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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시평] 대통령의 공식사과와 추념일 지정, 그 후

 

대학 캠퍼스는 꽃으로 물들었다. 온통 진홍·노랑 빛깔이 형형색색 앞다퉈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해 봄 한껏 꽃망울을 터뜨리던 진달래와 벚꽃의 향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죄다 생명의 기운을 한껏 틔우는데 책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교정 벤치에 앉아 한없는 낭만에 사로잡혔다. 청춘이었다.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1986년 새내기 대학생이 돼 들어선 캠퍼스의 풍경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혈기왕성한 스물의 나이에 ‘제주촌놈’이 만난 서울의 대학 캠퍼스 풍경은 한껏 마음을 부풀게 만들었다. 사실 20년 세월을 제주촌놈으로 살았던 지라 서울 땅을 밟아본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한강이 그리 긴지, 강폭이 그리 넓은 지 버스를 타고 한참을 걸려 한강대교를 건너서야 알았다. TV에서나 보던 기차 역시 그 시절 처음 눈으로 구경(?)했다. ‘촌놈’이었다.

 

하지만 따뜻한 봄바람에 일렁이던 가슴은 우리네 그 시절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입학하고 나서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동창들 얼굴도 모르던 시점에 우린 일주일여간의 ‘학생중앙군사학교’ 입교와 훈련에 돌입했다. 고교시절 교련교육의 연장선이었다. 군 입대를 유예받은 대학생 신분이기에 그 정도는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제주에선 도통 맡아보지 못한 최루탄 냄새를 거의 매일 교문 앞에서 맡으며 등교하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그 시절 정권의 문제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연일 데모나 한다고 세상이 바뀔 것인가란 의문도 있었다. 그래도 세상에 분통을 터뜨리며 집회·시위에 나선 친구나 선배들을 볼 때 무안과 미안이 없었던 건 아니다.

 

4월이 돼 고교시절 듣도 보도 못한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는 신동엽 시인의 시가 캠퍼스 가로등 스피커를 통해 낭송될 때 흠칫 4·19혁명의 의미를 되새겼다. 이것저것 알게 되다 보니 “대학생의 치열한 저항의식과 지식인적 소명이 있었기에 겨우 오늘에 이르렀다”는 자각도 하게 됐다. 더욱이 대학에 입학하고 한 달 여가 지나며 ‘겉 멋’이 생기다보니 ‘지적 오만’도 슬슬 작동했다. 이 책 저 책을 뒤지며 술자리 ‘설전(舌戰)’에서 우위를 차지할 ‘지적 실탄(?)’도 두루 확보했다. 물론 떠드는 모양새는 이미 택하고 들어간 대학전공의 '기초입문자'가 아닌 ‘전문가’처럼 굴었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으며 현실에 번민하는 관념적 사색에도 줄기찼다. 경거망동이었다. 다만 4·19의 의미를 되새기다 그 시절 집권여당에서 권력을 행사하던 한 국회의원이 4·19를 주도한 한 대학의 학생회장 출신이었던 걸 알고 ‘판단정지’ 상태가 왔던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다시 고향 제주로 시선이 돌아갔다. 요즘과 달라 경상도·전라도·충청도 등 팔도에서 기어 들어온, 말투마저 모조리 다른 ‘촌놈’들이 수두룩한 지라 그래도 각을 잡을라치면 그네들이 모르는 ‘제주’를 들먹이는 게 상대하기 쉬웠다. 그런데 기껏 꺼내드는 화두라곤 감귤과 멋진 자연풍광 뿐이니 도무지 위신이 서지 않았다. 고향의 역사와 암울했던 현대사 주제를 꺼내야 화제가 되고 논의가 될 터인데 사실 아는 게 없었다.

 

4·3은 그 쯤 가서 내게 다가온 주제였다. 어린 시절 귀동냥 삼아 들었던, 하지만 함부로 입에 담았다간 무언가 곤욕을 치를 것 같은 위험스런 주제였다. 그게 대학생이 돼 ‘폼’(?)을 잡으려니 떠올랐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도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제주출신인 스스로나 서울 또는 다른 지방 출신인 대학동기나 도무지 깜깜이인 건 서로 마찬가지였다. 차이가 있다면 제주에 부모, 형제, 친지 등 연고인사를 두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어찌됐건 닥치는 대로, 그 시절 대학가에 불었던 한국현대사 재해석의 바람에 기대어 읽고 또 읽었다. 이른 바 좌경화된, 아니면 진보적 색채로 덧칠된 시각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이자 ‘무장폭동’에만 온 신경을 집중한 우경화된 보수적 색채의 덧칠 자료까지 살펴봤다. 사실 보수적 색채의 해석자료는 어린 시절 아버님의 서가에 꽂힌 여러 서책들로 이미 꽤 익혀왔던 지라 그와는 다른 시각의 논리와 자료가 다시 4·3에 대한 시각적 균형을 잡아줬다.

