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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47)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한족(漢族)은 중국의 주류를 이루는 민족이다. 고대 화하(華夏)족과 기타 민족이 장기간 공동생활과 경제적 교류를 통해 혼혈로 이루어진 민족이라고 한다. 언어는 한장(漢藏)어계에 속한다. 원시사회, 노예사회, 봉건사회를 거쳐 발전했고 문자를 가지고 고증할 수 있는 40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주로 황하(黃河), 장강(長江), 주강(珠江)의 3대 유역과 송료(松遼) 평원에 거주하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민족이다.

 

한족(漢族) 형성에 관한 문제에 대해 중국 사학계는 각기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줄곧 격렬한 논쟁을 벌여 왔는데 논쟁에 참여했던 학자들의 의견은 대략 4가지로 귀결할 수 있다. 한족은 진한(秦漢)시기에 성립됐다고 하는 게 첫째이고, 둘째는 명대(明代) 후기부터 형성됐다고 하기도 하며, 셋째는 청대(淸代)에 성립됐다 하기도 하고, 넷째는 아편전쟁 이후에야 한(漢)민족이 성립됐다고 하기도 한다.

 

 

범문란(范文瀾), 장관영(章冠英) 등은 한족이 진한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범문란은 한족이 가지고 있는 4가지 특징은 진한 시기에서부터 초보적으로 갖춰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예기』와 『중용』에서 말하는 ‘서동문(書同文)’은 바로 ‘공동 언어’이고 ‘행동륜(行同倫)’은 ‘공동 문화상 공동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라 해석했다. ‘거동궤(車同軌)’는 ‘공동 경제생활’이나 ‘경제의 연계성’을 말하는 것으로 만리장성 안쪽의 광대한 광역은 바로 ‘공동의 영역’임을 뜻한다고 보았다.

 

전국시대와 진한 시대는 이미 중국 내에 발달된 교통 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상품 유통이 경제생활 중에 차지하는 비중도 나날이 중요하게 됐다고 보았다. 그렇게 중국 내에 자연스레 크고 작은 시장이 형성되면서 한나라 때 장안(長安), 낙양(洛陽), 완(宛), 한단(邯鄲), 임치(臨淄), 성도(成都) 등 중국 상업의 중심이 되는 큰 시장이 형성됐다고 보았다. 따라서 경제 중심이 형성됐고 민족 시장이 형성되면서 봉건적 성질의 공․상업이 중국 전국 범위로 유통됨으로써 통일국가인 진한이 형성될 수 있게 기초를 다졌다고 보았다. 범문란은 “한족은 진한 이래로 국가 분열 시기의 부족도 아니요 자본주의 시대의 자산 계급 민족도 아니고 독특한 사회 조건 아래 형성된 독특한 민족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장관영과 범문란은 일치된 의견을 보인다. 그는 스탈린의 민족 형성의 4가지 특징 이론은 한족에게 똑 같이 적용된다고 했다. 진한 이후의 봉건사회 속에서 민족의 4대 요소가 구비됐고 진한 이후 중국 봉건사회의 중요한 특징, 예를 들어 장원(莊園) 경제의 소멸, 중앙 집권 국가의 출현, 각지 상품의 교류 등은 모두 중국 민족 내에서 만들어진 산물로 진한 이후 민족 시장, 경제와 문화 중심의 형성은 필연적인 것이라 보았다.

 

양즉준(楊則俊)과 장정명(張正明) 등은 한족은 명대 후기에 형성됐다고 주장한다. 양즉준은 민족은 점차 형성되는 것으로 자본주의의 출현이 그 과정의 시발점이라 봤다. 한족은 부족에서 민족으로 바뀌는 시점의 기준은 16세기 후기 중국 사회 상품 화폐 관계의 발전이며 그 기초 위에서 자본주의 맹아와 민족 시장이 출현했고 동시에 부족과 민족이 ‘신진 대사’가 이루어진 시기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장정명은 봉건사회 말기에 민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봤다. 그는 여러 기록을 근거로 명대 후기 중국사회는 각 방면에 새로이 여러 요인들이 출현했다는 것을 설명하고 그 시기에 이미 자본주의 생산이 출현했고 그때 중국은 봉건사회 말기로 진입했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한족은 명대 후기에 민족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단언했다.

