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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68)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동한(東漢) 건안(建安) 13년(208), 손권(孫權)과 유비(劉備)의 연합군이 제갈량(諸葛亮)의 화공지계에 의거해 적벽에서 조조(曹操)의 수십만 군대를 대패시켰다.

 

이 적벽대전은 적벽, 오림(烏林), 강릉(江陵) 등지에서 벌어진 유명한 전쟁이다. 손권과 유비가 연합해 북방의 강자 조조를 물리침으로써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에게 거둔 전쟁의 실례를 만들었으며 나중에 위․촉․오(魏․蜀․吳) 3국이 정립하는 국면을 마련했다. 후대의 문인들은 적벽을 제재로 창작하면서 애호하는 절창이 됐다. 그런데 적벽대전 전장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알지 못하는 듯하다.

 

 

 

 

다시 말해 적벽대전은 중국 군사사상 가장 특색 있고 유명한 전쟁 중 하나다. 당시 조조는 북방 군대 15만을 이끌고 있었고 형주(荊州)에서 투항한 칠팔만 군대를 더해 80만 대군이라 공언하며 절대적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조의 군대는 북방의 병사들이 대부분이라 수공(水攻)에는 취약했다. 물에 익숙한 형주의 병사들의 사기가 불안정한 것도 약점 중의 하나였다.

 

208년, 손권의 신하 노숙(魯肅)이 유비와 연합할 것을 주창하자 유비는 손권의 계책을 이용해 악현(鄂縣)의 번구(樊口)에 진주했다. 조조는 강릉에서 군사를 이끌고 강을 따라 동쪽으로 진군하려 했다. 제갈량은 시상(柴桑)으로 가 손권을 만나고 힘을 합쳐 조조와 맞서자고 공모했다. 손권은 노숙과 주유(周瑜)의 결연한 지지 아래 3만 정병을 주유에게 내주고 번구로 가 조조의 군과 싸울 준비를 하라고 했다.

 

주유가 진군하다 적벽에서 조조와 맞닥뜨렸다. 당시 조조의 군대는 역병이 돌고 있어 잠시 강북 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주유는 남쪽 기슭에 있으면서 부장 황개(黃蓋)에게 “조조가 전선을 쇠사슬로 묶어 처음과 끝이 서로 연결돼 있다. 불로 태울 수 있다”고 했다. 이에 10척의 몽동(艨艟) 전투함에 마른 갈대와 억새풀, 건목을 싣고 기름을 부어 장막을 덮고 그 위에 기를 세웠다. 선미에는 쾌속선을 매뒀다.

 

먼저 조조에서 서신을 보내 투항하는 척 했다. 당시 남동풍이 세차게 불자 황개는 10척의 몽동을 최전선에 배치하고 강 중간에 이르자 돛을 세우고 남은 선박들은 순서대로 전진케 했다. 조조의 군대와 2리 정도 거리에 이르자 동시에 불을 내뿜었다. 화살처럼 빠르게 배를 몰아 전진하며 불을 붙이자 세찬 바람을 타고 조조의 군선을 태웠다. 불길은 기슭의 군영까지 이르렀다. 주유 등이 정예부대를 이끌고 후방을 치고 들어가자 조조의 군대는 대패했다.

 

조조는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화용도(華容道)를 통해 달아났다. 도로가 질퍽거려 사상자가 많았다. 유비와 주유는 수륙 병진해 남군(南郡)까지 추격했다. 그때 조조의 군대는 역병과 기아에 시달렸다. 거반이 죽고서야 북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주유의 처 소교(小喬)는 용모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다재다능해 군기가 무엇인지 병법이 무엇인지도 잘 아는 재능 있고 어진 아내였다고 한다. 적벽대전 전야, 조조의 전선이 적벽에 몰려들었다. 주유는 삼강구(三江口)에 주둔하고 있었다. 쌍방이 대치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제갈량과 화공을 하기로 계책을 세웠으나 며칠을 기다려도 동풍이 불지 않자 주유는 다급한 마음에 병을 얻어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소교는 부군의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채고는 급히 편지를 전선으로 보내 부군을 안위하려 했다. 계책을 줘 부군의 걱정을 덜어주려 한 것이다. 주유가 편지를 받아보니 시 한 편이 적혀 있었다. “승리가 눈앞인데 임은 어찌 어리둥절하십니까? 첩이 제갈량을 재보니 동남풍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주유는 크게 기뻐하며 즉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노숙에게 제갈량을 데리고 오라했다. 이렇게 하여 “칠성단에서 제갈량 바람을 일으키다”와 “갑가일에 전함을 불태우다”는 유명한 전투가 있게 됐다고도 전한다.

 

 

 

 

 

아무튼 적벽대전은 명성이 자자한 대전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적벽대전이 발발한 정확한 지점을 확실히 알지 못한다.

