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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82)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사마염(司馬炎 : 236-290)은 사마소(司馬昭)의 아들이요 사마의(司馬懿)의 손자다. 265년 아버지가 죽자 진왕(晉王)과 상국(相國)의 자리를 물려받고 부조(父祖)가 다진 세력에 힘입어 위(魏)나라 원제(元帝)의 선양을 받아 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하고 진(晉)나라를 세웠다. 역사에서 말하는 서진(西晉)이다. 280년 남아 있던 오(吳)나라의 항복을 받아 천하를 재통일했다. 점전법(占田法), 과전법(科田法)을 제정하고 세법으로서 호조식(戶調式)을 공포했다. 사회적으로는 세족(勢族)이 가난한 백성을 압박하는 귀족제의 모순이 강화됐고 북방 이민족의 침입도 시작됐다. 위나라가 종실(宗室)을 너무 억압해 왕실을 고립시키면서 실패를 자초했던 사실을 거울삼아 일족을 국내 요지의 왕으로 봉하고 병력을 맡겼는데, 이는 아들 혜제(惠帝) 때에 ‘팔왕(八王)의 난’이 일어나는 원인이 됐다.

 

태시(泰始) 9년 사마염은 조서를 내린다. 공경(公卿) 이하 대신들 집안에 결혼 연령이 된 소녀들은 먼저 입궁해 간택에 참가하지 않으면 결혼을 할 수 없도록 했다. 이듬해 간택 대상의 범위를 경성 내외의 부상(富商)과 궁중 관리들에게 까지 확대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미녀를 간택하는 기간에는 아무도 결혼할 수 없도록 금혼령을 내렸다. 미녀를 선택하는 그날, 사마염은 화장시킨 요염한 대갓집 규수들을 한 줄로 세운 뒤 탐욕의 눈초리로 소녀들의 몸을 두 눈 부릅뜨고 훑어가며 한 번에 몇 십 명을 골랐다. 그 속에 진군 장군 호비(胡備)의 딸 호방(胡芳)이 있었다. 풍만하고 우아했다. 아름다우면서도 영민하고 용맹스러운 자태를 품고 있었다. 사마염은 한 눈에 반해 이튿날 귀빈으로 책봉하고 복식도 황후에 뒤지지 않게 차려 입게 했다. 그때부터 함께 지내며 특별히 총애했다.

 

 

 

 

황후 양염(楊艶)은 호방만을 아끼는 무제(武帝)를 보며 질투심이 타올라 참으래야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끝내 병을 얻어 드러누웠다. 죽을 때가 돼 사마염에게 그녀의 사촌 양지(楊芷)를 자신을 대신해 모실 수 있도록 입궁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사마염은 본시 호색한이라 즉시 윤허하고 양지를 입궁시켰다. 용모가 옥과 같이 예쁜 묘령의 여인 양지는 무제의 음심을 단번에 불러 일으켰다. 곧바로 황후에 봉해졌고 양지의 부친 양준(楊俊)은 거기장군으로 승진했으며 양지의 삼촌 양요(楊珧), 양제(楊濟)모두 고관으로 봉해졌다. 양 씨 일문이 권세가 있는 왕친 국척이 되었다. 무제는 하루 종일 새로 온 젊은 황후와 술 마시고 즐겼다.

 

동오(東吳)를 멸망시킨 후 항복한 오나라 임금 손호(孫皓)를 귀명후(歸命侯)에 봉하고 오나라 대신들을 하나하나 임용했다.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큰 상을 내렸다. 그때 그는 너무 자만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주색에 빠진 방탕한 생활을 했다. 천하에 오나라 궁녀를 입궁시키라 조서를 내린다. 원래 손호의 궁에 있던 소녀들이었다. 모두 강남 수향 출신들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명모호치(明眸皓齒)요 설부화용(雪膚花容)이었다. 낮은 소리로 속삭이고 우아하고 매력적인 자태를 품고 있었다. 무제는 기뻐서 어찌할 줄 모를 지경이었다. 하루 종일 궁중에서 놂에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조정 대사는 이미 하늘 밖의 일이 됐고. 그때 궁궐에는 만 명 이상의 여인들이 있었다. 하루에 한 명이라도 몇 십 년이 걸릴지 모를 수였다.

 

 

 

 

이에 아첨꾼들이 무제를 위해 기상천외한 방법을 고안해 낸다. 양들이 모는 화려한 수레를 타고 궁중을 돌아다니게 하는 것이었다. 양들이 멈추면 무제가 수레에서 내려 그곳의 궁녀들과 질펀하게 자신의 음욕을 풀었다. 양들이 무제에게 함께할 궁녀를 간택하는 셈이었다. 궁녀들은 자신이 간택되기 위해 머리를 짜내 양들이 자신들 앞에 멈출 방법을 찾아냈다. 양들이 짠맛이 나는 어린 대나무 잎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농촌 출신 아리따운 궁녀가 보드랍고 가는 대나무 가지에 소금을 뿌리고 자신의 문 앞에 꽂아 놓았다. 과연 수레를 끌던 양이 멈춰 섰다. 그 궁녀가 황제의 총애를 받은 것은 당연한 것이고.

