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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46)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옥새(玉璽)는 진(秦)나라 이래로 황제의 도장을 가리킨다. 『독단(獨斷)』에 “진나라 이전에 백성들은 금옥으로 도장을 만들고 용과 호랑이로 손잡이는 만들었는데 좋아하는 바대로 했다. 그러나 진나라 이후 천자만이 도장을 만들어 새라 하였고 옥으로만 만들었다. 군신은 감히 쓰지 못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진시황이 6국을 병합한 후 스스로 공이 오제(五帝)에 이르고 덕이 삼황(三皇)에 버금간다고 생각해 더 이상 진왕(秦王)이라 부르지 못하게 하고 삼황오제를 합쳐 ‘황제(皇帝)’라 하고 스스로를 ‘짐(朕)’이라 불렀다. 황제의 독존의 지위를 표시하기 위해 진시황은 황제라는 칭호와 일치하는 명물(名物) 제도를 창립했다. 황제의 명령에 따르는 제도는 ‘제(制)’라 하고 신민에게 명하는 문서를 ‘령(令)’이라 했다. 그리고 황제만 사용하는 인장(印章)을 ‘새(璽)’라 규정했다. 이에 따라 진시황은 천하의 장인들에게 남전(藍田)산의 아름다운 옥으로 옥새를 만들라 명령했고 옥새의 손잡이에 용과 봉황을 새기도록 했다. 승상 이사(李斯)는 대전(大篆) 글씨체로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아 장수를 누리고 영원히 번창하리라[受命於天,旣壽永昌(수명어천,기수영창)]”의 여덟 글자를 옥새에 새겨 ‘나라를 전하는 옥새’라는 뜻으로 ‘전국새(傳國璽)’라 불렀다. 이로부터 ‘전국새’와 관련해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진다.

 

 

진시황은 6국을 통일 한 후 다섯 차례나 전국을 대규모로 순유(巡遊)한다. 순유할 때마다 아슬아슬한 일들이 발생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진시황이 처음 동정호(洞庭湖)를 순유할 때 풍랑이 크게 일어 갑자기 진시황이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할 뻔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진시황이 몸에 지니고 있던 옥새를 호수에 던지자 순식간에 바람이 사라지고 호수는 잔잔해졌다. 그러나 옥새는 깊은 호수바닥으로 가라앉아 찾을 길 없었다. 8년 후 진시황의 일행이 섬서(陝西)의 화음(華陰) 일대를 지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갑자기 어가를 막아서며 진시황의 시종에게 “이 옥새를 조룡(祖龍 : 진시황)에게 전해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옥새를 건네고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전국새’는 또다시 진시황의 수중에 들어오게 됐다.

 

진나라 말기 천하가 혼란에 빠졌을 때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이 군대를 이끌고 먼저 관중(關中)으로 들어서자 황제의 자리에 앉은 지 46일밖에 되지 않은 진왕 영(嬰)은 ‘전국새’를 유방에게 바쳤다. 그 후 유방은 백여 차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고 또 4년 동안 전쟁하여 서초패왕 항우를 물리친 후 한(漢) 왕조를 세웠다. 유방이 황위에 오를 때에 ‘전국새’를 품고 있었다. 서한(西漢) 때는 ‘전국새’를 장락(長樂)궁에 보관하여 황권의 상징으로 삼았다.

 

서한 말기 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이 조정을 농단하면서 황위를 찬탈하기 위해 앙양후(安陽侯) 왕순(王舜)에게 왕태후를 핍박해 ‘전국새’를 바치도록 했다. 왕태후는 유 씨 강산이 왕망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옥새를 내동댕이치자 옥새 손잡이에 새겨진 용의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 왕망은 모서리가 떨어진 ‘전국새’를 받아들고 천명을 결코 위반할 수 없어 받아들이는 것처럼 위장하여 스스로 꿈에도 그리던 황위에 올랐다. 그리고 장인에게 금으로 떨어져 나간 옥새 부위를 수리하도록 했다. 왕망이 황위에 올라 얼마 되지 않아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농민군은 즉시 유현(劉玄)을 황제로 옹립하고 도성인 장안을 공격했다. 왕망은 대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알고 ‘전국새’를 가지고 황급히 도망쳤다. 도망가는 도중에 사인 두오(杜吳)에게 척살 당한다. 황군 교위(校尉) 공빈(公賓)은 왕망의 머리를 자르고 왕망의 품에서 ‘전국새’를 찾아내 그의 상사인 이송(李松)에게 바치자 이송은 옥새를 황제에게 바치려 했다. 그때 다른 농민군인 적미군(赤眉軍)도 장안에 들어와 목동이었던 유분자(劉盆子)를 황제로 옹립했다. 유현은 적미군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옥새를 바치고 투항했다. 후에 유분자는 옥새를 유수(劉秀)에게 바쳤고 유수는 ‘전국새’를 가지고 황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옥새는 동한(東漢) 황제의 수중에서 대대로 전해지게 됐다.