 

1948년 제주4·3사건의 참상과 비극의 실상은 여기서 거론치 말자. 2003년 10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제주로 직접 찾아와 오랜 세월동안의 진상규명조사 결과를 근거로 제주도민에게 한 다음의 발언이면 이미 국가적 진상규명의 결론은 정리된 것이다.

 

 

“55년 전 평화로운 이곳 제주도에서 한국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중의 하나인 4·3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국제적인 냉전과 민족 분단이 몰고 온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손실을 입었습니다. ···(중략)··· 저는 이제야말로 해방 직후 정부수립 과정에서 발생했던 이 불행한 사건의 역사적 매듭을 짓고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저는 (4·3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2003년 10월31일 노무현 대통령)

 

대학 새내기 생활을 보내고 졸업이 다가올 무렵까지의 1980년대 후반은 우리에게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만들었다. 전 5권이 발간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기폭제로 작동했고,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을 가감 없이 드러내줬다. <태백산맥>은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 종군기자였던 이태의 육필 수기 <남부군>과 더불어 영화로도 만들어져 그 시절 우리 역사에 눈을 돌리는 이들에게 깊은 성찰의 기회를 주기도 했다.

 

대학 새내기 시절로만 놓고 봐도 30년이 흘렀고, 대통령의 공식사과 시점으로만 놓고봐도 13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우리네 대학시절 학생운동의 전선에서 맹활약했던 이들은 지금 국회의원 또는 자치단체장이란 직함을 단 이가 수두룩하다. 하나 더 나아가 4·3은 지난해 처음으로 정부가 정한 공식 추념일이 됐다.

 

대학시절 우린 고향의 4·3이 거론되면 어김없이 ‘잠들지 않는 남도’란 노래를 불렀다.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같은 대학에서 만났던 가수 안치환이 작사작곡한 노래는 1988년 세상에 알려진 뒤 89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2’란 LP음반에 수록됐고, 가수 본인이 1994년 솔로로 데뷔하며 자신의 앨범에 이 노래를 담았다. ‘4·3의 아픔’을 가장 잘 담아낸 노래로 손꼽힌다. 예전 그와 어떤 일을 같이 하던 인연도 이즈음 떠오른다. 그의 노래에 <마른 잎 다시 살아나>란 곡명을 붙일 수 있었던 행운을 얻었던 기억이다.

 

4·3이 국가지정 추념일이 되기 전인 2013년 4월 65주기 4·3희생자 위령제 식전무대에서 일본 도쿄의 소레이유합창단 50명 단원들이 나와 부른 노래가 또 이 노래다. 제주의 아픔을 일본인 친구들이 찾아와 부른 것이다. 하지만 이 노래는 공식 추념일 지정과 더불어 위령제를 행정차치부가 주최하게 되면서 행사장 현장에서 들을 수 없다. 지난해는 물론 올해도 제주도가 행사계획안에 끼워 넣었지만 행자부 결재를 통과하며 여지없이 삭제되고 말았다. 이유를 알 수 없다.

 

어김 없이 4월로 다가오며 제주엔 봄꽃 물결이다. 여기저기 개나리와 진달래, 유채꽃·벚꽃이 만발하고 있다. 그러나 그 통한의 세월을 모질디 모질게 견뎌 낸 유족들의 아픈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그럴진대 이제 4월 총선이 목전이다. 어느 당은 4·3으로 인해 유리를, 어느 당은 4·3으로 인해 깎이는 표를 걱정한다. 솔직히 도리가 아니다. 한 목소리로 제주의 아픔을 대변해도 모자랄 텐데 지금도 정치판에 이용할 궁리를 하는 이가 보여 다시금 인간의 도리를 생각한다.

 

가야할 길이 아직도 먼 것 같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그렇듯 전진한다. [제이누리=양성철 발행·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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