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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룡의 '담담(談談)클리닉'(13) 과학사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H.M.

 

기억과 망각에 대한 철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한 책을 본 적이 있다. 통상적으로 기억(나중에 설명하겠지만 특히 삽화적 기억)은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동일인이라고 믿게 하는 근거로 알려졌다. 그러다 보니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어떤 철학이든지 ‘존재’나 ‘변화’에 관해 말할 때 ‘기억’이 주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관심은 많지만 그런 부분은 어쭙잖게 거론할 능력은 없고 나는 기억에 관한 너무나 유명한 과학사(科學史) 하나와 짧은 설명을 붙여 보려고 한다. 읽는 동안에 재미나 있었으면 좋겠다.

 

1953년. 약물 치료뿐만 아니라 어떤 민간요법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을 전혀 할 수 없을 정도의 난치성 간질을 앓던 헨리에게 외과의사 스코빌은 실험적 치료를 제안한다. 그것은 헨리의 간질 근원지로 추정되는 해마(hippocampus)를 제거하는 수술이었다(실제로는 해마와 편도체(Amygdala)를 포함하는 양측 측두엽의 안쪽 부위였다고 한다. 최근 편도체는 어떤 기억에 감정을 채색하는 것과 관련된 모종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로렌 슬레이터는 문학적 표현, 여성의 감성에다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비평을 잘 버무린 글을 써 작가로서 명성이 높은데, 헨리의 사례와 당시 수술 과정에 대해서 그녀의 베스트셀러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9장 기억력 주식회사>를 통해 다소 엽기적이고 충격적으로 묘사한 바 있다. 

 

 

 

소장에서 대장으로 막 넘어가는 부위에 충수(충수돌기)라는 것이 있다. 대장이 시작하는 맹장에서 꼬리모양으로 뾰족하게 돌출된 부위가 충수다. 예전에는 충수돌기라고 했는데 충수(蟲垂)라는 말에 이미 돌기의 의미가 들어있다고 판단했는지 요즘에는 그냥 충수라고 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흔히 ‘맹장염’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충수 염증이 생긴 것으로 정확한 명칭은 충수염이다(appendicitis).

 

네이버 국어사전을 보니 충수와 같은 <의학 용어>로 ‘막창자꼬리’가 있었다. ‘막창자의 아래 끝에 붙어있는 가느다란 관 모양의 돌기.’ 그렇다. 맹장이 바로 ‘막창자’인 것이다. 아무튼지간에 이 충수란 곳의 기능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아직까지 뚜렷하게 밝혀진 바 없다. 없어도 상관없는 곳 취급을 받는다. 엉뚱한 오해는 하지 말고 들어줬으면 한다. 예를 들어 충수염이라는 판단아래 개복 수술을 하였는데 충수가 깨끗했다. 음. 어렵게 개복한 김에 충수를 제거하고 나와도 좋겠다. 생각하기에 따라 충수염 예방 효과라도 있지 않겠는가?

 

또 딴 길로 새려고 한다. 내가 느닷없이 ‘충수’ 이야기를 한 이유는 당시만 해도 ‘해마’가 두뇌의 충수 취급을 받았다는 비유를 하고 싶어서이다. 당시는 기억에 미치는 영향이 큰 특정한 뇌 부위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심지어 해마는 없어도 상관없는 불필요한 부위라고까지 생각했던 것이다. 수술 후 헨리의 발작은 예전보다 확실히 줄었지만 기억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수술 전에 있던 일에 대한 기억은 거의 대부분 보존했지만, 수술하고 나서는 방금 보거나 들은 일에 대해서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헨리의 기억은 수술 전에서 멈춰 있었다.

 

기억에는 크게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흔히 절차적 기억(procedure memory)이라고 불리는 기억인데 이것은 예를 들어 자전거 타기, 타자, 피아노, 수영 혹은 스키 타기 등과 같이 지각이나 운동, 인식하는데 필요한 기술(skill)을 말한다. 흔히 이런 기술의 기억은 반복 학습을 통해 ‘몸이 기억한다.’는 말을 한다. 어릴 적 반복 학습을 통해서 익힌 수영을 우리 몸은 평생 ‘잊지 않는다.’ 자전거 타기도 마찬가지다. 바로 이런 기억이 절차적 기억이다.