 

북송(北宋)의 소동파(蘇東坡)는 황주(黃州, 현 황강[黃岡]현)에서 쓴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염노교․적벽회고』에서는 황강의 성 밖에 있는 적비기(赤鼻磯)라 했지만 적벽의 옛 전쟁터인지는 정확한 설명이 없다. 그러나 적비기의 위치는 번구 상류에 있지도 않고 장강의 남쪽에도 있지 않아 역사서의 기록과 다르기 때문에 올바른 적벽대전의 장소가 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잘못 전달 된 거짓이 대문호라 칭송받는 소동파조차 오리무중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적벽대전의 원래 전쟁터는 어디인가? 지금도 분명치 않다. 고등학교 어문교재 제1책 「적벽대전」과 제4책 「염노교․적벽회고」주석에는 “적벽, 지명이다. 일반적으로 현재 호북성 가어(嘉魚)현 동북이고 장강 남쪽 기슭이라 알고 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중학어문교재』에는 “적벽, 교재에는 ‘현재 호북성 가어현 동북’이라 돼 있지만 사실 이런 전통적인 설이 꼭 정확하다 볼 수 없다. 그 위치는 포기(浦圻)현 서북의 적벽공사 소재지라 해야 한다”고 돼 있다. 정규 수업에 사용하는 교재에 서로 모순되게 기록하고 있다.

 

 

 

학술계에서도 2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현 호북성 포기현 서북 적벽산(赤壁山)으로 북쪽으로 홍호(洪湖)현 용구(龍口) 오림기(烏林磯)와 마주보고 있는 위치라고 한다. 당나라 이길보(李吉甫)는 『원화군현지』에서 “적벽산은 포기현 서쪽 80리에 있고 석두관(石頭關)이라 불린다. 북쪽으로 장강에 임하고 있고 그 북쪽 기슭이 오림으로 적벽과 마주하고 있다. 주유가 황개에게 조조의 선박을 불사르는 계책을 세워 줘 패주시킨 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적벽대전이 벌어진 적벽이 이길보가 얘기한 적벽이 옳다고 보고 있다. 호북성 포기현 서북쪽 36킬로미터, 장강 남쪽 기슭의 적벽산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오림과 서로 마주하고 있다. 적벽산은 석두산이라 부른다. 전벽대전 때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이 여기에서 화공으로 공격하여 조조의 전선을 대파하였는데 당시 불빛이 하늘로 솟구쳐 강기슭 암벽을 빨갛게 물들인 것에서 ‘적벽’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전한다.

 

또한 포기 적벽 아래 땅에서 철제 병기들이 출토됐다. 칼, 검, 극(戟), 화살촉 등 출토된 수량만 해도 수천이나 된다. 적벽산, 남병산(南屛山), 금란산(今鸞山) 일대에서 땅을 1미터만 파도 철제 병기와 같은 문물이 출토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적벽이라 부르는 다른 곳에서는 고대 병기가 출토되는 곳이 적다.

 

그렇지만 호북성 황강현 서북쪽 강빈(江濱)에 일명 적비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산의 형세가 벽의 형상이고 적색이다. 송나라 때 소동파가 그곳에서 『전후 적벽부』와 『적벽회고』를 지었는데 적벽대전이 벌어진 곳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

 

또 호북성 황강현의 서북쪽 자락 적로(赤魯)산 아래 대강 가에도 적벽이 있다. 포기의 적벽과 더불어 ‘동파적벽(東坡赤壁)’이라 불리기도 하고 황주적벽이라 불리기도 한다. 소식은 황주에 폄적 당했을 때 정치적 실의에 빠져 스스로 ‘동파거사’라 불렀다. 그는 황주에서 4년 3개월을 살면서 적비기를 여러 차례 유람하며 천고의 절창 「적벽회고」와 『적벽부』를 지었다. 이로부터 황강의 적벽이 ‘정종’의 적벽으로 자리 매김 했고 적벽대전이 벌어졌던 진짜 적벽은 사람들에게 잊혀 져 버렸다.

 

 

 

 

「적벽회고」를 소개한다.

 

큰 강물 동쪽으로 흘러가는데 물결과 함께 천고의 멋진 인물들도 가버렸네.
낡은 보루의 서편이 삼국 시대 주유가 활약했던 적벽이어라.
어지러이 바위들 구름 뚫고 솟아 있고 놀란 파도는 강 언덕을 무너뜨릴 기세로
천 무더기의 눈 같은 물너울 말아 올리네.
강산은 그림 같아라. 한 때 얼마나 많은 호걸들이 활약했던가?
멀리 주유가 활약했던 옛날을 생각해보니 미인 소교가 갓 시집을 왔었고
영웅다운 모습은 영기를 발했었지.
새깃 부채 들고 윤건 쓰고 얘기하고 웃고 하면서
강한 적은 재가 돼 날고 연기돼 사라지게 했었지.
옛 고장에 마음 쓰며 놀고 있자니 다정한 이들은 응당히 나를 두고 비웃으며
벌써 흰 머리가 났다 하겠지.
인간 세상은 꿈같은 것 한 잔 술을 강물에 비친 달 위에 붓노라.

(「念奴嬌 ― 赤壁懷古」
大江东去,浪淘尽,千古风流人物.故垒西边,人道是,三国周郎赤壁.
乱石崩雲[穿空],驚涛拍岸,捲起千堆雪.
江山如画,一时多少豪傑.
遥想公瑾當年,小乔初嫁了,雄姿英發.
羽扇纶巾,谈笑间,强虜[樯橹]灰飞烟灭.
故国神游,多情应笑我,早生华髮.
人生如梦,一樽[尊]还酹江月.)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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