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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52)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사마천(司馬遷 : 기원전 145 혹 135년 - ?), 자는 자장(子張), 섬서(陝西) 한성(韓城) 사람이다. 기원전 108년 부친의 직업인 태사령(太史令)을 승계했다. 나중에 이릉(李陵)이 흉노(匈奴)에 투항한 사건을 변호하다 궁형(宮刑)을 받았다. 발분저서(發憤著書)해 거작 『사기(史記)』를 세상에 내놓았는데 후세에 “사가의 절창이요 무운의 이소(離騷)”라는 칭송을 받는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30여 년간 태사령을 지내면서 줄곧 국사를 편찬했다. 아버지의 지칠 줄 모르고 부지런히 탐구하는 정신은 사마천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사학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원봉(元封) 3년 사마천은 아버지의 태사령 직을 물려받고 오래지 않아 전심으로 『사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시기는 사마천이 역사를 기록하는 황금시기였다. 그런데 갑자기 재앙이 들이닥쳤다. 사마천의 운명을 180도 뒤바뀌게 만든 전환점이었다.

 

기원전 99년 사마천이 온힘을 다해 저술할 때 한 무제(武帝)에 의해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이듬해 남자로써 가장 치욕적인 부형(腐刑, 궁형[宮刑])까지 당했다. 한 무제(기원전 202 - 157)는 영웅의 기질을 가진 영명한 군주라 칭송을 받는데 어째서 정직한 사관을 감옥에 집어넣고 궁형까지 행했을까?

 

대다수 사람들은 사마천이 이릉(李陵)을 변호하면서 화를 당했다고 생각한다. 천한(天漢) 2년 한 무제는 장군 이광리(李廣利)에게 3만 기병을 인솔토록 하고 주천(酒泉)으로 보냈다. 흉노를 치게 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기도위(騎都威) 이릉에게 명해 5000보병을 인솔해 오랑캐 땅 깊숙이 들어가 합동 작전을 벌이도록 했다. 그런데 보병을 이끌고 진군했던 이릉은 최선을 다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중과부적으로 포로가 됐다.

 

이 소식이 장안(長安)에 전해지자 한 무제는 분노했다. 전투에 실패했다면 소무(蘇武)처럼 절개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정의 대신들 중 이릉을 변호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분노하는 무제를 보면서 시시비비를 가리지도 않고 이릉이 부끄러운 행동을 했다며 비난했다. 바른말을 건네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마천이 일어서서 “시의에 맞지 않는다”며 진실 된 말을 했다. 그 결과 재앙이 밀어닥쳤다.

 

사마천은 비록 이릉과 생사를 같이 하는 벗은 아니었지만 이릉의 사람됨과 재능을 존경하고 있었다. 사마천이 보기에 이릉은 훌륭한 장수였다. 정직한 사관이었던 사마천은 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무척 싫어했다. 출정하기 전 이릉은 한 무제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대신들은 한 무제의 면전에서 이릉의 능력을 과찬하면서 황제의 환심을 사기에 급급했었다. 이릉이 패배하자 보신만을 생각하는 조정 대신들은 한 무제의 얼굴빛만 살피면서 아부하기 바빴다. 그때 한 무제가 사마천에게 이릉의 패배를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사마천은 거리낌 없이 말했다.

 

“비록 조치가 부적절 하였으나 이릉은 필사적으로 적을 맞아 악전고투했습니다. 고대의 명장들도 이와 같았을 뿐입니다. 전투에서 패배해 포로가 되는 것은 부득이한 일입니다. 그가 비록 투항했으나 정상 참작할 만한 것에 속합니다. 만약 전쟁에서 패한 것에 대해 죄를 묻는다면 이릉 혼자만의 죄는 아닙니다. 이광리는 전투의 주장(主將)으로 행동이 굼떠 지원을 제때에 못했으니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릉의 인품을 볼 때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세상에 살아있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 왕조에 보답할 것입니다.”

 

사마천의 이 말은 한 무제의 안색을 변하게 만들었다. 사마천이 고의로 투항한 장수를 변호했을 뿐만 아니라 사마천의 말속에는 첫 출병해 흉노와의 전투에서 아무런 공이 없는 이광리(한 무제의 손아래 처남)를 일부러 깎아 내리고 풍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노기충천한 한 무제는 사마천을 ‘기군망주(欺君罔主)’의 죄명을 씌워 옥에 가두었다.

 

 

이듬해 한 무제는 불현듯 후회가 밀려왔다. 도망쳐 온 이릉의 부하를 사면하고 공손오(公孫敖)를 흉노의 주둔지에 파견해 이릉을 데려오도록 했다. 공손오는 성공하지 못했다. 더욱이 그는 포로에게서 이릉이 흉노를 도와 병사를 훈련시키며 한 왕조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무제는 공손오의 보고를 듣고 화를 참지 못해 곧바로 이릉의 전 가족을 주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사실 흉노를 도와 군사를 훈련시킨 사람은 한 왕조의 항장 이서(李緖)로 이릉이 아니었다. 이릉의 전 가족이 주살당하는 상황에서 이릉을 변호했던 사마천도 피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한 무제에게 잔혹한 궁형을 당하게 된다.

 

궁형은 눈뜨고 보지 못할 잔혹한 형벌이다. 사람의 신체를 훼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평생 치욕을 안겨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기원전 98년 부형을 받았다. 그는 원망하는 기색 없이 태연자약하게 궁형을 받았다고 한다. 사마천은 치욕을 참아 중임을 완성하기로 결심한다.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며[苟且偸生]’ 후세에 ‘천고의 절창이요 무운의 이소’라고 평가 받는 『사기』를 완성한다.