 

다른 궁녀들이 아무리 아름답게 꾸민다 해도, 어떤 교태나 요염함도 양들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양들을 멈추게 하는 비밀을 찾던 궁녀들이 오묘한 이치를 마침내 알게 됐다. 이에 그 모양 그대로 본뜬 것은 당연하고. 그때부터 문 앞마다 대나무 가지들이 하늘거리고 짠맛이 바람에 날렸다. 그러자 양들이 문 앞마다 서는 게 아닌가. 양이 끄는 수레가 멈추면 무제는 급히 내려 기다리던 궁녀와 함께 하고. 다음에 또 수레에 올라 양들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고. 그리고 또 품에 안기고. 하루하루 구름에 오른 것처럼 멈출 줄 모르고. 가는 곳마다 자신을 기다리는 묘령의 여인들이 있고.

 

황제가 황음무도하니 군신들도 흉내 냈다. 각종 부패와 사치가 난무했다. 괴이한 일들이 속출했다. 무제의 외숙인 후장군 왕개(王愷)와 산기상시 석숭(石崇)은 누가 더 부자인가를 다투게 됐다. 이 집이 설탕으로 솥을 씻으면 저 집은 초로 장작을 대신하고 이 집이 붉은 도료로 집을 칠하면 저 집은 산초로 벽을 칠했으며 이집이 놀이를 나갈 때 40리의 장막을 치면 저 집은 50리의 비단 장막을 쳤다. 끝내 두 사람이 다툼에 눈이 벌겋게 달아올라 왕개는 무가지보인 산호를 가지고 와 부자임을 내세웠다. 그러자 석숭은 거들떠 볼 가치도 없다는 듯 쇠 불상으로 산호를 내리쳐 산산조각을 내 버렸다. 그리고 내실에 보관하고 있던 산호수를 가지고 나왔는데 그중에 왕개가 보물이라 자랑하던 산호보다도 큰 것들이 6, 7개나 있었다. 당연히 왕개는 놀라서 입을 딱 벌리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당시 석숭이나 왕개처럼 그렇게 돈을 물 쓰듯 한 대신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무제 사마염은 진나라를 개국한 군주였다. 그런 군주가 그렇게 시작했으니 자손들은 무엇을 배웠을까? 비웃음만 샀을 뿐. 사마염은 그렇게 주색에 빠져 살다 55세에 자신이 만든 지하궁전으로 들어갔다. 지하에서도 그렇게 살고 있을까?

 

앞서 말했듯이 무제는 전국을 통일한 후 사마 씨의 천하를 보전해 내려가기 위해 전국 각지를 자신의 자식이나 형제, 조카들에게 분봉해 주었다. 군권을 장악한 각지 번왕들의 야심은 날이 갈수록 커져 마침내 큰 변란에 휩싸인다.

 

무제 다음으로 어린 혜제(惠帝)가 즉위하자 외조부 양준(楊駿)이 정치를 보좌했다. 가황후(賈皇后)가 권력을 빼앗기 위하여 원강(元康) 원년(291)에 형주의 초왕(楚王) 위(瑋)를 서울로 불러들여 양준을 죽이면서 ‘8왕의 난’이 시작됐다. 가황후가 양준을 죽인 다음에 여남왕(汝南王) 양(亮)과 위관(衛瓘)이 정치를 보좌하게 되자 가황후는 다시 초왕을 불러들여 양과 위관을 죽이도록 하고 전권을 행사한다는 죄명으로 초왕도 죽였다. 가황후가 권력을 장악하고 난 다음 태자를 폐하고 양 태후를 죽이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가황후의 전횡은 왕족의 불만을 불러오면서 통치권을 빼앗으려 했다. 영강(永康) 원년(300)에 조왕(趙王) 윤(倫)이 기병해 가황후와 그 일당을 죽이고 혜제를 태상황으로 삼은 다음 자신이 황제가 됐다. 이에 대해 여러 왕이 불복하면서 제왕 경(冏), 성도왕 영(穎), 하간왕 우(顒), 장사왕 예(乂)가 군대를 일으켰다. 조왕은 패하여 살해되고 다시 성도왕과 장사왕이 제왕을 죽이고 성도왕과 하간왕이 합하여 장사왕을 죽였으며 마지막으로 동해왕 월(越)이 성도왕과 하간왕을 평정해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혜제를 독살하고 혜제의 동생을 황제로 세워 회제(懷帝)가 즉위했다. 이로써 16년(291-306) 동안 계속된 8왕의 난이 끝이 났다.

 

이와 같은 황실의 골육상잔은 중원에 재앙을 가져왔다. 사회 경제는 파괴되고 국가 기본을 흔들어 놓았다. 8왕의 난은 주로 낙양 일대에서 일어났다. 한 번에 동원된 사람이 30만 명, 사상자가 10만 명에 달했다. 낙양 주변에 있는 13세 이상의 남자는 거의 군대나 부역에 동원됐고 쌀값이 1석에 1만 전이나 했다. 이러한 혼란이 16년이나 계속 됐으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으랴.

 

과연 무제는 지하에서 이를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이 심은 죄업임은 알까? 팔왕의 난 이후 북쪽의 이민족들이 중원으로 들어와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는데 이에 대해 지하에 누워있는 무제는 무어라 할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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