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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27)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문자옥(文字獄)이란 사전적으로는 여러 필화(筆禍) 사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통치자들이 지식인들의 반항을 방지하고 진압하기 위해 고의로 작품 중에서 단장취의(斷章取義)해 죄명을 꾸며 감옥에 가두거나 죽이는 행위다. 중국 역사상 벌어진 문자옥은 한 둘이 아니다. 진시황(秦始皇), 주원장(朱元璋) 등 모두 소름끼치는 문자옥을 단행했다.

 

송(宋)나라 황제 휘종(徽宗) 조길(趙佶)은 풍류를 즐기는 성품을 지녔다. 황궁의 삼천궁녀도 그의 사욕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는 화장을 하고 출궁해 민간에서 양가부녀를 빼앗았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경성의 기녀 집에서 절세미녀 이사사(李師師)를 발견했다. 백만교태의 이사사의 용모는 조길의 혼을 쏙 빼버렸다. 여러 차례 그녀와 만났다. 휘종 황제의 풍류 소식이 이사사의 전 남편 가혁(賈奕)에게 전해지자 그는 쓰라림을 참지 못해 통한을 쏟아내는 문장을 썼다. 그중 “황제의 수레 방울 울리며 돌아가며 숙박비로 교룡을 남기었네(回鑾,留下鮫當宿錢.)”(『南鄉子』)라는 구절이 보인다. 무슨 말인가 천하의 주인이라는 황제가 기생집을 드나들었다는 말이 된다. 절대 군주가 ‘돈’도 주고. 황제의 신분인 조길이 그 사를 읽고는 대노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손을 휘저으며 웃음으로 넘겼다고는 하지만. 결국 가혁을 파직하고 당시에는 오지와 같던 경주(瓊州)로 보내버린다.

 

 

 

 

이런 사건이 전형적인 문자옥이다. 여러 작품 속에서 한 구절을 가지고 죄를 뒤집어 씌워 반대자나 귀찮은 인물을 처리해 버리는 통치자들의 억지다. 문자옥은 바로 중국 봉건 전제국가의 산물이다. 봉건 왕조의 통치자들은 천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그들은 백성이나 신하들이 단지 순종하고 복종하기만을 요구했다.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어떤 행위도 해서는 안 됐다. 시나 문장은 군왕을 칭송하는 공덕비와 같아야 했다.

 

앞서 예시한 내용은 황제가 기녀를 돈으로 샀다는 말과 같은 것이니 지존을 암암리에 일반 백성과 무엇이 다르냐고 비유한 것이다. 어떤 사람도 어떤 비유를 가지고도 황제의 존귀함을 폄하하는 암시를 해서는 안 됐다. 불공평하지 않느냐고? 천하의 주인은 황제요, 천하의 땅과 재화는 황제 것이요, 사람도 황제 것인데 무엇이 문제인가.

 

이런 사회제도 아래 황제의 희로애락은 바로 국가 법률이 됐다. 황제는 영원한 존재요 정의이니 위반해서는 안 됐다. 문자옥은 바로 군왕제도의 흥망에 따라 존재했다. 일찍이 주(周)나라 때 여왕(勵王)이 문자의 죄를 처벌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런 악습은 줄곧 행해져 오다 명(明)나라 때에 독버섯처럼 창궐해 만연했다. 청(淸)나라 때에는 소수민족인 만주족이 중원의 주인이 된 때라서 자신들을 야만인으로 폄하는 것이 두려워 문자옥을 대대적으로 행한다. 청나라 이백여 년 동안 문자옥은 중국 역사상 가장 어둡고 야만적이며 잔혹한 참상의 옥쇄가 됐다.

 

 

 

 

문장이나 시구, 혹은 상소의 문장이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면 황제는 무자비하기 그지없는 형벌을 내렸다. 송대에 휘종이 가혁을 파면하고 변방으로 내쫓은 것은 천만다행의 자비인 셈이다.

 

명 태조 주원장은 호유용(胡惟庸)과 남옥(藍玉)의 안건을 다루면서 그들과 연루시켜 능지와 요참으로 주살한 사람만 5만 명에 이르며 무수한 집안의 9족을 멸해 차마 볼 수 없는 참극을 자행했다. 주원장이 대대적으로 문자옥을 단행한 이유는 천하의 백성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어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다스리기 편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언제 자신이 ‘그럴 수도 있다’는 죄명을 씌울지 알 길이 없으니. 불안 심리를 이용한 통치 수단인 셈이다.

 

문인과 뜻있는 인사들은 공명을 추구하려 하지 않았다. 조정에 관리가 되는 것을 피하려는 풍조도 만들어 졌다. 조정 관리들은 더더욱 두려움을 느꼈다. 매일 아침 조정에 나가기 전에 가족들과 이별 아닌 이별을 고하기도 했다. 자신이 살아서 조정에서 나올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문자의 출현과 광범위한 사용은 사회 문명과 진보의 중요한 상징이다. 그러나 중국의 길고 긴 전제주의사회에서 문자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재난과 죽음을 주는 수단이 돼 버렸다. 그 시대 문자옥은 제왕과 권신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자신을 보호하는 통치의 무기가 돼 버렸다. 문자옥을 통해 억울한 죄명을 씌우는 그 배후에 피비린내가 난무하고 잔인하며 흉악한 봉건왕조의 진면모가 있었음을 보게 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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