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수)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이권홍의 '중국, 중국인'(87)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467-499)인 탁발원굉(拓拔元宏)은 탁발홍(拓拔弘)의 장자다. 재위기간 중 문치를 행했고 한족의 재원들을 중용하여 정사에 대해 질의했으며 여러 사람의 건의나 의견에 대해 언제나 과감하게 받아들였다. 독서를 즐겼다. 학식과 식견이 풍부해 통치기간 중 국가는 점점 부강해 졌다. 나중에 여러 차례 제(齊)를 공격했는데 군중에서 병사했다. 재위기간은 29년이다.

 

제왕(帝王)의 사랑을 얘기할 때 사람들은 서한(西漢) 성제(成帝)와 조비연(趙飛연), 당 현종과 양귀비, 송 휘종(徽宗)과 이사사(李師師)에 대해 얘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북위 효문제 탁발원굉과 풍(馮) 씨의 사랑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나 효문제가 친정 후에 계속 풍태후가 추진하던 개혁을 진행하고 선비(鮮卑) 성씨를 한족의 성씨로 바꿨으며 복식을 한족화하고 낙양으로 천도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북방의 유목민족이었던 선비족들이 중원으로 들어오면서 자신들의 습속을 일신해 새로운 문명을 창출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효문제가 애정 생활에 있어 곡절을 겪은 것은 빛나는 업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일찍이 효문제는 임(林) 씨 성을 가진 여자와 정을 나눴다. 임 씨는 부친이 죄를 저질러 대신 궁으로 들어왔던 여인이었다. 풍태후의 처지와 비슷했다.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으며 부드럽고 상냥하여 좋은 인상을 풍겼다. 효문제의 사랑을 듬뿍 받아 황손 순(恂)을 낳자 태자가 됐다. 과거 중국의 제도에 따르면 부친이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임 씨는 사사받아야 마땅했다. 효문제는 관용을 베풀어 전대의 제도를 따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풍태후의 반대에 부딪쳐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을 두 눈을 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효문제는 또 풍(馮) 씨와 사랑에 빠졌다. 풍 씨는 곱고 아름다워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타인의 말투와 안색을 살펴 그의 심중을 헤아릴 줄 알아 효문제의 총애를 받았다. 꽃그늘 달빛 아래 다정다감하게 사랑을 속삭였다. 그런데 풍 씨가 만성병에 걸리자 풍태후는 효문제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해 풍 씨를 고향으로 돌려보내 비구니가 되게 했다. 두 부부가 생이별 하자니 슬펐지만 효문제는 풍태후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풍 씨를 보낸 후 효문제는 사람을 보내 탐방케 했다. 풍태후가 죽은 후 효문제는 3년 상을 치렀다. 나중에 풍 씨가 건강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환관 쌍삼념(雙三念)을 보내 위문하고 낙양으로 데리고 왔다. 이때부터 효문제는 풍 씨를 처음처럼 사랑했고 황후에 앉힌 후 후궁들과 만남도 자제했다.

 

효문제는 그가 사랑한 풍 씨가 경박하기 이를 데 없는 여자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다. 자가에서 요양할 때 풍 씨는 외로움 떨치기 위해 집안 시종과 관계를 맺었다. 그녀의 모친은 자기의 딸을 제대로 교육을 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여식을 위해 추문을 감췄다. 풍 씨는 갑작스레 자신을 데리러 온 환관을 보고 탐탁지 않게 여겼다. 자신의 애인과 해어지기 싫었다. 그러나 황궁의 호화스럽고 근사한 생활을 떠올리고는 결국 궁정 생활을 선택했다.

 

풍 씨가 황후가 된 후 몇 년 동안 효문제는 거의 전쟁터에서 살았다. 몇 차례 남정을 떠나 궁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풍 씨는 고독이 싫었다. 옛 버릇이 도졌다. 당시 궁에 고보살(高菩薩)이라는 환관이 있었다. 우람하고 힘이 넘쳤고 의표가 당당했다. 원래 속임수를 써서 궁으로 들어온 거세하지 않은 남자였다. 풍 씨는 우람하고 힘이 넘치는 그를 좋아하게 됐고 고보살도 풍 씨의 미모에 반해 통정하게 됐다.

 

고보살은 사람을 잘 구슬렸다. 그의 수하들도 기꺼이 그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정도였다. 풍 씨도 사당(私黨)을 만들어 서로 결탁해 한통속이 됐다. 그들의 추문을 전해들은 종실들이 있었지만 감히 들춰내지 못했다.

 

 

 

 

그러나 풍 씨의 추문은 결국 효문제에게 알려 지게 됐다. 상황은 이렇다. 팽성(彭城)공주가 송왕(宋王) 유창(劉昶)의 아들에게 시집을 간 후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죽었다. 팽성공주는 북위의 궁궐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됐으니 명문자재들의 관심의 대상이 됐다. 팽 씨의 이부동생 북평공(北平公) 풍숙(馮夙)이 공주의 미모를 탐해 팽성공주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누나 풍 씨를 찾아가 수차례 도움을 청했다. 풍 씨는 효문제에게 부탁해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공주가 죽은 남편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재가하고 싶지도 않았고 재가한다고 해도 풍숙과 같은 평범한 사람과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풍숙은 억지로 결혼식을 준비했다. 공주는 도성에는 자신을 도와줄 세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몰래 10여 명의 시종들을 데리고 비오는 밤에 전선으로 효문제를 만나러 떠났다.

