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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50)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장량(張良 : ?-기원전 186년), 자는 자방(子房)으로 성부(城父 : 현 하남[河南]) 사람이라 전한다. 관리 집안 출신으로 조부와 부친 모두 한(韓)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진(秦)나라에 의해 한나라가 멸망하자 진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나중에 유방(劉邦)에게 몸을 의탁한다. 유방이 천하를 얻을 때 계책을 마련해주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장량은 시서를 섭렵하여 식견이 심원했다. 그가 제시한 육국 불립, 영포(英布)와의 연합, 한신 등용 등의 책략은 유방이 모두 받아들였다. 유방이 “운주유악(運籌帷幄)은 장량보다 못하다.”고 할 정도였다.

 

장량은 서한 고조 유방의 유명한 책사다. 소하(蕭何), 한신(韓信), 진평(陳平)과 더불어 ‘한초사걸(漢初四傑)’이라 부른다. 그는 일찍부터 유방을 따라다니며 천하를 평정했다. 병법에 능하고 계책을 잘 세워 한 왕조가 성립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유방이 황제가 된 후 ‘계획을 세워 장막 안에서 움직여 천 리 밖의 승리를 얻게’ 하였기에 유후(留侯)에 봉했다. 장양은 제왕을 보좌하여 일대의 명신이 될 수 있었기에 후대의 찬양을 받는다. 

 

 

그보다 후대 사람들이 흠모하는 것은 장량의 운명이다. 유방은 제위에 오른 후 공신들을 시기하기 시작한다. 한신, 영포와 팽월(彭越) 등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주살을 당하여 일시에 조정 공경대부들 모두 공포에 휩싸였는데 장량은 시종 재난을 당하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 후대 사람들은 이를 다행스러워하고 심지어 장량의 보신 방법에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장량의 귀착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장량이 당시 공신들이 주살 당하는 것을 보고 매우 낙심하여 스스로 관직을 내놓고 유방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백운산(白雲山)으로 도를 배우러 떠났다고 하는 관점이다. 이런 설은 희곡과 소설에 많이 인용된다. 예를 들어 경극『장량사조』는 이를 근거로 한 것이다. 정사에도 이와 같은 기록이 보인다. 『사기․유후세가』에 따르면 유방이 태자 유영(劉盈)을 싫어하여 척(戚)부인의 아들 여의(如意)를 태자로 앉히려고 했다. 대신들은 간절히 간언했으나 유방의 뜻을 바꿀 수 없었다. 장량도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유방이 따르지 않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유방에게 표를 올려 자신의 뜻을 전한다.

 

“장량은 조상 대대로 내려 온 한(韓)나라의 후예인데 마침내 한나라가 진시황에게 멸망하고 보니 억만금의 재산도 애착이 가지 않고 나의 조국 한나라의 원수인 천하 강국 진(秦)을 쳐서 멸망시킴으로써 원수를 갚고 복수해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이제 세치밖에 안 되는 저의 혀로 임금의 스승이 돼 일만 호에 봉해지고 열후가 되니, 가난하여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는 서민으로써는 극치를 이룬 것으로써 장량은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제 제가 더 바라고 있는 것은 인간사를 모두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좇아 노닐고 싶을 따름입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표연히 떠나가 종적을 알 길이 없게 되었다고 한다. 후세의 소설가들은 적송자를 억지로 끌어다 붙였다. 그는 신농(神農)시대의 우사(雨師)로 비바람을 부를 수 있고 서왕모(西王母)의 거처에 드나들었다고 한다. 장량이 적송자가 있는 곳에 갔으니 분명 전심으로 도를 배웠을 것이라 여겼다.