 

콘래드(Conrad) 등은 한족이 청대부터 형성됐다고 주장한다. 콘래드는 중국 한족이 어느 시기에 민족으로 변했는지에 대한 연구는 스탈린이 제시한 “자본주의의 출현, 봉건 분할의 소멸, 민족 시장의 형성에 따른다.”는 부분이 민족으로 형성됐다는 이론을 근거로 했다. 그는 일본과 중국은 일찍부터 민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그는 스탈린 이론이 가리키는 것은 봉건제도의 일반적인 소멸이 아니고 봉건 분할의 소멸이라고 지적하면서 집중화된 봉건주의의 조건 아래 민족이 형성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때 적어도 민족이 형성되기 시작됐다고 본 것이다. 물론 스탈린이 제시한 두 가지 조건, 즉 자본주의 출현과 민족시장의 형성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봉건주의의 조건 아래에서 일찍부터 자본주의 관계가 맹아 됐고 이때에도 민족 시장이 건립됐으며 중국은 바로 청대에 그런 조건이 구비됐다고 보는 것이다.

 

 

에피모프(Efimov)와 증문경(曾文經), 관현(官顯), 위명경(魏明經) 등은 한족은 아편정쟁 이후에나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에피모프는 중국의 특수 상황을 근거로 하여 새로운 자본계급 관계의 발전은 외국자본의 침입과 보조를 같이 한다고 생각했다. 19세기 후반기 중국의 분산된 경제성은 점차 소멸되고 민족 시장이 형성됐는데 이것은 이미 중국 자본주의의 경제 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한다고 봤다. 이 시기에 이미 자본계급과 무산계급이 탄생했는데 이는 중국 경제와 정치 발전에 있어 전환점이 되는 시기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 이 시기에 중국 자산계급 민족이 형성됐다고 본 것이다.

 

이상은 역사 발전 과정에서 민족군(民族群) 중의 하나인 한족이 언제부터 구체화 됐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고찰을 정리한 것이다.

 

그렇다면 용어(개념)로써 한족이란 단어는 언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을까?

 

한족이라는 족칭(族稱)은 역시 ‘한왕조(漢王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일반적이 설명이다. 한 왕조는 ‘漢’을 국호로 삼았는데 이는 진나라가 망하자 항우(項羽)가 유방(劉邦)을 ‘한왕(漢王)’으로 봉하면서 시작됐다. 파(巴), 촉(蜀), 한중(汉中)을 통치했고 도읍은 남정(南鄭)이었다. 이처럼 ‘漢’의 처음 뜻은 방국(邦國)의 이름이었다. 그 범위는 현재 사천(四川)성 및 섬서(陝西)성 남부, 호북(湖北)성 서북부 지역을 말하고 이후 왕조의 명칭과 민족의 명칭으로 연용 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 연원을 찾아보면 ‘漢’의 본뜻은 강 이름으로 ‘양수(漾水)’를 가리킨다. 기록에 보면 진한(秦漢) 시기에 ‘양수’라 부르는 곳은 둘 있었다. 하나는 “양수는 농서(隴西)에서 나와 흐르다가 동쪽으로 무도(武都)에 이르러 한(汉)이 된다.”(『설문·수부』)고 하였는데 이 양수를 서한수(西漢水)라 부르며 가릉강(嘉陵江)에 이르러 장강(长江)으로 합류한다. 두 번째는 “번총(蕃冢)에서 양수가 일어나 동쪽으로 흐르면 한(汉)이 된다.”(『상서·우공』) [현재 번총산은 섬서 영강[寧强]현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 양수는 또 동한수(東漢水)로 때로는 면수(沔水)라 불렀다. 지금의 한수(漢水)로 역시 장강으로 흘러간다.

 

 

한족이 ‘漢’을 족칭으로 삼았다고 하더라도 한족 문화 중심이 고한국(古漢國)이나 한수 유역에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파촉(巴蜀)문화와 초(楚)문화가 현재 한문화의 중요한 양대 지류를 형성하는 고문화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한족의 문화 중심은 오랫동안 관중(關中) 평원과 황하 중하류의 중원이었다. 이를 중심으로 장강 유역, 주강 유역 및 동남 연해안의 각 지방의 문화가 융합돼 진한 이후 통일된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다고 봐야 옳다.

