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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93)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과거(科擧)는 중국 고대의 관리를 심사하고 선발하는 제도의 하나다. 천하의 학생들이 자신의 재능에 의거 응시할 수 있었다. 과거에 합격하면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고 후한 녹봉을 받을 수 있었다. 과거시험에 합격을 하지 못하면 재차 삼차 응시할 수 있었다. 이 제도는 평민들이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평가받는다.

 

중국 고대에 국가는 사람의 추천에 의해 대부분의 관리를 임용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편협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능력 있는 인재들이 조정에 아는 사람이 없어 관리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에 인재를 발굴하고 임용하기 위해 현재의 연합고사와 같은 형식의 과거 제도를 만들었다. 과거제도가 만들어지자 정부가 관리를 선발하는 주요 수단이 됐고 뜻이 있는 인재들이 출세하는 기회가 됐다. 1천여 년의 역사 속에서 과거제도는 끊임없이 개선돼 왔고 청(淸)나라 광서(光緖) 황제가 모든 향시(鄕試)를 중지시키면서 과거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다면 과거제도는 어떻게 창립된 것인가? 일설에 따르면 과거제도의 초기 형태는 수문제 집정(581) 이후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당시 수문제는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를 폐지하고 처음 과거를 치렀으며 수양제 즉위(604) 후 과거제를 확립했다고 한다. 진사과(進士科)를 설치하고 십과(十科)에 따라 사람을 뽑는다는 조서를 내렸다. 『구당서․양광전』에 예부시랑이 황제에 올리는 상소 중 “진사과는 수나라 대업(大業) 연간에 시작돼 양제가 처음 시사의 과를 설치했습니다만 당시는 시책일 따름이었습니다.”라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그러나 『수서』, 『자치통감』등에는 수나라 대업 연간에 진사과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래서 사학자들은 과거제도가 당(唐)대에 시작됐다고 본다. 예를 들어 당 무종(武宗) 때 재상 이덕유(李德裕)가 이당(李唐)이 통치를 하면서 “진사의 과를 세웠는데 정명이요 ; 사부(辭賦)로 선발하였는데 시류를 쫓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당대 사학가 범문란(范文瀾)이 연구한 결과 진사과는 수나라 대업 연간에 창립됐다고 했다. “607년, 수양제는 십과를 정해 사람을 선발했다. 그중 ‘문재수미(文才秀美)’ 1과가 있는데 바로 진사과다. 수양제 본인도 문학가라 사부(辭賦)로 시험을 치르는 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이것이 과거(주로 진사과) 제도의 시작이다.”라고 했다.

 

과거제도는 당나라에 와서도 계속 실행됐고 더 크게 발전했다. 당대의 과거는 상과(常科)와 제과(制科)로 나뉘었다.

 

상과는 수재(秀才), 명경(明經), 진사(進士), 명법(明法), 명서(明書), 명산(明算)의 6과다. ‘수재’는 최고 등급으로 방책(方策) 시험을 봤다. 응시자는 경사(經史)를 통달하고 경세치국의 방책에 정통해야 했다. 경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사화(詞華)에 심취해 있던 당대 유생들에게는 쉬운 게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은 수재과에 감히 응시하지 못했다.

 

‘명경’은 주로 유가경전 시험을 봤다. 당초(唐初) 명경은 경의 장소(章疏)에 근거해 시험을 봤는데 이는 많은 수험생들이 경전의 본문은 읽지 않고 그저 장소와 관련된 내용만 베껴 암송했다. 고종(高宗) 2년(680)에 첩경(帖經)하기 시작했다. ‘첩경’이란 경서 중 한 줄을 취해 그중 몇 글자를 지우고 수험생들에게 써 넣게 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가 경전의 암송이 명경과 선발의 선결 조건이 되면서 명경에 응시하는 사람들은 기계적으로 무턱대고 암기하게 되면서 의리(義理)를 추구하지 않는 상황이 더 심해지게 됐다.

 

‘진사과’는 당나라 초기에는 시무(時務) 책(策) 다섯 가지 시험을 봤다. 책문을 평가하는 표준은 사화였다. 진사과는 문학으로 인재를 뽑는 시험으로 이후 정치의 인재를 뽑는 중요한 시험이 됐다. ‘명법’은 ‘율(律), 영(令)’의 각 1부를 시험 치렀다. ‘명서’는 『설문』, 『자림』을 구술과 글자 써 넣기 방식으로 시험을 봤다. ‘명산’은 『구장산술』, 『주비산경』 등 10부 산경(算經)을 기본으로 했다.

 

상과에 응시자는 생도(生徒)와 향원(鄕員)이 주였다. 생도는 국자감에서 총괄하는 국자학, 태학, 사문학, 율학, 서학 및 산학을 배우는 학생이고 홍문관, 숭문관에서 학습하던 황친이나 그 자손이었다. 향원은 관학 이외의 시험생을 가리킨다. 자신들이 주(州), 현(縣)에서 등록해 향시에 합격한 후 상서성(尙書省)에서 상과(常科) 시험을 치루는 사람을 말한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무측천(武則天) 2년(702) 무과(武科)를 창립했다는 점이다. 병부(兵部)에서 주관하고 주로 무관을 뽑는 시험이었다. 장수가 될 재인을 뽑지는 않았다.

 

 

 

 

‘제과’는 황제가 임시로 확정한 과목을 치렀다. 예를 들어 무측천 때에는 초발군류(超拔群類), 절륜과(絶倫科), 현종(玄宗) 때는 문사겸우(文史兼優), 박학통예(博學通藝), 무족안변(武足安邊), 지모장수(智謀將帥), 군모월중(軍謀越衆) 등의 과를 시험 봤는데 기본적으로 중복되지는 않았다. 과목의 변화는 정치 경제의 형세의 발전에 따라 통치 계급들이 요구하는 인재들이 달랐음을 반영하고 있다. 제과에 참가하는 수험생들은 출신성분이 뚜렷하거나 관직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출신성분이 뚜렷하지 않고 관직이 없는 사람도 있었으며 계속해서 응시할 수도 있었다. 제과는 통치자들이 인심을 얻는 중요 수단이었다. 탁월한 재능이 있는 관리를 발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과거로 선발된 인재들의 수가 계속해서 증가하면서 과거 출신이 고급 관리를 맡는 비중이 나날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당나라의 과거제도는 중요해졌다. 당나라 초기에는 과거로 등용된 인재들은 많지 않았다. 40년간 290명에 불과했다. 관리 중에 과거 출신의 비중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고종 때부터 고급관리 특히 재상의 비율이 증가했다. 현종 22년(734) 이전 2/3을 점했고 이후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헌종(憲宗 806-820) 때부터는 과거 출신자들이 재상과 기타 고급 관리에 중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추세가 안정적으로 지속됐다. 이로써 중국 봉건사회의 후기 고급 관리에 과거 출신자들이 역임하는 것이 일반화 됐다.

 

과거제도는 원나라 전기에 중단된 것을 제외하고 송(宋), 원(元), 명(明), 청(淸)에 계속되었다. 각 왕조의 통치자들은 각자의 정치적 요구에 따라 과거제를 개혁하면서 나날이 복잡해지고 엄밀해 졌고 봉건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물론 과거제도가 좋은 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상의 억압과 계급 간 모순을 이용해 통치하면서 폐단을 낳기도 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차후에 간단히 정리하여 살펴볼 수 있도록 하겠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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