 

공주는 풍 씨와 풍숙이 강제로 자신과 혼인을 하게 만든 과정을 얘기했을 뿐만 아니라 풍 씨와 고보살의 음란을 저지른 사실까지 토로했다. 효문제는 풍 씨의 음란을 듣고 놀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고 자신에게 무척 자상했던 풍 씨가 감히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공주에게 발설하지 말고 궁으로 돌아간 후 사실을 조사하자고 분부했다.

 

풍 씨는 공주가 한밤중에 효문제를 찾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그는 공주가 자신의 추행을 발설할까 두려워 위문을 핑계로 자신의 심복을 보내 효문제가 사실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일행 중의 환관 소흥수(蘇興壽)가 오히려 사실을 효문제에게 자세하게 보고해 버렸다. 효문제는 낙양으로 돌아간 후 고보살을 포함한 일당을 체포했다. 고보살은 효문제에게 죄를 모두 인정했다.

 

효문제는 심장이 칼로 에이는 듯 아팠다. 며칠 동안의 의문이 사실로 드러났다. 풍 씨의 따뜻한 마음씨를 떠올리고는 간장이 토막토막 끊어지는 슬픔에 잠겼다. 거기에다 전쟁의 피로가 쌓여 갑자기 쓰러져 버렸다. 그날 저녁 효문제는 고보살 등을 불러 세워놓고 풍 씨를 불렀다. 효문제는 풍 씨가 문을 들어설 때 몸을 수색하도록 했다. 만약 1촌 길이의 칼이 발견되면 즉각 참수하도록 명했고.

 

풍 씨는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숙이고 용서를 빌었다. 효문제는 풍 씨를 질책하며 “당신 모친이 요술을 부린다는데 확실하게 설명해야 할 것이요.”라고 했다. 처음 풍 씨는 공주가 효문제를 찾아갔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좌불안석이었다. 묘수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모친 상(常) 씨를 찾아 갔다. 상 씨는 역시 늙은 쥐였다. 그녀는 무당을 찾아가 효문제가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하도록 법술을 부려달라고 부탁했다. 상 씨는 무당에게 “만약 효문제를 빠른 시일 내에 죽게 만들어 풍태후처럼 친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가산을 모두 탕진한다 해도 신령님께 보답할 것이요.”라고 당부했다.

 

풍 씨는 이런 사실이 이미 누설됐음을 알지 못했다. 풍 씨는 효문제에게 좌우를 물리고 혼자 자백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효문제는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풍 씨의 자백을 듣고 효문제는 얼굴색이 검푸르게 변했다.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풍 씨의 자백을 듣고 난 후 효문제는 팽성, 북해(北海) 왕을 불러 “내 아내가 백인(白刃)으로 내 옆구리를 찔렀소. 악독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오.”라고 말했지만 효문제 자신은 풍 씨를 폐위 시키지 못했다. 풍태후가 구천에서 낙심할까 염려되기도 했다. 결국 풍 씨를 궁중에 유폐시키는 것으로 끝을 보기로 결정했다. 만약 그녀가 양심이 있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이런 충격을 경험한 후 효문제의 건강은 날로 나빠졌다. 결국 남벌 중 병사한다. 임종 전에 팽성왕에게 “황후의 실덕이 오래 됐소. 그녀를 없애지 않으면 이후에 그녀를 제어할 사람이 없게 될까 염려되오. 내가 죽거든 내 유언대로 그녀를 사사하도록 하오. 그런 후 황후의 예로 안장하고. 절대 풍 씨 집안의 명예를 떨어뜨리지는 마시오.”라고 부탁했다. 효문제는 자신의 결혼이 왜 그처럼 불행했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이 사랑했던 임 씨도 어쩔 수 없이 사사했고 자신이 아끼던 풍 씨도 자신에게 부정(不貞)했으니. 이런 애석함을 느끼며 효문제는 총총히 세상과 이별을 했다.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순정을 가진 황제. 그는 중원의 황제였으나 북방 유목민족 출신이었다. 황량한 초원을 달리던 북방민족의 후예여서 그런가, 천하를 다스렸으면서도 순수한 사랑을 마음속에 담고 있었음이니. 물론 여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순정파로 끝나기는 했지만.

 

“청춘의 사랑이여 꽃과 다투어 피려 하지 마소, 방촌(方寸)의 마음에 불타는 연정(戀情) 그대로 일촌(一寸)의 재가 되지 않던가.(春心莫共花爭發,一寸相思一寸灰.)”
[이상은(李商隱)「무제無題(삽삽颯颯)」]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관련기사

더보기
93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