관훈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의 ‘제주근대경제사 신문읽기’입니다. 비록 지금의 경제시스템과 여건이 구비돼 있다하지만 제주 역시 과거의 실타래가 얽히고 설킨 땅입니다. 기업과 산업이 척박했던 제주에도 그 맹아가 등장하던 시기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제주사회와 경제상황을 살핀 ‘신문’을 통해 그 시절의 기업·경제가 지금 우리 제주의 삶과 어떻게 연관·연동되고 있는지 가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조선에서 가장 큰 섬이오. 가장 남쪽에 있는 제주도에서는 거의 바다의 소산으로 생애를 삼으며 특별히 그곳에서는 사나이보다 여자가 많이 활동하야 물속에도 들어가고 멀리 본토로 장사도 다닌다 함은 우리가 이미 들은 지 오래이며 해녀의 활동으로 생산하는 돈이 일년에 수백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와 가치 매년에 바다에 나가서 해조류(海藻類)와 어류를 잡는 여자의 수효는 만 여 명에 달하고 그 중에 매년 사월부터 구월까지 부산 울산 등지에 나아가서 활동을 하는 여자의 수효가 사천명이상이나 되며 육칠장 이상이나 물속으로 들어가서 뎐북(전복)과 기타 해조를 따내는 동시에 여러 가지로 바다 속의 발견도 많이 하였다.

 

이네의 수입은 한사람이 평균 삼백원 값어치를 생산함으로 사천명의 총수입은 실로 일백이십만원의 큰돈을 생산하야 실로 조선 수산계에 적지 아니한 수자를 차지할 뿐 아니라 적게 말하면 그네의 활동은 제주도의 생명이오. 다시 말하면 조선 산업계에 중대한 현상이다(1920.04.22. 동아일보).

 

1900년 이전까지 제주도 경제는 고립적이고 상업활동도 활발하지 않은 자급자족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가장 먼저 일소시킨 것이 ‘해녀경제’이다. 즉, 일본무역상의 등장으로 해산물의 수요가 증가하고 이로 인해 해녀들의 생산물인 해산물의 경제적 가치의 상승하기 시작하여, 채취한 해산물의 환금화(還金化)로 제주도 경제의 초석이 된 것이다. 해녀경제의 성장으로 인해 농가소득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제주도 경제가 성장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해녀물질이 제주도 경제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섬에서는 처녀들이 열 살만 되면 육지에서 바느질과 음식 요리법을 배우듯이 잠수법(潛水法)을 배우러 바다로 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야 십칠팔세까지는 완전한 여성 즉 완전한 해녀가 되는 것이니 육지에서 ‘바느질을 배워야 시집을 가지’하는 말 대신에 제주도에서는 ‘물일을 해야 시집을 가지’ 하는 것이다.

 

제주도의 여성들은 헤엄 못 치는 여성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만큼 생활이 유족하다. 그들의 근면함도 비길 지방(地方)이 없을 것이다. 눈앞에 무진장의 보고(寶庫) ‘바다’가 있고 그들이 근면하니 어찌 생활이 군색하다 하랴.

 

육지에 ‘머슴’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머슴사리’를 나가는 것은 사내들이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여편네들이 머슴사리로 나가는 것이다. 삼개월, 육개월, 일년 이렇게 세 종류가 있어서, 정월달에 접어들면, 남편에게 집안일을 보살피도록 하고는 머슴사리를 나간다. 그들은 섬 안에서만 머슴을 사는 것이 아니라 멀리 대판, 동해연안의 거친 물결을 정복하여 가며 풍경 다른 동양의 어촌을 샅샅이 뒤진다.

 

머슴사리 계약이 결정되어 떠나는 날을 앞 둔 그 전날 밤에는 전 가족이 모이어 점복과 해삼을 접시에 수북이 담아 놓고 석별연을 베푸는 것이다. 이리하야 돌아올 때에는 약 반년 만에 백여원 많을 때는 이, 삼백원까지 올라간다고 하니 일년 내 피땀을 흘려 머슴사리하고도 삼십원 내외밖에 만져 보지 못하는 육지의 사내머슴들은 부러워하여도 족할 것이다(1935. 08. 08. 동아일보).

 

1900년 이전까지만 해도 사회적으로 천시 받고, 경제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였던 해녀물질이 사회, 경제적으로 인정받게 된 이유는,

 

첫째,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의 경제적 가치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제주 해녀들의 채취한 전복, 소라, 해삼, 미역 등은 주로 진상품이었으나 1900년경부터 일본 무역상들이 등장하고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상품으로 인정되었다. 이때부터 해녀노동이 제주도 농가의 주요한 현금 소득원이 되었다.

 

둘째, 제주도 해안의 황폐화로 인해 제주 해녀들의 출가가 촉진되었다. 본격적으로 해녀 출가물질이 시작된 것은 1880년대 말 제주도에 진출한 일본인 잠수기업자들의 남획에 의한 제주어장의 황폐화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어로기술의 발달이다. 식민지기 어로기술의 발달이란, 쌍안(雙眼) 잠수경의 보급을 의미한다. 쌍안 잠수경을 사용함에 따라 종래 2~3m도 안 되었던 수중 작업시의 시계가 20m까지 넓어졌을 뿐 아니라 눈의 피로도 현저히 감소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생산성이 크게 증가했다.

 

 

 

그럼으로 대개 해녀선 한척이면 선부(船夫)가 이삼인이 따르는데 그 남자들이 물주(物主)노릇을 하고 겸하야 서기(書記)의 일을 보는 관계로 제주 자기 고향에서 제일 품행이 단정하고 일촌 사람이 모두 흠양하는 사람이라야 해녀들이 따라 나선다고 합니다. 이리하야 선부는 자기의 딸들과 같이 대접하고 처녀들의 자기의 아버지와 같이 섬기어 돌아다니는 동안 일가족과 같고 단란한 살림살이를 하며 생사존망을 같이합니다.

 

화장하기에 정신이 업는 ‘모던걸’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활을 견학시킬 필요가 있지 아니할 가 합니다. 인정이 깊은 그들이라 손대접도 잘 합니다. 멀리 찾아준 뜻을 감사하며 ‘조랑선(小舟)’을 타고 한참 가더니 사십길이나 깊이 갈머 두었던 전복과 구미를 끄집어 내어 이십개 가량을 줍니다(1928. 06. 29. 동아일보).

 

어느 고령해녀의 증언에 의하면,

 

10살부터 물질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일곱에 이미 상군이 되었고, 스무살에 결혼을 한 후에도 물질로 가족의 생계를 도맡았다. 한반도 바다는 물론 동경, 쓰시마, 블라디보스톡, 청진 등 물질하러 안 가본 곳이 없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밭 99개를 샀다. 이중 3분지 1인 33개의 밭은 ‘제주 4․3’ 때 낮에는 경찰, 밤에는 산사람들로부터 큰 아들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팔아 그들에게 상납했다. 다음 3분지 1인 33개의 밭은 둘째 아들을 6.25 동란 때 참전을 막으려고 팔아 썼다. 마지막 3분지 1인 33개의 밭은 ‘제주 4․3’ 때 죽은 큰 아들 대신하여 장손을 대학 공부시키고 결혼자금 보태느라 다 팔았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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