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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한다] 96살 제3대 도의원 현희형옹 ... 5.16 쿠테타로 도둑 맞은 의원직
"원희룡 지사, 큰 정치인 길 가라 ... 총선 당선인 3명, 제대로 일 해봐라"

제주현대사를 돌이켜 봅니다. 관점과 시각이 달라 갈등도 있었지만 그러나 중단 없는 전진을 통해 더 큰 제주의 미래를 꿈꿨던 우리의 선배 또한 있었습니다. 평가가 다르고 바라보는 목표지점이 다를진 모르지만 우리 후대가 더 번영된 미래를 맞이하길 바라는 마음은 사실 같습니다. 지금을 앞서 70년 제주사의 격변기마다 치열하게 제주현대사를 채웠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들의 삶의 궤적을 통해 다시 미래를 통찰하기 위한 지혜를 엿보려 합니다. 애독바랍니다./ 편집자 주

백수를 바라보는 노인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기억은 또렷했고 역사의 격변기마다 그에게로 다가왔던 불편한 역사적 진실은 지금도 기억을 채운다.

 

반세기가 넘도록 제주정치사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그다. 드라마같은 역사의 단편들이 조각조각 그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하나의 줄기로 엮인다.

 

 

제3대 도의원을 역임한 현희형(玄希炯·96)옹.

 

 

누구나 제주의 선거판에 발을 담글라 치면 결국 그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유권자들은 모르지만 제주 선거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 때문이다.

 

4년 전 그는 회고록을 냈다. 책 제목은 ‘맥구릉 올챙이’. 그가 나고 자란 노형마을의 ‘맥구릉’을 떠올리며 개구리로 진화하지 못한 미약한 존재로 스스로를 ‘올챙이’에 빗댔다.

 

그는 일제시대인 1920년에 태어나 고작 10개월도 안 돼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서 2남1녀의 막내로 자랐다. 말테우리(목동)와 우유배달로 끼니를 해결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던 그는 제주북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관서상공학교 상과를 마쳤다.

 

일제가 패망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제주는 어느새 4·3광풍의 시련에 휘말렸다. 뒤이어 한국전쟁이란 참변까지 휘몰아쳤다. 제주까지 밀린 국군의 계엄사령부가 ‘글 줄 아는’ 이를 찾았고, 그는 계엄사령부의 행정요원으로 징발됐다.

 

그 인연으로 제주도청 공무원 생활을 하던 그는 어느덧 수산직 공무원 세계에 깊이 발을 들여놓았고, 그의 나이 39살이 돼 공무원 생활을 털고 제주도어업조합연합회 임원으로서 살 방책을 바꿨다.

 

 

 

 

매사에 성실했다. 건강도 타고 났다. 하루 두갑씩 피우던 담배는 딱 10년 전인 86살에 끊었고, 지금도 소주 한병은 거뜬히 비운다. 게다가 친화력도 으뜸이었다. 청년시절 언변도 좋았다. 그 바람에 그의 나이 불혹이던 시절 주변의 말만 믿고 1960년 12월 제3대 도의원 선거에 나가 덜컥 당선됐다. 그 시절 만연했던 금품·탈법 선거에 맞서 ‘양심 바른 일꾼 뽑아 지방발전 이룩하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하지만 그게 시련이 첫 계기였다. 이듬해인 1961년 5·16군사투테타가 터졌고, 지방의회는 해산됐다. 고작 6개월여만의 의원 신분이었다.

 

“나야 고작 도의원 신분이었지만 그 시절 야당 의원으로 당선된 고담용(1915~1989) 국회의원 같은 분은 하루 아침에 나라를 도둑 맞은 꼴이었을 거야.”

 

야인으로 돌아간 그는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았다. 곧바로 인쇄사를 창업, 능히 그답게 1966년 제주도인쇄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았고 그만의 조정능력으로 관급 인쇄 일을 맡을 때마다 벌어지던 잡음을 조합 회원들이 순번으로 배정받도록 체계를 구축했다.

 

인쇄일로 보인 발군의 수완으로 1970년엔 조선일보 제주지사장을 맡기도 했다.

 

물론 그 세월을 보내며 ‘의원직을 도둑 맞은 이’라는 주변의 시선이 지속됐고, 그 역시 박정희 정권이 일구는 공화당 행태는 못마땅했다. 70년대에 이르러 그의 정치활동 규제가 풀리는 듯 했지만 공화당은 집요하게 그에게 입당이란 이름으로 합류를 제의했다.

 

하지만 그는 박정희 정권 시절 3선 개헌과 유신헌법 개헌에 노골적으로 반대의사를 밝혔다. 국민투표 계도요원을 맡으라는 제안에 완강히 거부하다 그 시절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던 인물이다.

 

정우식 지사(14대 제주도지사, 1966년1월~68년12월 재임) 시절엔 제주도청 간부 공무원들이 ‘3선 개헌’ 국민투표 선거운동을 벌이기까지 했다는 것. 그 간부들의 협력 요청을 거부하자 도청에 근무하던 딸이 정보기관에 불려가 ‘사직’을 강요당했다는 대목에서 현옹은 지금도 ‘아비의 눈물’이 있다.

