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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57)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비단길(실크로드[Silk Road], 사주지로[絲綢之路])은 고대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교류의 길을 말한다. 기원전 2세기부터 1000여 년간 중국의 비단이 대량으로 이 길을 통해 서쪽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비단길이라 붙여졌다. 천년의 세월동안 중국과 서방 간의 문화 경제 교류는 이 길을 통해 완성됐다. 바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여러 나라와 중국의 문화, 정치, 경제가 교류하고 발전시킨 중심 길이다.

 

비단길을 생각하면 처음과 끝이 어딘지 모르는 상단이 퉁구리로 묶은 비단을 낙타에 싣고 은은하게 울리는 낙타 방울소리와 조화롭게 끝도 모를 사막을 건너는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중국의 고대문명은 어쩌면 실크로드에 의해 대대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선진(先秦)이래로 비단길의 패턴이 크게 변했지만 타클라마칸 남북의 천산남로 두 길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사막으로 막혀 있기 때문이다. 변화가 많지 않다고는 했지만 사실 확실한 경로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대 지도로 안내도를 만들어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지만 아직까지 많은 의문이 남는다.

 

역사상 중국인들은 그 길을 ‘실크로드’라 부른 적이 없다. 그것은 그저 보통의 장삿길로 서안(西安)에서 가곡관(嘉谷關)을 경유, 서행해 위구르에 이르는 길을 ‘황가역도(皇家驛道)’라 불렀을 뿐이다. 위구르 경내의 길을 ‘천산남로(天山南路)’라 불렀다. 그 길이 일찍부터 북쪽의 길과 남쪽의 길이 있었지만 모두 천산의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로 비단뿐만 아니라 옥, 차, 심지어 황금 등도 운송했다. 비단옷을 입기를 즐겼던 유럽인들에게는 중국에서 온 비단이 대종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비단길이 서한(西漢) 장건(張騫)이 서역으로 출사하면서 열렸다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형성돼 있었다고 주장한다.

 

1958년 절강(浙江) 오흥(吳興) 전산양(錢山漾) 신석기시대 유적지 상층부에 집누에 실크로 만든 견직물, 끈, 실이 발굴됐다. 상(商)나라 때에 양잠 기술은 더욱 발전해 주요 수공업이 됐다. 춘추전국시대에 장족의 발전을 이뤄 비단은 외부로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중앙아시아 서북쪽에서 흑해 서북쪽으로 이동한 사카(Sakas) 부족은 그들의 유목 방식을 통해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 동안 중국과 그리스 도시국가 사이에서 비단을 교역했던 가장 오래된 무역상들이었다. 그들이 개척한 천산 북록(北麓)은 중앙아시아와 남러시아를 통하는 길로 최초의 비단길이다. 이 노선은 한나라 이후에 이루어진 비단길보다 약간 북쪽에 위치할 뿐이다.

 

알타이 지역에서 출토된 기원전 5세기 귀족의 묘에서 화문이 있는 직물과 평문 자수의 실크가 발굴됐는데 모두 중국 내지에서 전래된 것이다. 이 비단길의 서쪽 끝이 그리스인데 조각과 회화 중 인물상, 신상이 입고 있는 원단은 당시에는 중국에서나 제조할 수 있던 것이라 한다. 그래서 장건 이전에도 비단길은 존재했다는 증거라 주장한다.

 

 

기원전 53년, 옛 로마 삼두정치의 일인이었던 크라수스(Crassus)는 군대를 이끌고 파르티아(Parthia)와 전쟁을 벌였는데 카르하이 전투에서 참패하고 크라수스도 전사한다. 로마가 패전한 것은 장거리를 진군한 피로 이외에도 전투를 시작할 때 파르티아가 화려함에 눈길을 끄는 오색찬란한 군기를 보고 로마 군대가 전투 의지를 상실한 까닭이라고 전한다. 그 군기가 바로 로마인들이 여태껏 보지 못했던 중국의 실크로 만들어진 것이라 했다. 이렇게 본다면 중국의 실크가 일찍부터 파르티아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많다.

 

카르하이 패전 후 10년이 채 되지 않은 시기에 로마인들은 전쟁을 통해 실크 직물을 처음으로 획득하게 된다. 이때부터 로마인들은 비단을 입는 것이 유행했고 로마 원로원에서 남자들은 실크를 입지 못하게 명령을 반포할 정도였다. 부녀자들도 실크를 입는데 제한을 둬 그들의 ‘보물’을 보존하게 했다고 전한다.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 있는 것,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금지할 수 없다. 비단은 마침내 로마와 유럽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비단을 구하는 것과 동시에 비단을 생산하는 나라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로마에서 비단을 얻은 그리스 작가가 있었다. 작가는 작품 중에 서양인들이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멀고 먼 곳에 있는 민족이 비단을 생산한다고 하고 그 민족을 ‘Seris(塞里斯)’ 즉 ‘실크’라 불렀다.

 

‘실크로드’라는 이름은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호펜(Richthofen)이 1887년 출판한 『중국―내 여행지 연구』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또 다른 학자 헤르만(Hermann)은 ‘실크로드’의 호칭을 받아들이고 1910년에 출판한 『중국과 시리아 사이의 고대 실크로드』라는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그때부터 실크로드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전문서적들과 논문이 발표됐다. 그중 스웨덴 탐험가 스벤 헤딘(Sven Hedin)(1938)과 프랑스 동양학자 루체 불느와(Luce Boulnois)(1963)가 출판한 동명 저작 『실크로드』는 인구에 회자되는 중요한 책이다.

 

 

중국의 장삿길이 로마까지 뻗어 나갔다. 서안에서부터 셈을 하면 4200마일이나 된다. 길을 따라 우회하는 것까지 합치면 총 길이가 6000마일에 이른다. 적도 길이의 1/4에 해당한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가로 지르는 가장 긴 옛 길인 셈이다.

 

아직까지 이런 길이 언제부터 생겼는지에 대해 확실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인류는 늘 이동했고 교류했기 때문에 특정한 길의 ‘길이’나 ‘의의’에 대해 전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교역로를 한정해 생각할 때 실크로드는 고대사에 있어서 경이로운 교통로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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