 

이와 다른 관점은 장량이 조정을 떠나지 않았고 관직에 있으면서 천수를 누렸다고 보는 것이다. 유방이 태자 유영을 폐하려고 하자 태자의 생모인 여후(呂后)는 다급해졌다. 여후가 장량에게 계책을 묻자 장량은 유방이 평소 경모하는 숭산사로(嵩山四老)를 초빙해 유방에게 간언하게 하면 태자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건의한다. 이에 여 씨 가족은 태자의 친필 편지를 들고 공손한 말과 후한 선물로 사로에게 하산하기를 청했다. 유방은 사로가 이미 백발이 됐고 볼품없는 노인이 돼 버린 모습을 보고 무척 놀랐다. 그들에게 “먼저 번에 도와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당신들은 피하고 돌봐주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째서 내 아들과 왕래하는가?”라고 물었다.

 

사로는 “폐하께서 다른 사람을 안중에 두지 않고 오만하시니 신들은 욕을 볼까 걱정돼 하산했습니다. 태자는 어질고 효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현인을 공경하고 윗사람을 잘 모시어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태자를 본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태자를 위해 신들의 생명을 앗아간다고 해도 조금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해 하산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유방은 태자가 이미 민심을 얻었다고 여기고 함부로 폐할 수 없다 판단하여 태자를 바꿀 뜻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한서․장신왕주전』과 『사기․유후세가』에 기록돼 있다.

 

이 일로 해서 여후는 장량을 은인으로 여겼다. 유방이 죽자 여후는 장량에게 보답하기 위해 도를 배우는 생활을 그만두고 관직에 오르도록 권했다. “사람의 한 평생은 백구가 문틈으로 지나가는 것만큼 짧은데[如白駒之過隙] 어찌 스스로 그와 같이 고생하며 살기를 원하십니까?”라고 하니 장량은 마지못해 여후의 권고를 받아들여 조정에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장량은 당시 연로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 얼마 후 병을 얻어 죽었다. 조정은 ‘문성후(文成侯)’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문재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정치를 확립하였으며 천수를 누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두 가지 관점은 하나는 문학에서 또 하나는 역사기록에서 뽑은 것이다. 역사 기록이 더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장량은 관직에 있으면서 천수를 누린 것이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역대로 장량이 입산수도하여 도를 얻고 신선이 됐다는 신비스런 결론을 더 선호한다. 어쩌면 공신들을 무차별 살육했던 군주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공을 세운 뒤 곧 물러나서 명성을 지킨, 청사에 길이 남을 이름, 장량에 대한 경탄을 기탁한 것일 수도 있고.

 

‘운주유악(運籌帷幄)’은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운용하다는 뜻이다. 『사기․고조본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천하통일을 이룬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낙양(洛陽) 남궁에서 잔치를 베풀면서 말했다. “경들은 숨김없이 말하시오.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과 항우가 나에게 패배한 까닭을 말이오.” 그러자 고기와 왕릉이 말했다. “폐하께선 성을 치고 공략한 후에는 공을 세운 사람에게 그 땅을 주어 천하 사람들과 이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항우는 의심과 질투가 많아 싸움에 이겼어도 성을 주지 않았고 땅을 얻어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폐하가 천하를 얻게 된 이유인 줄 압니다.”

 

그러자 유방은 이렇게 말했다. “경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대체로 나라는 사람은, 계획을 세워 장막 안에서 움직여 천 리 밖의 승리를 얻게 하는 데는 장량만 못하고(夫運籌帷幄之中,決勝於千里之外,吾不如張良), 나라를 편안히 하고 백성을 어루만져주며 군대에 보급을 끊어지지 않게 하는 데는 내가 소하만 못하며(鎭國家撫百姓,給餽饟不絶糧道,吾不如蕭何), 백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치면 반드시 빼앗는 것은 한신보다 못하오(運百萬之軍,戰必勝功必取,吾不如韓信). 그러나 내가 장량과 한신, 소하와 같은 참모와 용장을 잘 통솔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재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소. 이것이 내가 천하를 차지한 이유요. 반면 항우 밑에는 범증이란 인재 한 사람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쓰지 못했소. 이것이 나에게 패한 이유요.”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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