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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49)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한신(韓信 : ? - 기원전 196)은 진(秦)나라 말기 회양(淮陽 : 현 강소[江蘇]) 사람이다. 어릴 적에 집안이 가난해 사람의 가랑이 사이를 빠져 나갔던 치욕을 맛보기도 했다. 유방(劉邦)의 대장군이 돼 혁혁한 공을 세웠다. 기원전 202년 항우(項羽)를 해하(垓下)에서 포위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 유방에 의해 초왕(楚王)으로 봉해졌다가 얼마 되지 않아 폄하되자 원한을 품게 됐다. 기원전 196년 측근이 여후(呂后)와 태자를 해하려 하다고 고발하자 소하(蕭何)가 계략을 세워 미앙궁(未央宮)으로 오게 한 후 시해하고 3족을 멸했다.

 

한신은 진한(秦漢) 교체기의 군사 전문가다. 진이 망하고 한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유방이 천하를 호령하게 만든 큰 공을 세운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을 일러 한초 ‘삼걸(三傑)’이라 하는데 장량(張良), 소하(蕭何), 한신(韓信)이다. 그러나 한신은 공을 세워 명성을 떨친 후 천수를 누릴 수 없었다.

 

군사와 무공을 논한다면 한신은 유방의 신하 중 제1공신이라 할 것이다. 출신이 빈한하여 진나라 말기 농민봉기가 일어나자 한신은 농민군에 참가했다. 처음에는 항우의 밑에서 일을 했으나 나중에는 모사 소하의 추천으로 유방에 의해 대장군으로 모셔졌다. 한신의 군사 방면의 천재적인 재능은 초한쟁패(楚漢爭覇) 중 어김없이 드러났다. 그의 군사 사상은 뚜렷했고 지략은 훌륭했다. 먼저 유방에게 근거지를 장악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군사를 이끌고 ‘암도진창(暗渡陳倉)’하여 관중(關中)을 장악하고 한중(漢中)을 공고히 한 후 동진해 황하 하류의 광대한 지역을 소탕했다. 기원전 202년 유방과 회합하여 해아에서 항우를 포위해 패퇴시킨 후 유방이 군림천하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한나라가 건립된 후 전공이 혁혁한 한신을 왕으로 봉했다. 그러나 천하무쌍의 공신은 한 고조(高祖) 11년 1월 여후와 소하에 의해 주살 당한다. 한신은 무엇 때문에 주살 당했는가? 이것은 아직도 수수께끼다. 장구한 세월 동안 한신의 죽음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첫 번째 설은 한신의 공이 군주의 위세를 압도하게 돼 유방에 의해 계획적으로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한신은 자기의 군사 재능을 너무 믿어 몇 번이나 유방과 의견을 달리 했다. 심지어 자신에게 봉토나 작위를 달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그래서 유방이 위협을 느끼게 됐다는 것이다. 한 고제(高帝) 5년(기원전 202) 유방이 형양(滎陽)에서 초나라 군대에 의해 겹겹이 포위돼 곤경에 빠진 적이 있었다. 한신에게 구원을 명령하자 한신은 ‘진화타겁(趁火打劫)’하여 왕에 봉해달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나 몰라라 하겠다는 것이었다. 유방은 천불이 났지만 위급한 형세 때문에 원망을 가슴에 담고 본의와는 달리 제왕(齊王)에 봉했다. 유방이 총명하여 자신에게 한신이 그만큼 가치가 있기에 잠시 머무르게 하고 기회를 보고 본때를 보여주자는 심산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제나라 사람 괴통(蒯通)이 한신에게 왕에 오르라고 권하면서 유방을 위험에 그냥 놔두고 하늘의 뜻을 따르자고 했다. 한신은 차마 유방을 배신하지 못했다. 자기 스스로 공이 크니 유방이 악랄한 수단을 쓸 수 없을 것이라 여겨 괴통의 얘기를 듣지 않았다. 이외에 유방은 항우의 부하 장수인 종리매(鐘離昧)와 한신이 사이가 좋아 항우가 패망한 후에 종리매가 한신에게 투항한 것을 보고는 유방은 더욱더 의심을 품게 됐다고 한다.

