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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48)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만세(萬歲)는 영원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원래 신하가 군주에게 하는 축하의 말이었다. 『사물기원(事物紀原)』에 “군주에게 기쁘게 경축하는 백성은 모두 만세를 부른다.”고 돼 있는 게 그것이다. 후에 점차 신하가 황제를 대하는 호칭으로 변한다. ‘만세’가 ‘황제’의 대명사가 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고찰해 본 결과 한(漢)나라에서 비롯됐다는 주장도 있다.

 

봉건사회인 중국에서 만세는 황제의 대명사였다. 최고 통치자와 동등한 위의(威儀)이며 중국 봉건 전제주의의 형식상의 표현이다. 신하들이 말하는 ‘만세야(萬歲爺)’는 바로 황제다. 황제 이외에 어느 누구도 감히 ‘만세’와 연계시킬 수 없었다. 명나라 조야를 전횡하며 황제를 눈 아래 뒀던 환관 위충현(魏忠賢)조차도 ‘구천세(九千歲)’라고밖에 못했다. 지존의 ‘만세’라는 칭호는 언제 생겨난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변해 왔을까?

 

 

 

 

서주(西周), 춘추(春秋)시기 ‘만세’라는 말은 출현하지 않았다. 여타 이와 관련된 어휘의 뜻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서주시대 금문 중 ‘미수무강(眉壽無彊)’, ‘만년무강(萬年無彊)’, ‘만수(萬壽)’ 등이 보이지만 ‘만년무강’이나 ‘미수무강’ 등은 사람들이 상용하던 찬사요 축하의 말이었다. 서주 금문 중 이와 유사한 문자들이 보이나 천자에 대한 찬송이 아니고 문장의 격식으로 정을 주조하는 사람은 모두 사용했다. 그 뜻은 자손만대에 무강하기를 바라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만세’라는 용어는 이러한 찬송이나 축하의 말에서 연용된 것은 틀림없다.

 

『시경』중에 보이는 ‘만수무강’ 등의 어휘도 후대 사람들이 황제를 부르는 칭호하고는 다르다.

 

“2월에는 얼음을 쪼개고, 3월에는 얼음 창고에 넣고 4월에는 이른 아침에 염소를 바치고 부추로 제사를 지낸다. 9월에는 서리가 내리고 10월에는 마당을 깨끗하게 하며 두 단지의 술로 잔치를 베풀어 염소와 양을 잡아 대접하고 공회당에 올라가 쇠뿔 잔의 술을 서로 권하며, 만수무강(萬壽無疆)하십시오.”(「빈풍(豳風)」칠월)
“남산에 잔디 있고 북산에 명아주 있다네. 즐거워라 군자여 나라의 터전이시다. 즐거워라 군자여 만수무기(萬壽無期)하소서.”(「남산유대(南山有臺)」)

 

여기에서의 ‘만수무강’이나 ‘만수무기’는 손님을 찬송하며 축복하는 말이다.

 

전국(戰國)시대에서 한(漢)나라 초기에는 ‘만세’라는 말이 당시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렸고 역사 문헌 속에도 자주 등장한다. 『사기․염파인상여열전』에 인상여(藺相如)가 화씨지벽을 가지고 진나라에 들어가자 진왕은 크게 기뻐하며 미인과 좌우의 대신들에게 보여주니 모두 ‘만세’를 불렀다고 기록돼 있으나 이때의 ‘만세’라는 말은 환호하는 말일 뿐이다. ‘만세’는 심지어 죽음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전국책․초책』의 기록에 보면 서초패왕이 운몽(雲夢)을 노닐면서 앙천대소하며 “과인이 만세천추 후 누구와 이런 즐거움을 함께 할 것인가?”라고 하였는데 ‘만세춘추’란 오래 살기를 축수하는 말, 천년만년이란 뜻도 가지고 있으나 임금 혹은 어른이 죽은 후 높이어 이르는 말로써 여기서는 죽음을 뜻한다. 『사기․고조기』12년에 유방 자신이 비록 관중에 있으나 ‘만세’ 후에 내 혼백은 여전히 패(沛)를 생각할 것이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 또한 죽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만세’라는 단어는 어느 때부터 진정한 ‘존엄’을 일컫는 말이 됐고 제왕의 대명사가 됐을까? 사학자들의 의견이 각기 다르다. 한 고조 유방이 조정에 나올 때 “어전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殿上群臣皆呼萬歲)”라고 한데서 비롯됐다고 하는 의견이 있다. 이때의 ‘만세’는 전국시대 때 일반적으로 찬송하는 ‘만세’와는 다른 조정 의식과 연결돼 있다. 유방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어 황제의 보좌에 오른 후에도 재야에 묻혀 있을 때의 기색을 자주 노출시켰다. 신하 숙손통(叔孫通)은 그런 모습은 천자의 위엄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여겨 어용 예의를 제정하면서 제후 이하 모두 공경토록 하였고 매일 유방에게 황제의 존귀함을 알려 주었다. 이런 예의는 역대 제왕들의 어용 예관들에 의해 계속해서 인습되고 거기에 보충하여 후에 ‘만세’를 배례하는 번잡한 허례가 만들어졌다.

