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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02)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장창종(張昌宗 : ?-705), 장역지(張易之 : ?-705) 두 형제는 당나라 정주(定州) 의풍(義豊, 현 하북 안국[安國]) 사람이다. 두 사람의 미목이 수려하며 사랑스럽고 영리해 무측천(武則天)의 개인 남총(男寵[사전적 의미로 남총이란 ‘예쁘게 생긴 남자가 특별한 사랑을 받는 일’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중국어의 의미 ‘총애를 받는 남자’라는 의미로 썼다])이 됐다. 춘관시랑(春官侍郞) 벼슬을 했고 업국공(鄴國公), 항주공(恒周公)에 봉해졌다. 무측천의 만년에 두 사람은 권력을 잡고 사리사욕을 채웠다. 신룡(神龍) 원년(705) 장간지(張柬之) 등에 의해 중종이 복위할 때 궁중에서 참살됐다.

 

무측천은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요 봉건시대 걸출한 정치가다. 당(唐) 왕조 290년의 역사 중 근 반세기는 무측천이란 여성 황제가 연출했다. 그녀의 일생의 공과는 시대에 따라 칭찬받기도 했고 폄하되기도 했다. 재잘재잘 끊임없이 지껄이는 욕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그녀가 남총을 거느렸다는 것이다. 사사로이 남총과 함께 했다는 것은 천고에 씻기 힘든 추문이 됐고 저주의 표적이 됐다. 그리고 그녀가 창출한 탁월한 정치적 업적도 그에 따라 파묻혔다.

 

무측천이 총애한 남자는 설회의(薛懷義), 심남로(沈南嫪)와 장역지, 장창종 등이 있다. 고종(高宗)이 죽자 설회의가 먼저 무측천의 사랑을 받았다.

 

설회의의 본명은 풍소보(馮小寶)로 낙양 거리에서 고약을 팔던 행상인이었다. 키가 크고 건장해 무측천에게 추천돼 총애를 받았다. 풍소보가 궁에 출입을 쉽게 하기 위해 무측천은 그의 머리를 깎고 출가시켜 낙양의 명찰 백마사(白馬寺)의 주지에 임명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회의’로 바꾸고 설 씨의 성을 하사했다. 설회의는 남다른 총기가 있고 또 만상신궁(萬象神宮) 건축에 공이 있어 정삼품 좌무위(左武衛)대장군이 됐고 양국공(梁國公)에 봉해졌다. 나중에 여러 차례 대총관(大總管)을 역임하면서 군대를 이끌고 돌궐(突厥) 원정에 나서기도 했다. 오래지 않아 어의(御醫) 심남로가 무측천의 새로운 남총이 되자 설회의의 질투가 시작됐다. 한번은 무측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천만금을 들인 만상신궁을 불태워 버렸지만 무측천은 사랑을 보내지 않았다. 후에 설회의가 갈수록 난폭해지자 싫어진 무측천이 사람을 보내 암살해 버렸다.

 

 

 

 

설회의가 죽은 후 중년의 나이였던 심남로는 온화하기는 했지만 심신이 허약해 무측천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70여 세가 된 무측천은 외로움에 우울해졌다. 변덕이 심해졌고 쉽게 화를 냈다. 바로 그때 어떤 사람이 장역지 형제를 시침하도록 추천했다.

 

20세 전후의 미소년 둘은 영리해 음률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시침에 수완을 발휘했다. 기쁨에 겨운 무측천은 즉시 그 둘에게 사품 벼슬을 내렸다. 이때부터 장 씨 형제는 마치 왕후(王侯)처럼 매일 무측천을 따라 조회에 나갔고 정무를 마치면 후궁으로 모셨다. 두 형제는 총애를 받으면 받을수록 교만해져 후궁에서 멋대로 전횡할 뿐만 아니라 결당해 사사로이 조정을 운영하니 군중의 분노를 샀다. 마침내 신룡 원년, 장간지 등이 ‘오왕정변(五王政變)’을 일으켜 장 씨 두 형제를 참수한다. 무측천도 병상에서 황위를 중종(中宗)에게 양위하게 된다.

 

무측천은 역사적 조건, 특정한 혼인, 개인의 재능에 의탁해 휘황찬란한 여황제의 역사를 썼다. 그러나 욕설과 저주가 파도와 같이 무측천에게 쏟아졌다. 그야말로 “만년에 동궁에서 음란하였고(洎乎晩節,穢亂春宮)”라는 말처럼 그녀가 남총을 사사로이 사랑한 것이 공격당하는 죄업이었다.

 

 

 

 

냉정하게 무측천의 남총을 사랑한 문제를 분석해 보자. 두 각도에서 고찰할 수 있다. 하나는 그녀도 ‘사람’이라 ‘여인’이라는 각도에서 보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정치가요 여황이라는 각도에서 보자.

