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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56)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장건(張騫 : ? - 기원전 114)은 서한(西漢) 성고(成固, 현 섬서[陝西] 성고[城固]) 사람으로 박망후(博望侯)에 봉해졌다. 건원(建元) 2년(기원전 139) 한(漢) 무제(武帝)의 명을 받아 대월지(大月氏), 대하(大夏) 등지에 출사(出使)했다. 13년 출사 중 11년 동안 흉노에 의해 구류됐다. 원수(元狩) 4년(기원전 119)에 또 명을 받아 오손(烏孫) 등지에 출사했다. 두 번의 출사는 중원과 서역의 문화, 경제 교류와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장건은 탐험가이며 ‘비단길’을 개척한 선구자라 할 것이다. 일생 동안 두 번 서역에 출사해 한 왕조와 중앙아시아의 여러 민족들 사이에 교류하고 우호 관계를 맺게 했으며 중서(中西) 문화 교류를 촉진시켰다.

 

 

 

 

서역(西域)이라 함은 서한(西漢) 시기 감숙(甘肅) 돈황(敦煌)의 서쪽, 천산(天山)의 남북, 발하슈(Balkhash) 동쪽, 남으로는 중앙아시아 일대를 말한다. 물산이 풍부하고 풍속이 각기 달랐으며 크고 작은 18개 나라들이 있었다. 한 왕조하고는 왕래가 많지 않았다. 서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흉노가 지배하고 있던 ‘하서주랑(河西走廊)’을 건너야 했다.

 

‘하서주랑’은 동쪽은 오초령(烏鞘嶺)에서 시작해 서쪽은 옥문관(玉門關)에 이르며 남북은 기련산(祁連山)과 아미금산(阿爾金山), 마종산(馬鬃山), 합려산(合黎山) 및 용수산(龍首山) 사이의 길이 약 900km, 폭 수km에서 100km에 이르는 서북에서 동남 방향으로 늘어선 좁고 긴 평지다. 모양이 복도와 같고 황하의 서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지역은 감숙(甘肅)의 난주(蘭州)와 하서사군(河西四郡 : 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酒泉], 돈황[敦煌])을 포괄한다. 한족과 몽골족, 위구르족, 티베트족 등의 민족이 거주한다. 내륙의 위구르(신강[新疆])로 이어지는 중요한 통로이며 고대 실크로드의 일부분으로서 고대 중국과 서방 세계의 정치·경제·문화적 교류를 진행시킨 중요한 국제 통로였다.

 

 


이 ‘하서주랑’은 천리에 풍사가 흩날리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모래 바다다. 쉽게 들어설 수 없는 외경의 지역이었다. 그렇다면 장건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서역으로 출사했는가?

 

첫째는 서역의 여러 나라와 연합해 흉노에 대항하기 위해서이다.

 

한 무제 때 북방에 터를 잡고 있던 흉노는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며 사방팔방으로 진출했다. 서역의 여러 나라들에 약탈을 일삼고 공물을 바치게 하면서 현지인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끊임없이 남쪽으로 출병해 서한 변방을 침탈함으로써 한 왕조의 커다란 위협이 됐다. 한 무제는 흉노에 의해 억압받는 서역의 여러 국가와 연합해 공동으로 흉노에 대항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서역으로 출사할 사신을 모집했다.

 

낭관(郞官)의 직위에 있던 장건은 왕조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응모했다. 누구 하나 쉽게 응할 수 없는 중임이었다. 기원전 138년 장건은 수행원 1000여 명을 인솔하고 서쪽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이 감숙 임조(臨洮)에 이르렀을 때 흉노에 의해 구류됐다. 10여 년을 허송한다. 그는 흉노 지역에서 아내를 맞이해 자식을 낳기도 했으나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았다. 나중에 흉노가 그들을 국경 서쪽으로 옮겨 수감하려 할 때 장건은 부하들을 이끌고 기회를 틈타 대월지(大月氏, 기원전 3세기경 중앙아시아의 아무[Amu] 강 유역에 터키 계 또는 이란 계 민족이 세운 나라)로 도망쳤다.

 

10여 일의 고된 여정을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어 대원(大宛, 중앙아시아의 동부 페르가나[Fergana] 지방)에 도착했다. 대원은 한 왕조가 부강하다는 것을 알고 한 왕조와 우호 관계를 맺어 교류하기를 바라고 있던 터라 장건 일행을 극진히 대접했다. 그리고 가이드와 통역을 붙여 강거(康居)로 보냈다. 나중에 대월지에 도착했다.

