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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6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진한(秦漢) 때 황금은 당시에 유통되던 중요한 화폐였다. 하사품으로 선물로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초한쟁패(楚漢爭覇) 시기 진평(陳平)은 황금 4만 근(斤)을 가지고 반간계(反間計)를 성공시키기 위해 초나라로 간 적이 있다. 유방(劉邦)이 천하를 평정한 후 숙손통(叔孫通)은 조정의 예의를 정했다는 공으로 황금 500근을 하사받았다. 여후(呂后)가 죽은 후 여러 후왕(侯王)에게 각각 1000근을 하사했다. 양(梁) 효왕(孝王)이 죽은 후 창고를 확인해 보니 황금 40만 근이 보관돼 있었다. 흉노와의 전쟁에서 공을 인정받은 위청(衛靑)은 황금 20만 근을 하사받았다. 왕망(王莽)의 말년에 황금 만 근을 1궤(匱)로 삼아 60궤가 보관돼 있었고 거처에도 십여 궤가 있었다고 한다. 진한의 황금의 수량을 보면 놀랄 정도다.

 

그런데 동한(東漢) 연간에 황금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유통 영역에서도 사라져 버렸다. 상품 교환 중 물물교환에도 사용되지 않았고 하사품이나 선물로도 사용된 것이 소량에 그쳤다. 그렇다면 서한(西漢) 시기에 그렇게 많던 황금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후세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추측하고 나름대로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불교가 황금을 소진시켰다고 하거나 대외무역에 의해 소진됐다고 하거나 동(銅)을 황금이라 불렀다거나 지하에 묻혔다는 설이 그것이다.

 

먼저 불교가 황금을 소진했다는 주장을 보자. 불교가 중국에 유입된 후 도처에 사찰을 축조하고 불상을 만들면서 황금을 다 써버렸다고 한다. 대도시는 물론 중소 도시, 심지어 지방 곳곳에서 불사를 일으켰고 황금을 사용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사치 풍조가 만연하면서 황금으로 사경(寫經)하거나 편액을 만들면서 하나하나는 소량이나 그런 것들이 나날이 많아지면서 서한 시기에 대량으로 유통되던 황금을 소진했다고 한다.

 

반대자들은 불교가 황금 소진했다는 설은 역사적 사실에도 위배되고 맞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역사서에는 불교가 중국에 유입된 것은 동한 초기로 당시의 불교는 아직 입지를 굳히지 못했다고 확실히 기록돼 있다. 당시에는 중국 전통의 도교와 신선 사상에 빌붙어 있었을 뿐 대대적으로 사찰을 짓거나 불상을 만들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황금이 사용됐더라도 소량에 그칠 뿐, 대량의 황금이 갑자기 소진된 것과는 관련이 없다고 본다. 서한 시기에 대량으로 사용되던 황금이 유통 영역에서 퇴출된 것은 동한의 개국 시기에 이미 생겨난 것으로 당시에는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불교와 황금 소진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외국무역에 의해 소진된 것일까? 서한 시기에 대량으로 유통되던 황금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외국과 무역을 하면서 국외로 반출 됐다고 보는 것인데, 이런 관점도 근거가 너무 희박하다.

 

서한 시기의 중국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경제와 문화가 발달한 국가였다. 수출국이라 해야 옳다. 무역을 한다고 해도 소량의 황금이 서역이나 남해 여러 나라의 희귀한 물건들을 사들일 때 쓴 것뿐인데 그리 많지도 않았고 그런 경우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국들은 공물(貢物)을 바치며 외교를 펼치고 있었다. 한 왕조와 교역을 하는 국가의 경제가 상대적으로 낙후돼 있어 교역에 황금이 사용된 것은 소량일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또한 서한 시기에 실크로드가 개통되고 중국의 비단이 대량으로 서방 국가에 수출하고 있는 상태라 황금으로 교역한다면 중국으로 황금이 유입되는 것이 이치에 맞는 것이다. 당시 로마제국은 중국의 비단을 얻기 위해 많은 황금을 소비했다지 않는가. 어떤 학자들은 로마제국이 비단을 사들이기 위해 막대한 황금을 소진했기 때문에 경제가 쇠퇴해졌다고 보기도 한다.