 

여기서 정 지사의 경질 사연 한 토막. “지사가 요정 여급과 서부두를 드라이브하다 음주운전으로 차가 바다에 빠진 적이 있었지. 그 일로 곧바로 지사직에서 잘렸어. 가는 길 이삿짐 트럭이 몇 대나 됐는데 제주에 좋은 돌은 다 갖고 간 것 같아.”

 

 

현옹이 운영하던 인쇄소가 마침 도지사 관사 앞에 자리하고 있었고,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요정 여급의 손을 이끌며 새로 한복을 맞추고자 관사를 나서던 정 지사를 똑똑히 눈으로 봤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그의 기억이다. “60~70년대 선거? 한 마디로 엉터리지. 투표함을 열어보니 몇 묶음씩 여당 기표 투표용지가 나오고, 개표하는 과정에선 교육 받은 공무원들이 여당 집계 뭉치에 야당 표를 빼돌려 섞는 방법으로 야당 표를 줄이고 ··· 한 마디로 부정선거가 판을 쳤지. 정권을 도둑질한 거야.”

 

그는 1967년 4월 총선에서 제주도제1지구 선거관리위원을 맡은 적이 있다. 그 시절의 기억이다. 개표 현장에서 따박따박 그 문제점을 찾아냈지만 그래봐야 그가 지킨 개표현장 뿐이었다는 것.

 

그의 청·장년기 한국정치사를 주름 잡았던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은 바로 그런 부정선거의 냄새가 진동하는 요체였고, 그는 그런 정권과의 협력을 철저히 거부했다.

 

그리고 1979년 10·26사태로 공화당 정권이 몰락하자 그는 전두환 정권이 이끈 민주정의당(새누리당의 전신) 창당에 발을 담갔다. 제주에서 창당멤버로 참가한 몃 안되는 이가 그였다. 새로운 사회를 기대했고, 이제 제대로 된 나라가 될 것이란 기대였다.

 

그랬기에 그는 80·90년대 민정당과 인연을 이어갔던 변정일·현경대 의원을 돕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변 전 의원의 부친과 막역한 관계란 이유도, 연주 현씨 가문의 ‘인물’이란 이유도 그 둘을 도울 수 밖에 없었던 그만의 이유다.

 

그 시절 그의 나이는 60을 넘어서고 있었고, 청년기 풀지 못한 ‘정치에 대한 회한’이 자리잡고 있었던 까닭도 있다는 것.

 

하지만 그 모든게 이젠 과거다. 10년 전 아내를 여의고 지금도 제주시 노형마을 한 집에서 지나온 날을 회상하는 그다. 그러나 그는 정치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 “어차피 세상살이가 정치 아니냐”며 그는 조심스레 이번 4·13 총선 얘기로 말을 옮겨갔다.

 

“민심이 무서워. 새누리당이 이렇게 무너질 줄 난 몰랐어. 휴전선 철조망이 걷히기 전까지 진보세력이 득세하긴 어렵다고 난 생각해. 그런데 친박이니 비박이니 하며 공천 장난을 벌인 새누리당의 자만과 오만을 보면 우리 국민들이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증거야.”

 

그가 놓지 않고 있는 관심이기에 내친 김에 원희룡 지사에 대한 평가도 부탁했다.

 

 

 

 

그에게서 돌아오는 답. “큰 정치인을 기대했는데 아직은 보통이라고 할 수 밖에. 애쓰는 것 같은데 압도적 표로 몰아준 도민의 열망을 채우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우리보다 훨씬 작은 섬인 거제도가 김영삼 대통령을, 하의도가 김대중 대통령을 배출했는데 우리 제주도라고 대통령 배출 못하란 법은 없지. 그러려면 ‘큰 제주, 말 그대로 대(大) 제주’란 큰 그림을 그려야 하고 시작이라도 했으면 좋겠구만.”

 

 

그러면서 그는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100만 제주시대를 위해 과감히 제주도청을 옮기는 것은 물론 늘어난 인구에 걸맞게 ‘탐라시’를 새로 짓자”는 구상까지 내놓으며 목에 힘을 줬다.

 

더불어 이번 4·13 총선 당선인에게 따끔한 일침도 잊지 않았다.

 

현옹은 “야당이 제주에서 그동안 4연속 3석을 차지한 비결은 잘해서가 아니야. 솔직히 한 일이 무언지 잘 모르겠어. 그쯤 되면 입법만 하는게 아니고, 제주의 미래를 내다보는 일을 해야 돼. 없으면 찾아서라도 해야지. 우리 제주는 그냥 만들어진게 아니야.”

 

지팡이를 짚고 힘 없이 뒤돌아서는 노구의 현옹. 하지만 그는 지금도 ‘빛나는 전진’을 거듭하는 제주의 미래를 꿈꾸고 있다. [제이누리=양성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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