 

통일 제국을 이룬 진(秦)은 비록 짧았으나 그 영향은 대단했다. 양한(兩漢)시기에 북방과 서북 방면의 각 민족은 한나라 사람들을 ‘진인(秦人)’이라 불렀고 한나라 사람들은 스스로를 ‘(중)국인[(中)國人]’이라 불렀다. 당시 변방 각 민족도 한나라 군현의 사람들을 ‘한인(漢人)’이라 불렀으나 민족 개념은 아니었고 ‘한(漢) 왕조의 사람’이라는 뜻일 뿐이다. 그러나 한나라 때 이미 ‘호한(胡漢)’, ‘월한(越漢)’, ‘이한(夷漢)’ 등의 병칭이 보이는 것은 초보적이나마 민족적 개념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진(魏晉)에 이르러 중앙정권 통치 하의 한족들은 스스로 ‘(중)국인’, ‘진인(晉人)’이라 불렀으나 변방의 각 민족은 여전히 ‘한인’이라 불렀다. 이렇듯 그 당시 ‘한인’이라는 호칭은 어느 정도 민족 호칭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양진(兩晉)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들어오면 ‘漢人’은 민족 개념으로 정착되고 한족과 비한족이 모두 받아들이게 된다. 이와 동시에 이전에는 중앙 정권의 통치 아래에 있던 한족은 스스로 ‘(중)국인’이라 불렀지만 이 시기에 와서는 중원지역[한지역漢地域]에 거주하는 한족을 포함한 각 민족이 공유했다. 이는 동한(東漢) 이후 변방에 있던 각 민족들이 중원으로 이주하고 위진(魏晋)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와서는 각 민족이 융합했기 때문이다.

 

‘오호(五胡)’를 대표로 하는 중원으로 이주한 각 민족은 나름대로 각각의 왕조를 건립하여 ‘两京[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위주로 하는 황하 유역의 중심지역이 활동 무대가 됐다. 이후 서서히 한문화와 융화되면서 스스로 ‘중국 황제’라 부르며 진(晉) 왕실과 정통성을 겨루게 된다. 문화적 우월감을 표현하고 중심 지역이라는 지역적 개념을 가진 ‘中國’, ‘中國人’은 더 이상 중원 지역에 거주했던 이른바 한족의 전유물이 아니라 정권을 차지하는 ‘중심 왕조’라는 개념을 가지게 된다. 이렇듯 ‘중국’ 혹은 ‘중국인’이라는 명칭이 중원에 거주하면서 정권을 세운 각 민족들이 공유하게 됨으로써 통치민족이 된 비한족들이 한족과 구별하기 시작하면서 ‘漢’ 혹은 ‘漢人’이라는 용어가 전문적으로 한족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이때부터 ‘한’, ‘한족’은 중원에서 발원한 민족을 부르는 고유명사, 즉 정식적인 민족 개념을 가진 용어로 사용하게 된다.

 

당(唐)나라 때에는 소수민족을 부르는 말로 ‘번(蕃)’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한족과 병칭인 ‘번한(蕃漢)’이란 말이 생긴다. 오대(五代)에도 당나라에 이어 여전히 ‘번한’이란 명칭이 존재했고 송(宋)나라에서도 연용 했다. 원(元)대에 이르면 여러 민족들이 융합을 이루게 되고 먼저 중원으로 이주한 기존의 북방 소수민족들이 한족화가 이루어짐으로써 몽골과 대별하여 부르는 호칭으로 ‘漢人’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이렇듯 용어로써 ‘漢’은 최소한 중국에서는 민족분류학적 개념이 될 수 없다. 관중(關中)이나 한중(漢中)을 중심으로 황하문명을 이뤘던 기존의 중원 민족을 부르는 전용명사가 아니라 중원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여러 변방 민족들이 중원의 주역이 되고 기존의 진한(秦漢) 유민들과 융화되면서 성립된 문화인류학적 개념으로 봐야 옳다. 즉 현재 중국인들 중 ‘한족’은 ‘한어(漢語)를 사용하는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이라 해야 한다는 말도 어쩌면 틀린 말이 아닐 지도 모른다.

 

중국 역사를 되짚어 볼 때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민족 개념으로써의 중국 민족은 결코 중원(中原) 민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북방의 민족들이 대대적으로 중원으로 몰려들었고 중원의 민족들이 남천(南遷)하면서 여러 민족들 간에 혼혈 혹은 혼합돼 이루어진 민족 군체가 바로 중국이다.혈통적 개념으로 민족을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이다.

 

현재 한족이라 부르는 민족의 개념에는 북방민족의 피가 흐른다. 중국 역사상 대대적으로 중원으로 이주한 거대 민족으로는 흉노, 돌궐, 거란, 선비, 몽골, 여진 등이 있고 여타 다른 소수민족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중국 역사의 특징 중 하나가 ‘北族南遷(북족남천)’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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