 

당시 대월지는 대하의 옛 지역을 점거하고 있어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흉노와 전쟁으로 원수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 왕조와는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연맹을 맺기는 실로 곤란한 터였다. 장건은 연맹이 성사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대월지에서 대하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1여 년간 머물렀으나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 도중에 장건은 또 흉노에 의해 1여 년을 구류 당했다. 기원전 126년에 흉노 선우(單于)가 죽고 내란이 일어나자 그 틈을 이용해 도망쳐 장안으로 돌아갔다.

 

장건이 첫 번째 출사한 13년 동안 여러 국가와 지역을 돌아다니며 각 지역의 특색과 풍속, 지형과 생산품, 정치 군사 상황을 알게 됐다. 그는 한 무제에게 대완에 한혈마(汗血馬)가 있고 파르티아(安息國, [Parthia] 북부 이란 지방에 있었던 옛 나라)의 은화에는 국왕의 두상이 주조돼 있고 동물 가죽위에 가로로 글자를 쓰며 시리아(條支國, 현재의 시리아에 존재하는 나라라고 언급되는데 일설에는 카라케네[Characene] 왕국을 가리킨다고 한다)에 항아리 크기만 한 큰 새알이 있다는 등등 여행 도중에 보고 들은 바를 보고했다. 모두 중원지역 사람들이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이야기들이었다. 기이함에 놀라지 않는 이가 없고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는 중국 역사상 중원지역 사람이 서역을 알게 된 최초의 사건이다. 한 무제는 장건의 공적을 표창하기 위해 태중대부(太中大夫)에 봉했다.

 

두 번째, 평화와 우의를 구하기 위해서 출사했다.

 

기원전 119년 장건은 서역으로 두 번째 출사한다. 점령하거나 약탈할 마음 없이 방대한 원정군을 대동하지 않고 300여 명의 사절단을 인솔해 명주, 비단, 견직물, 금전, 화물 등을 가지고 장도에 나섰다. 서역을 돌아다니면서 그는 한 무제의 평화 의향을 관철시키고 충심과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해 서역 각국의 환영과 접대를 받았다. 서역의 여러 나라들도 한 왕조와 교역을 원했다. 이때부터 서역의 여러 나라들은 계속해서 사자를 파견하고 진귀한 선물을 가지고 장안으로 갔다.

 

서역의 포도, 석류, 수박, 대파, 양파, 당근, 누에콩, 오이, 참깨 등이 한나라에 전해졌다. 대원의 말들이 그때 대대적으로 중원으로 전래됐다. 한나라의 비단, 칠기, 옥기, 동기, 자기, 철기, 제강기술, 제지술, 그리고 복숭아, 배, 은행, 생강, 차, 사탕, 장뇌 등이 계속 서역으로 전래됐다. 이로써 중앙아시아와 남유럽, 북아프리카 등지와 경제적 교역을 하면서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때 서한과 서역 각국은 사절과 상인들이 끊임없이 왕래하였다.

 

아득히 먼 로마의 귀족 부녀자들은 중국의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고 전해 온다. 유럽 사람들은 중국을 ‘비단의 나라(綢國)’라고 불렀고 중국의 비단을 보물로 여겼다고 한다. 한나라에서 중앙시아에 이르는 상로는 ‘비단의 길’이라 불렸다. 한나라는 비단길에 역참을 세우고 둔전을 마련해 병사를 주둔시켰으며 양식을 마련해 사자들에게 공급했다.

 

나중에 서역의 오손(烏孫, 한나라 때 지금의 키르기스 지방에 있던 국가)과 마침내 우호 관계를 맺는다. 한나라와 연맹을 맺었고 한나라 종실의 세군(細君)과 해우(解優)공주를 시집보내기도 했다. 한 선제(宣帝) 때 한나라 군대와 합공해 흉노의 세력을 약화시켜 마침내 서역과 교류하려는 당초 목표를 이루게 됐다. 이는 장건이 세상을 떠난 지 56년 이후의 일이다.

 

장건의 서역 출사는 역사상 위대한 장거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본래 인류는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동종인 현생인류는 끊임없이 옮겨 다녔고 교류했다. 한 시기 한 인물이 교역의 길을 열었고 문화를 서로 교류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너무 과한 이야기다.

 

장건의 탐험이 교류를 활발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류 문화 교류에 있어 진일보시킨 공로는 인정하나 장건 때에 와서야 비로소 동서 교류의 길이 열렸다는 것은 지나치다는 말이다. 그 이전에 ‘초원의 길’처럼 동서가 교류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지 않던가. 다시 말하지만 현생 인류는 끊임없이 이천하였고 교류해 왔다. 그래서 인류는 하나인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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