 

이것이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사마천이 궁형을 받은 사연이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사마천이 감옥에 갇히고 궁형을 받은 것은 한 무제의 총신 이광리에게 원한을 사고 이릉의 항복한 변절행위에 대해 변호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이라 할 수 없다. 진정한 이유는 ‘무망천자(誣罔天子)’에 있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보기에 이릉의 실패는 정상 참작할 만하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실패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대완국(大宛國)의 이사성(貳師城, 현 키르기스스탄의 오시[Osh])에 말을 구해오라 파견됨으로써 이름 붙여진 이사(貳師)장군 이광리 이외에 한 무제도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었다.

 

황제는 이릉을 그리 신임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릉이 이끄는 군사가 너무 적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두 보병이었다. 머나먼 길을 걸어가야만 했기에 전투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릉이 곤경에 빠졌을 때 이광리는 구원병을 제때에 보내지 못했다. 그 책임은 사람을 잘못 쓴 황제가 져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존심이 강했던 한 무제가 많은 대신들 앞에서 난처하게 됐으니 어찌 참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감옥에 가두고 지켜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감옥에 들어간 사마천이 후회하지 않자 궁형을 실행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외에 한 무제가 일찍부터 사마천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기회를 보고 있던 한 무제가 이광리를 폄하했다거나 임금을 멸시했다거나 투항한 장수를 변호했다는 것으로 죄를 뒤집어씌웠다고 본다. 궁형을 시행한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마천은 한 무제에게 무슨 죄를 지었는가?

 

그가 쓰고 있던 『사기』와 관련이 있다. 동한 학자 위굉(衛宏)은 『한서구의주』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사마천은 『경제본기』를 쓰면서 지극히 짧은 문장으로 무제를 언급했는데 무제는 노하여 삭제하도록 했다. 후에 이릉을 선발했으나 이릉이 흉노에 투항하자 궁형에 처했다.” 이렇게 본다면 사마천이 궁형을 받은 근본 원인은 이릉을 변호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기』의 기록이 한 무제의 약점을 건드린데 있는 것이 된다.

 

사마천의 저작 태도는 “과장되지도 않고 허물을 숨지지도 않았다.” 높일 것은 높이고 비판할 것은 비판했다.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사관으로써 할 일이었고 그것을 충실히 따랐던 인물이 사마천이다. 한 왕조를 위해 미화하지도 않고 용감하게 나서 군주와 장상들의 사적인 비밀을 들추어냈으니 한 무제와 그 총신들이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황제가 나서서 사마천에게 자신이 싫어하는 부분을 없애라고 할 수도 없었다. 역사에 오명을 남길 수는 없는 일이 아니던가. 그래서 흔적을 최대한 남기지 않는 방법이 합법을 가장해 죄를 물으며 사마천의 의기를 끊는 것일 터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마천이 불운은 이미 정해진 것이 된다. 그가 이릉의 사건과 연루가 됐던 안 됐던 한 무제는 결코 놓아두지 않았을 터이니.

 

또 다른 관점도 있다. 사마천이 부형을 당한 것은 한 무제의 변태적 성격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무제의 희로애락이 사마천의 평생을 좌우했다 본다. 사마천의 비극은 실재로 무제 한 사람에 의해 결정됐다. 무제는 54년간 황제 자리에 있으면서 승상 13명, 어사대부 18명(그중 4명은 승상이 됐다)을 임용했다. 그들 승상과 어사대부들은 자신의 뜻을 굽혀 아첨하거나 조신해 자리만 지켰다. 감히 나서서 직언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마천이 이릉을 위해 변호를 한 본뜻은 조정의 이익을 보호해 조정의 부당한 군사 방침을 줄이기 위한 책망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분노한 무제는 사마천의 고심을 아랑곳 하지 않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죄를 물어 궁형에 처해 버린 것이다. 사마천은 감옥에 갇히고 6년 후에 쓴 『보임안서』에 한 무제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소치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한 무제는 45년 동안 황제로 군림했다. 서한(西漢) 왕조의 1/4에 해당한다. 중국 역사상 이른바 ‘한당성세(漢唐盛世)’라고 하는 기간 중 한나라의 ‘성세’는 바로 무제 재위시기를 상징한다. 한 무제 유철(劉徹)이 황제 자리에 있으면서 혁혁한 정치적 성과를 거뒀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을 주창했고 중앙집권을 이루었으며 농업을 발전시키고 서역과 교류했으며 흉노의 세력을 막아냈다. 서한 왕조의 전성기를 맞아 중앙정권을 공고히 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러나 모택동이 “진시황 한무제는 문화적 소향이 부족하다(秦皇漢武,略輸文采)”라고 했던 것처럼 한 무제의 위대한 공적에 반해 그의 인물됨은 부족하기 그지없었다. 전제독재였고 공을 자랑하기 좋아했으며 잔혹 황음하고 완고하고 독단적이었다. 사람을 씀에 의심이 많았고 까닭 없이 미워했다. 만년에 무제는 괴팍함이 극에 달했다. 듣기 싫은 소리에 걸핏하면 대신들에게 죄를 씌웠다. 무제는 13명의 승상을 임용했는데 그중 6명을 그리 크지도 않은 과실로 주살하거나 자살하도록 했다. 그래서 조정 대신들은 전전긍긍하지 않은 이들이 없었다. 무제 앞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이런 무제의 통치아래 사마천처럼 직언하고 황제의 과실을 지적하는 사람이 무사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사마천은 이릉과 연루돼 무고한 박해를 받은 후에도 대쪽 같은 성격을 버리지 않았다. 그가 이전에 한 무제의 문치무공에 대한 기록을, 역사와 당시의 중국에서 발생한 모든 것을 실재적으로 평가하면서 비판정신을 더욱 공고히 했다. 그런 그였기에 만고에 빛나는 인물이 됐고 위대한 역사가로 영원히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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