 

동한 말년 동탁(董卓)이 반란을 일으키자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원소(袁紹), 원술(袁術)이 동탁을 토벌한다는 미명아래 군사를 동원하자 낙양(洛陽)은 혼란에 빠지고 동탁은 성을 버리고 장안(長安)으로 도망쳤다. 손견(孫堅)이 군사를 이끌고 낙양성 남쪽 남궁전(南宮殿)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궁전 안 우물에서 오채의 빛이 나는 것을 발견하고 기이하게 여겨 부하에게 우물에 내려가 건져 오게 했다. 뜻밖에 한 여인의 시체가 나왔다. 여인의 목에는 비단 주머니를 두르고 있었다. 주머니를 열자 금 열쇄로 잠긴 붉은 상자가 나왔다. 상자를 열어보니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옥새가 있는 것이 아닌가. 손견은 그것이 바로 진시황의 ‘전국새’라는 것을 알고는 이는 그에게 황위에 앉으라는 하늘의 뜻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고 몰래 기뻐했다. 그러나 손견의 군사 중에 원소와 동향인이 있었다. 그는 옥새의 소식을 원소에게 알렸다. 원소 또한 황제 자리에 앉으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전국새’를 탈취하려고 사람을 시켜 손견의 부인을 구금시켰다. 손견은 어쩔 수 없이 옥새를 내주었다. 후에 원 씨 형제는 조조(曹操)에게 패하고 ‘전국새’는 또다시 한(漢) 헌제(獻帝)에게 돌아가게 됐다.

 

 

동한이 멸망한 후 ‘전국새’는 위(魏)나라에 그리고 서진(西晉)에 귀속 됐다. 그 후 북방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으로 분열돼 동탕의 국면으로 빠져들었는데 ‘전국새’는 돌고 돌다 동진(東晋) 정서장군 사향(謝向)의 손에 들어오자 사향은 동진의 조정에 바쳤다. 남조(南朝) 양(梁) 무제(武帝) 때 항장 후경(侯景)이 반란을 일으켜 궁성에 들어와 ‘전국새’를 탈취했으나 오래지 않아 후경이 죽자 그의 부장 우자감(侯子監)은 옥새를 서하사(栖霞寺)의 우물 속에 던져 넣었다. 스님이 옥새를 건져 내 보관하다가 그의 제자가 옥새를 진(陳) 무제(武帝)에게 바쳤다.

 

수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 ‘전국새’는 수나라 황제의 소유가 됐다. 수당(隋唐) 대에 ‘전국새’는 통치자들에 의해 지보(至寶)로 받들어 졌다. 주온(朱溫)이 당을 멸망시킨 후 ‘전국새’는 또다시 액운을 만난다. 후당(後唐) 폐제(廢帝)는 거란에 패해 종루에 올라 분신했는데 옥새도 함께 불에 탄 후 종적이 묘연해 졌다. 북송(北宋) 철종(哲宗) 때 단의(段義)라는 이름을 가진 함양(咸陽) 사람이 옥새를 조정에 바쳤다. 여진의 금(金)나라 군대가 남침할 때 옥새를 탈취해 갔고 나중에는 몽골의 원(元)나라 황제의 소유가 됐다. 명(明)나라가 원나라를 멸망시킬 때 몽골인들이 옥새를 몽골로 가져갔다. 이때부터 ‘전국새’는 행방불명돼 버렸다.

 

“보물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보물을 잃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전국새’는 중국 역대 통치자들이 나라를 지키는 보물로 생각했기 때문에 뺏고 뺏기는 운명을 그대로 간직한 저주의 물건이 됐다. 조그마한 옥새에 역대 왕조의 흥망성쇠의 흔적이 그대로 남겨져 있다. 영물숭배의 흔적이며 운명론의 중심에 서 있던 ‘전국새’, 역대 왕조의 어리석음이 그대로 투영돼 있다. 그래서 일까, 아직도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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