 

여자의 몸으로 자신을 만족시킬 남자가 필요했다. 그녀를 만족시키는 남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무측천은 14세에 입궁했다. 당 태종(太宗)의 눈에 들어 ‘미(媚)’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얼굴이 곱고 자태가 아름다웠다. 막 피려는 꽃봉오리였다. 사랑에 눈이 뜨기 시작하는 나이였다. 황제의 총애를 받고 싶었지만 태종의 곁에서 10여 년을 보냈으나 ‘재인(才人)’의 위치밖엔 안 됐다. 시녀와 다를 바 없었다. 태종은 개세영웅이었다. 여성은 단지 현덕하고 온순하며 이해심이 있고 부드러워야 된다고 여겼다. 그러니 무측천의 미모와 재능은 황제의 인정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나중에 태종이 죽자 그녀는 감업사(感業寺)로 보내져 비구니가 됐다.

 

봉건사회에서 여인으로 태어난 무측천은 자신의 포부를 펼치기 위해서는 혼인을 통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기를 믿고 따라줄 남편이 필요했다. 유약한 남자가 필요했다. 마침 기회가 왔다. 태종의 아들 이치(李治)! 그녀의 선택이었다. 고종(高宗) 이치는 여색을 밝히면서도 다정다감했다. 신체는 약해 병이 많았고 우유부단했다. 그녀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무측천이 5년 동안 차가우면서도 고독한 사찰 생활을 보내고 나서 두 번째로 입궁했을 때 고종의 ‘소의(昭儀)’가 됐다. 때때로 정이 끊이지 않고 넘치며 슬퍼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고 때때로 버들잎 눈썹을 곤두세우고 화장한 얼굴에 위엄이 서리니 고종이 상대하기 어려웠다. 1여 년 동안 비구니에서 소의, 신비(宸妃)로 봉해졌다가 끝내 황후(皇后)가 됐다. 이때부터 고종도 다시는 다른 여인을 가까이 하기가 어렵게 됐다. 궁중의 많은 빈(嬪)과 비(妃), 궁비(宮婢)들 모두 시침하는 의무가 사라졌고 순수한 여성 관리가 됐다. 이후 30년 동안 무측천은 ‘음란’하다는 추문 하나 없이 고종이 죽을 때까지 정치 투쟁에 전력을 쏟았다.

 

천수(天授) 원년(690) 무측천은 정식으로 등극했다.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명실상부한 여황제가 됐다. 여인으로써의 욕구도 끓어올랐다. 그녀가 총애한 설회의는 키가 크고 건강하며 힘이 넘쳤다. 나중에 ‘길들이지’ 못하게 되자 암살해 버렸다. 그녀가 총애한 심남로는 중년 나이가 돼 체력이 쇠하자 버려졌다. 그녀가 총애한 장역지 형제는 얼굴이 연화 같고 시침하는 요령을 잘 알았다. 그녀는 정신적으로도 만족했다. 춘심이 일게 되니 그녀는 장 씨 형제의 헌신이 고마웠다. 높은 벼슬을 주고 국정을 위탁했다. 만년에 가장 가까이에 두고 신임했다.

 

여황이요 명석한 정치가인 무측천은 여황제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남총을 가까이에 뒀다. 장 씨 형제가 시봉할 때, 무측천은 이미 73세의 노인이 돼 있었다. 생활이 아무리 넉넉하다 해도 양생을 잘했다고 해도 어떤 춘약을 복용한다 해도 늙은 몸이 회춘할 수는 없을 게 아닌가. 그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남자가 황제가 되면 여러 무리의 빈과 비를 거느리듯 여자가 등극하면 시봉하는 남총을 둬야 한다고.

 

중국역사의 그림을 펼쳐보면 황제에 앉은 여인은 무측천이 유일무이하다. 그녀는 남성이 황제가 되는 전제시대의 여성 정치가였다. 확고한 위치를 차지해 불패의 자리를 잡고 싶었을 것이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지 않던가. 고군분투의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녀는 모든 영역에서 남성 황제와 같은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남성 황제를 모방했다. ‘성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고독을 안위해 주고 늙은 육체의 슬픔을 해소해 주는 젊은 이성을 거느리고 싶었던 천자의 자리에 앉은 무측천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남조(南朝) 시기 유송(劉宋) 효문제(孝武帝)의 딸 산음(山陰)공주는 황제가 된 동생에게 “폐하는 후궁에 아름다운 비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데 천첩은 남편이 하나밖에 없어요.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라고 억울함을 소호하였다고 한다. 황위에 앉은 그녀의 동생은 즉시 남첩(南妾) 수십 명을 내려 줬고. 소제(蕭齊) 시기의 왕(王) 태후는 정정당당하게 남총 30명을 거느렸다.

 

희한한 것은 중국 역대 제왕들 모두 삼천궁녀를 두고 황제의 성욕을 풀었는데도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측천의 손자 당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는 4만에 가까운 빈과 비를 거느렸으면서도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자신의 며느리 양옥환(楊玉環)을 귀비로 앉히기 까지 했다. 이러한 사랑을 후세 사람들이 흥미진진하게 얘기하면서 천고에 그치지 않은 비극적 애정의 드라마가 됐다. 그들은 바로 남성이 황제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황음무도는 ‘영웅호색’이란 말로 너그러이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무측천은?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공평하게 평가하는 것은 어떤가? 잘못이 있다면 남총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뭇사람들을 주살했다는 점이다. 나머지는?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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