 

동(銅)을 황금이라 불렀다는 설을 보자. 역사서에 서한 시기 하사품으로 사용한 황금과 보관했다는 황금은 모두 ‘황동(黃銅)’을 가리키는 것으로 황동이기 때문에 수량이 그렇게 많았던 것이라는 주장이다. 역사적으로 보거나 진한(秦漢) 황금 채굴의 수량으로 보거나 대외무역 정도로 볼 때 서한이 그렇게 많은 황금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당시 사람들은 ‘金’으로 재물을 가리키는 게 습관이었기 때문에 당시 유통된 동을 ‘황금’이라 불렀다고 보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증거가 부족하다.

 

한나라 때 금과 동은 확실히 구분돼 있었다. 금의 채굴은 금관(金官)이 관리했고 동의 채굴은 동관(銅官)이 관리했다. 황금과 동전 모두 당시 유통되던 화폐였다. 황금은 상등의 화폐였으며 동전은 하등의 화폐였다. 그리고 황금의 계산 단위는 근(斤)이고 동전의 계산 단위는 수(銖)였다. 황금은 주로 하사품이나 선물로 사용됐고 동은 주전이나 기물을 주조하는데 사용됐다. 황동과 황금이 이토록 확실히 구분돼 사용했는데 뒤섞일 수가 없다고 본다.

 

 

 

 

지하에 묻혔다는 설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서한의 황금이 금화(金貨)의 형태로 지하에 저장돼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한의 황금이 각종 기물로 제작돼 묘의 부장품으로 사용됐다고 보는 것이다.

 

전자의 관점은 과학자들이 지구 황금 채굴의 예측에 근거한다. 과학자들은 유사 이래로 인류가 지구상에서 채굴한 황금은 9만 톤 이상이라고 본다. 현재 세계에 유통되고 있는 황금은 6만 톤에 불과하고 나머지 3만 톤은 지하에 묻혀있다고 한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끊임없이 지하에 보관된 서한 황금을 발굴하고 있다.

 

서한 시기에 대량으로 유통되던 황금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공사를 불문하고 지하에 저장하고 있다가 전란이나 재앙에 의해 저장한 사람이 죽거나 사라지면서 저장 장소가 실전됐다고 본다. 지하에 저장됐다는 이러한 주장은 일견 과학적이라 보일 수 있다. 고고학 발굴에 의해 실증이 되고 있어 황금 소진의 수수께끼가 풀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검증해 보면 이 또한 허술하기 짝이 없다. 개인이나 국가가 황금을 대량으로 저장했다면 황금의 저장소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단서를 남길 수밖에 없다. 전쟁이나 재난에 의해 저장한 사람이 사라졌다고 해도 모든 저장자들이 한꺼번에 사라질 수는 없다. 땅 속에 저장해 보관한 사람 한 둘이 죽거나 사라지면서 그 지점이 잊힐 수는 있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황금이 땅 속에 저장돼 알 길이 없게 됐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황금이 부장품으로 주인과 함께 무덤 속에 있는 것일까? 사실 한나라 때에는 후장(厚葬) 풍습이 성행했다. 이러한 풍조에 따라 대량의 황금이 무덤에 수장됐다는 것이다. 서한 시기 조정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었다. 천하에서 얻은 재물의 1/3은 종묘에 바치고 1/3은 한나라 왕실에 충성을 다한 문신과 무장, 외국에서 온 귀빈들에게 하사품이나 선물로 부조하고, 나머지 1/3은 지하의 환생의 세계인 능묘를 건설하는데 사용했다. 당시 황금은 최고의 화폐였고 부귀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1/3이 부장됐을 가능성은 많다. 이러한 추리는 현재 과학자들의 예측과도 합치된다.

 

그러나 한나라 때에 후장한 분묘는 매장한 날부터 도굴꾼들의 목표가 됐다. 한나라 때에는 옥의(玉衣)를 부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한나라 묘들은 도굴꾼들이 가장 먼저 선택하는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대량의 황금은 어땠을까? 1/3에 해당하는 거대한 재물을 도굴꾼들이 놓칠 리야 없지 않은가. 그리고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지하에 매장된 것은 황금만이 아니다. 은과 동, 각종 진귀한 보물들이 망라돼 있다. 그렇다면 황금만 희한하게 사라질 수 없는 게 아닌가?

 

역사서의 기록을 보면 서한 때는 대량의 황금이 사용됐다가 동한에 이르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은 맞다. 기록에 과장이 있거나 오류가 있다면 모르되 대량의 황금은 갑자기 사라졌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앞에 서술한 여러 가지 관점은 각각 허점을 가지고 있다.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사라진 황금들! 언젠가는 세상에 나올까 아니면…….<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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