 

한신이 초왕에 봉해진 후 1년이 채 되지도 않았을 때 그가 모반을 꾸미고 있다는 고발이 들어왔다. 이에 유방이 한신을 주살할 결심을 굳히게 됐다. 유방은 한신이 모반을 꾸몄다는 확증도 없이 그들 회음후(淮陰侯)로 강등시키고 경성에 연금시켰다. 주도면밀하게 한신을 올무에 묶으려 했으나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다. 후에 진희(陳豨)가 반란을 일으키자 바로 한신과 음모했다는 죄명을 씌워 버렸다. 이렇게 한신으로 하여금 대처할 방도를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 비밀스럽게 주살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설은 한신이 모반을 꾸몄기 때문에 주살 당했다고 한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한신의 인물됨이 충성스럽지 못하고 안분지족을 모르는 장수였다고 본다. 한신은 처음 종군할 때 여러 번 자리를 옮겼다. 자신에게 이익이 없다고 생각하면 옛 주인을 버리고 다른 주인을 찾아 나섰다. 나중에 유방을 만나서야 자리를 굳히게 됐다. 유방과 함께 있으면서 한신은 자신의 군사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가지게 됐고 점차 명망과 군공을 얻으면서 서서히 다른 마음을 품게 됐다. 한신은 공이 많다고 자부하여 다른 사람을 눈에 두지도 않았고 자신의 언행도 함부로 했다. 한신은 공개적으로 항우의 옛 장수 종리매와 교류했고 군 기율을 멋대로 어겼으며 규범에 어긋난 의장대를 이용하면서 유방이 꺼리게 됐다.

 

한신을 체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신을 미혹시키기 위해 처음에는 유방이 진평(陳平)의 ‘조호이산(調虎離山)’의 계책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유방은 초나라의 운몽(雲夢)을 유람하면서 한신에게 초의 서쪽 지역에서 연회를 열 것이니 참석하라고 한 후 체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유방은 당시에 손을 쓸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신이 모반을 계획했다는 증거가 불충분하고 만약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도와 천하를 얻게 만든 공신인 까닭에 사면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신을 회음후로 강등시키고 장안에 거주하게 하면 감시가 편리할 것이라 생각했다.

 

한신은 황제가 자신을 결코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모험을 선택했다. 한 고제(高帝) 7년, 한신과 부하 장수 진희가 결탁하여 반란을 준비했다. 진희가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은 친히 출정했으나 한신은 병을 핑계로 출정하지 않고 경성에서 반란군을 맞을 준비를 했다. 계획이 실현되기도 전에 누설됐다. 유방의 황후 여치(呂雉)는 한신을 함부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주도면밀하게 한신을 체포할 계획을 세웠다. 소하로 하여금 대외적으로 진희의 반란이 이미 평정돼 축하연을 베풀 것이니 군신들은 궁으로 들어오라 선포하도록 했다. 한신은 아무 준비도 없이 시간에 맞춰 안락궁(安樂宮)으로 들어섰다. 생각지도 않던 매복 군사들의 습격을 받아 끝내 황천길로 들어섰다. 이렇게 한신은 모반을 계획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고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됐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은 의견을 달리 한다. 한신의 죽음은 한나라 초기 통치자의 예정된 국책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 본다. 기원전 206년에서 202년 사이 초한쟁패 과정에서 유방의 곁에서 공을 세운 인물 중 7명이 모두 왕의 작위를 받아 반독립의 왕국을 건립했다. 유방은 특정적인 역사적 상황 하에 7명의 공신을 왕으로 봉했는데 역사서에는 이를 ‘이성제왕(異性諸王 : 성이 다른 여러 왕)’이라 부른다. 그들은 광활한 산해관(山海關) 동쪽 지역[관동關東]을 점하여 군대를 보유하고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면서 정치의 한쪽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한 왕조의 중앙집권의 최대 장애로 떠올랐다. 유방이 당초 그들을 왕으로 봉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임시변통의 계책이었다. 유방이 황제에 오른 후 6개월째부터 여러 왕들이 모반을 꾸몄다는 빌미로 한 명 한 명 제거하기 시작한다. 그 ‘이성제왕’들은 ‘가천하(家天下 : 한 집안의 천하, 왕이 국가를 자기 1인의 것으로 생각하여 대대로 물려주는 것)’의 희생물이었다.