 

 

 

 

다른 관점도 있다. 황제를 ‘만세’라 부르는 것은 한 무제 유철(劉徹)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한 무제가 독존유술(獨尊儒術)케 하자 ‘만세’도 유가들에 의해 황제 1인에게 한정했다고 한다. 『한서․무제기』기록을 보자. 원년 춘정월 무제는 구씨(緱氏)로 출행하였다. 화산(華山)에 오르는데 묘 옆에 있던 관리들이 만세 삼창하는 소리를 들었다. 산신들이 부른 것이라 풀이 했다. 15년 후 무제는 낭아(琅玡)로 출행하여 산 정상에 오르자 바다 위에 있는 것 같았는데 산에서 만세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래서 무제는 산신과 산석 모두 자신을 만세라 하는데 신민이 어찌 만세라 하지 않느냐고 하자 이때부터 황제의 보좌 앞에는 ‘만세’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부르면 반역이나 불경죄로 다스렸다고 했다.

 

『후한서․한릉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대장군 두헌(竇憲)이 흉노를 대파하자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황제의 명을 받고 장안에 도착하니 상서(尙書) 이하 모두 배알할 것을 의결하고 만세를 부르자고 했다. 한릉은 정색하며 신하를 만세라고 하는 예의나 제도는 없다며 반대하자 신하들이 부끄러워하며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이로 보면 황제를 만세라고 부르는 제도는 이미 확립돼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나라 이후 ‘만세’의 단어를 사용하는 대상과 장소가 나날이 엄격해졌다. 일반 사람은 부를 수 없었다. 그러나 한나라 때만 해도 ‘만세’라는 말은 황제에 국한한 것이 결코 아니다. 한나라 때 예의 규정을 보면 황태자에 대해서도 만세라 했다. 황족 중에서도 ‘만세’를 이름으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 화제(和帝)의 이름이 ‘유만세(劉萬歲)’다. 한나라부터 당나라에 이르기 까지 군신을 ‘만세’라 부른 사례는 종종 있었다. 『후한서․이고전』에 권신 양기(梁冀)가 이고(李固)를 모함하여 옥에 가두자 문인이 상소하여 사면을 받았다. 이에 사람들이 만세를 불렀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당나라 곽자의(郭子儀)가 회흘(回紇)과 동맹을 맺게 되자 땅에 술을 붇고 맹세하면서 “대당 천자 만세, 회흘 가한(可汗) 만세, 양국 장상 만세”를 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런 것으로 보면 황제만을 만세라고 부르는 제도는 그리 확고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송(宋)나라로 오면서 ‘만세’ 칭호는 군신들은 결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송사․구준전』에 북송 대신 구준(寇準)이 출행할 때 정신병자가 말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 일을 구준의 정적이 알고 상소를 올리자 구준은 지사로 좌천돼 지방으로 내려 간 기록이 보인다. 대신이 이상한 사람에 의해 만세라 불렸다고 강등당해 지방으로 좌천됐다면 일반 백성이 ‘만세’라고 했을 경우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북송의 대장 조리용(曹利用)의 조카 조눌(曹訥)이 술 취해 ‘사람들에게 만세라 부르라’했는데 고발을 당해 장형으로 죽었다. 이렇게 본다면 송대에 와서는 황제 이외에 어떤 사람도 만세라 부를 수 없게 엄격해졌음을 알 수 있다.

 

‘만세’의 용어는 처음에는 상하의 통칭이었는데 나중에 황제를 칭하는 고유명사로 변했다. 이로 볼 때 ‘만세’의 함의는 현격한 변화를 겪었고 중국 언어문자의 발전 과정에 있어 독특한 정치적 고유명사가 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런 현상은 중국의 봉건사상의 완고함과 황제 중심의 전제주의 폐해를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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