 

두 번째는 우리가 통상 ‘기억’이라고 하는 서술적 기억(Declarative memory)이다. 서술적 기억도 하나는 사실(fact)에 대한 기억인 의미적 기억(“대한민국의 국기는 태극기이다” “인왕산에서 호랑이를 본 적이 있다”)과 언제나 행위자 또는 수용자로서 자신이 포함되는 삽화(event)에 관한 삽화적 기억("국기 하강식이라고 길거리에 딱 서 있었는데 말이야. 오줌이 마려워서 미칠 뻔 했어" “인왕산 호랑이를 만났을 때가 기억나. 얼마나 무섭던지 지금도 그 때만 생각하면 심장이 다 벌렁거려”)으로 나눌 수 있다. 해마와 편도체를 포함하는 측두엽 안쪽은 이런 의미적, 삽화적 기억을 모두 포함하는 서술적 기억의 저장에 관여하는 부위이다.

 

 

 

 

예를 들어 미모의 금발을 가진 담당 간호사가 헨리의 병실에 들어와 그와 인사를 나눈다. “안녕하세요. 헨리씨. 저는 헨리씨 담당 간호사 메리라고 해요. 반가워요.” “제 담당 간호사 메리씨라구요? 반가워요. 정말 예쁜 금발을 가지셨네요.” 10분 후. 간호사 메리가 다시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헨리씨.“ ”안녕하세요. 정말 예쁜 금발을 가지셨네요. 그런데 누구시죠?“ 날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헨리의 어머니는 헨리가 해마 절제 수술을 받은 지 10년이 지난 1960년대에 돌아가셨다. 하지만 그 소식을 전할 때마다 헨리는 언제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처음 듣는 사람처럼 깜짝 놀라며 애통해 했다.

 

정말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지만 슬그머니 이런 못된 상상도 하게 된다. 1975년 어느 날 아침, 오늘도 20년째 헨리의 담당 간호사인 메리가 병실로 들어온다. “좋은 아침이네요. 헨리씨.” “그래요. 그런데 누구시죠?” “저는 20년째 헨리씨 담당 간호사 메리라고 해요.” “그렇군요. 오늘 제 어머니가 오시나요?” “헨리씨, 미안하지만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어머니는 15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나셨어요.” “뭐라구요?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요? 아니, 이럴 수가...흑흑.....그런데 당신은 누구죠?” 헨리의 병실에선 어제 아침과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헨리의 사례를 통해 해마는 들어온 정보를 단단하게 응축시켜 기억으로 만드는 장소라는 이론이 설득력 있게 대두되었다. 어떤 정보가 해마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해마에서 단단하게 응축되어 대뇌 피질 안의 다른 저장 장소로 이동되는 것이다. 그런 기억을 ‘장기 기억’이라고 말한다. 헨리가 할 수 있는 기억들은, 다시 말해 해마 절제 수술 전에 알고 있었던 사실들은, 이미 단단하게 응축되어 대뇌 피질의 다른 장기 저장 장소에 이동된 장기 기억들이다. 그래서 헨리는 해마가 없어도 그것들은 기억할 수 있었다. 또, 수십 년이 지났어도 헨리가 대통령은 여전히 트루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브로이어와 프로이트 공저 <히스테리 연구>에 등장하는 유명한 환자 ‘Anna O' (본명은 베르다 파펜하임(1859~1936)이다. 77세에 사망한 그녀는 사회사업가와 여권운동가로 활동하여 기념우표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가 정신분석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신경 과학 특히 기억에 관한 연구에서 그와 비교할 수 없는 획기적인 지평을 연 환자 헨리는 의학 문헌에서 H. M.이라는 이니셜로 등장한다. 본명은 ‘헨리 구스타프 몰레이슨’이다.
 

 

그는 연로하여 MIT 대학 인근의 한 요양시설에서 기거하다 2008년 82세 나이로 별세했다. “H.M., an Unforgettable Amnesiac, Dies at 82”. 뉴욕 타임스에 실렸던 부음기사 제목이라고 한다. H.M.의 사망과 관련한 당시 우리나라 언론 기사 중 꽤 괜찮았던 것은 의학전문칼럼니스트 이성주가 쓴 <코메디닷컴: 이성주의 건강편지, ‘기억의 메커니즘을 가르쳐주고 떠난 사람’>이었다. 덕분에 기사에 나온 그림들도 인용할 수 있었다. 내 글은 나름 쉽게 이해를 돕기 위해 다소 정형화시켜 쓴 글이다. 그러다보니 기사 내용과 관련하여 사소한 의문과 이야기꺼리는 있겠지만 이해 가능할 범위일 것이라 생각한다.

 

의학전문칼럼니스트 이성주가 쓴 기사 전문 바로 보기.

 

이범룡은?
=제주 출생. 국립서울정신병원에서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2002년 고향으로 돌아와 신경정신과 병원의 문을 열었다. 면담이 어떤 사람과의 소통이라면,  글쓰기는 세상과의 소통이다. 그 또한 치유의 힌트가 된다고 믿고 있다. 현재 서귀포시 <밝은정신과>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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