 

‘이성제왕’ 중 장사(長沙)왕 오예(吳芮)는 세력이 가장 약했고 국토도 변두리라 다행히 주살 당하지 않았다. 여타 한왕신(韓王信 : 한신), 회남왕(淮南王) 경포(黥布), 연왕(燕王) 노관(盧綰) 등은 유방의 의심과 핍박을 받아 모반을 획책하게 되고 끝내 사라져 버렸다. 양왕(梁王) 팽월(彭越), 조왕(趙王) 장오(張敖)는 초왕 한신과 마찬가지로 모반을 꾸몄다며 주살 당했다. 한신과 같은 ‘백전백승’의 명장이라면 유방이 무서워 벌벌 떨 수도 있음이니.

 

 

한신이 모반을 꾀하던 꾀하지 않았던 간에 유방의 성정을 보면 그의 끝이 좋지는 않았으리라. 한신과 같은 걸출한 영웅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유방이 보기에는 위협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임엔. 중국에서 ‘조진궁장(鳥盡弓藏)’ 돼 역사 속으로 사라진 개국공신들이 하나 둘이 아니니. 권력이란 인간성을 잃게 만드는 악임에. 모연이 송골해지는 사례는 부지기수이기에.

 

문장에 있는 몇 가지 고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암도진창[暗渡陳倉]이란 ‘몰래 진창으로 건너가다’라는 뜻이다.
초한쟁패 중 항우는 유방을 한왕(漢王)에 봉함으로써 요충지인 관중(關中)을 떠나 한중(漢中)으로 가도록 했다. 유방은 관중을 떠날 때 장량(張良)의 권고에 따라 잔도(棧道)를 불태운다. 잔도는 벼랑에 나무로 가설해 놓은 길인데 관중으로 통하는 길을 없애 버림으로써 자신이 관중을 넘볼 마음이 없다는 뜻을 항우에게 보여준 것이다.

 

한중에서 유방은 한신을 대장군으로 하여 동쪽을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한신은 군사들을 시켜 불타버린 잔도를 수리하는 척했다. 관중을 지키던 초나라 장수 장한(章邯)은 잔도를 수리하는 기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고 방심하면서도 군사들을 잔도로 집결시켰다. 장한이 잔도에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 한신은 우회하여 진창을 점령하고 관중을 함락시킴으로써 중원으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했다.

 

이로부터 ‘명수잔도,암도진창(明修棧道,暗渡陳倉:겉으로는 잔도를 수리하는 척하면서 몰래 진창으로 건너가다)’라는 말이 생겼다. 정면으로 공격할 것처럼 적의 주의를 끈 뒤에 방비가 허술해진 후방을 공격하는 계책이다. ‘성동격서(聲東擊西)’와 비슷하다.

 

‘진화타겁(趁火打劫)’은 불난 틈을 타 빼앗는다는 뜻이다. 적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를 틈타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오승은(吳承恩)의 『서유기』에서 나왔다. “바야흐로 욕심이 난 그는 불을 끄지도 않고 물을 찾을 생각도 없이 가사를 챙겼다. 소란스러운 틈을 이용해 훔쳐서는 구름을 불러 타고 동굴을 돌아서 사라졌다.” ‘진홍타겁(趁哄打劫)’으로 불을 질러 소란스럽게 만들었으니 ‘진화타겁’이다. 즉 적이 혼란할 때 취한다는 뜻으로 『손자병법』의 ‘난이취지(亂而取之)’와 같다.

 

‘조호이산(調虎離山)’은 호랑이를 유인하여 산을 떠나게 하다는 뜻이다. 적으로 하여금 유리한 곳에서 벗어나게 하여 힘을 약화시킨 다음에 공격하는 전략이다. “하늘이 적을 곤란하게 만들 때를 기다리고 인위적으로 적을 유인하여 그 행로를 어렵게 만든다(待天以困之,用人以誘之,往蹇來連)”는 것이다. 자연적인 조건이나 상황들이 적에게 불리할 때를 기다리고 위장 전술을 펴 적으로 하여금 유리한 근거지를 벗어나게 함으로써 우세한 점을 잃게 한 뒤에 제압하여 승리한다는 말이다.

 

‘조진궁장(鳥盡弓藏)’은 새를 다 잡고 나면 활은 창고에 넣는다는 뜻으로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버림받게 됨을 비유한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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