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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7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마속(馬謖 : 190-228), 자는 유상(幼常), 삼국시대 양양(襄陽) 의성(宜城, 현 호북성 의성) 사람이다. 촉한(蜀漢)의 장군으로 제갈량의 신임을 받았다. 건흥(建興) 6년(228)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략할 때 선봉에 섰다가 명령을 어겨 가정(街亭)에서 대패했다. 감옥에 갇혔다가 병사했다. 일설에는 제갈량에 의해 참수됐다고 하기도 한다.

 

가정(街亭)을 잃은 패배는 신기묘산(神機妙算)을 갖춘 제갈량 일생 중 가장 실망스런 전투였다. 당시 촉나라는 위나라를 치기 위해 북벌을 감행하고 있었다. 파죽지세로 전국을 통일할 모양을 갖추었다. 제갈량은 마속에게 선봉을 맡으라고 하면서 2만 5천의 정예병으로 가정(현 감숙성 장랑(莊浪)의 동남쪽)을 수비토록 했다. 요충지인 가정을 반드시 지켜 적군이 통과하지 못하도록 재삼재사 당부했다. 그런데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길을 막는 방어진지를 구축하지 않고 산 위에 진을 쳤다. 위나라 군대는 산세를 이용해 산을 포위하고 물길을 막은 후 파죽지세로 쳐들어갔다. 막을 길이 없자 마속은 패잔병을 이끌고 철수하면서 가정을 빼앗겼다. 마속의 실패는 북벌 중 가장 중요한 전투의 패배였다. 가정 전투의 패배로 제갈량은 어쩔 수 없이 관중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가정 지역을 잃으면서 우세한 형세를 상실했기 때문에 제갈량은 눈물을 삼키며 마속을 참형에 처했다고 전한다.

 

마속은 한 번의 전투에서 실패함으로써 사람들에게 ‘해는 될지언정 득이 되지 않는 사람’이란 인상을 깊이 심어주게 됐다. 자신이 병법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남보다 뛰어나다고 여기면서 전투에 임해 독단적으로 움직임으로써 제갈량의 명령을 준수하지 않았다. 부장 왕평(王平)의 간언도 듣지 않았다. 성을 지키지 않고 “사지에 몰아넣어야만 비로소 승리할 수 있다”는 병법만 믿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는 적을 가벼이 대하고 스스로 자신이 넘쳐 독단적 방법을 행하다가 나라를 망치게 했으니 주살의 죄는 면하기 힘든 것은 당연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마속이 선봉대로 출전 명령을 받으면서 실패를 하면 전 가족을 멸하는 벌을 받는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제갈량은 군법에 의거 패장을 처결한 것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당연한 이치이고 명분이 있고 사리에 맞다.

 

그러나 마속이 전략 등을 고려해 전투 방법을 결정한 것이 옳은 것 하나 없이 모두 틀린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제갈량의 병법에 얽매여 융통성을 잃지 않고 실제 상황에 맞춰 군사를 이끈 것이다. 높은 곳에 진을 치고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싸운다[居高臨下]는 군사 구도를 채용했을 뿐이다. 가정의 지형과 병법의 원칙으로 보면 정확한 것이다.

 

만약 제갈량의 전술을 그냥 따랐다면 가정을 지킬 희망이 더 적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마속의 죄는 척결하는 것은 마땅하나 그것은 전투의 실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중요한 시기에 상관의 지휘를 따르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위급한 시기에 진영을 버리고 후퇴한 것은 당시의 군령에 따라 죽을죄에 해당하는 것이고. 상급자의 명령 위반과 임전 퇴각은 장수로써는 죽어 마땅한 일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최고 지휘관인 제갈량 본인도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잘못된 장수를 선발했다. 잘못된 임무를 준 것은 더 큰 책임이다. 당시 유비(劉備)는 마속이 뜻은 크지만 자질이 부족하다고 보고 임종 전에 제갈량에게 훈계하면서 “마속은 사실보다 말이 앞서기 때문에 크게 쓸 수 없으니 그대는 잘 살피시게!”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제갈량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선봉이라는 중임을 맡겼으니 가정에서의 대패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갈량 자신도 「가정자폄소」에서 잘못된 임무를 부여하였다고 자책한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당시에 제갈량이 후속 부대를 파견해 제때에 참전하여 산 위에서 쇠뇌를 일제히 발사하고 화살을 퍼부었으면 가정 전투는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제갈량은 마속의 군대를 멀리 보내 고립된 상태로 놔두고 자신은 기산(祈山)에 주둔해 있으면서 전진하지 않음으로써 마속의 패전을 가속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지』의 작자 진수(陳壽)는 제갈량을 치국에 있어 일류의 천재로 관중(管仲)과 소하(蕭何)에 뒤지지 않지만 군사 지휘에 있어서는 상급이라 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이 평가가 편견만은 아니다. 분명한 근거가 이처럼 존재한다.

 

어떤 방법으로 임전할 것이냐 하는, 전투 방식의 정확성에 의해 전쟁 결과가 결정된다. 전투에서 패배한 마속도 분명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가정 지역을 잃은 원인은 여러 가지다. 단순히 마속의 지휘 실패로 귀결시켜서는 안 된다. 결국 모든 일은 최고 책임자에게 귀결되는 것이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상례일지니.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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