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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38)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영정(嬴政 : 기원전 259-210), 진 장양왕(莊襄王)의 아들로 13세 때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에 한(韓), 초(楚), 연(燕), 위(魏), 조(趙), 제(齊)를 병합하고 통일을 이뤄 시황제(始皇帝)라 불린다. 진시황은 분봉을 폐하고 군현을 설치했으며 문자, 율령, 도량형 등을 통일하였다. 기원전 210년 순시 중 죽었다.

 

 

사마천의 『사기․진시황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진시황제는 진나라 장양왕의 아들이다. 장양왕은 진을 위해 자식을 조나라에 인질로 보냈는데 여불위(呂不韋)의 여자를 보고 기뻐하며 취하여 시황제를 낳았다. 진나라 소왕 48년 정월 한단(邯單)에서 태어났는데 이름을 정이라 했고 성은 조 씨였다.” 여기에서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기․여불위열전』에 보면 진시황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노출한다. “여불위는 한단 시내에 많은 첩을 두고 있었다. 그 중 절세미인이며 춤을 잘 추는 여자와 살고 있었는데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 자초(子楚)는 여불위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녀를 보고 마음에 들어 여불위에게 축원하면서 그녀를 달라고 하였다. 여불위는 화가 났으나 이미 자초를 위해 가산을 탕진하면서 큰 재화를 얻으려는 계략을 상기하며 그 첩을 바쳤다. 그녀는 임신한 몸을 숨기고 자초와 살며 만삭이 되어 아들 정(政)을 낳았다. 자초는 마침내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원래 진시황 정(政)의 부친은 진나라의 공자 자초(子楚)였다. 이름은 이인(異人)으로 진 소왕(昭王)의 손자다. 2년 전 진나라와 조나라가 장평(長平)에서 전투를 치렀는데 조나라가 참패하였다. 진 소왕은 장평대전의 승리를 틈타 조나라 도읍 한단(邯鄲)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고 조나라와 일시 타협을 하였다. 전국시대에 제후국 간에 결맹을 맺을 때에는 인질을 파견해야 했다. 관례대로 진 소왕은 손자 이인(異人)을 인질로 삼아 한단으로 보냈다.

 

인질은 무척 위험하다. 귀국할 수 있을 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일단 쌍방 간에 전쟁이 벌어지면 예기치 못한 재앙을 먼저 당하는 이가 인질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인질로 가는 왕자나 왕손은 자신의 국가에 그리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그런 위험에 빠진 왕손이 타국에서 편안한 생활을 할 리 만무했다. 그러나 예외인 경우도 있었다. 이인이 그렇다. 그는 기적적으로 당시 큰 상인이었던 여불위(呂不韋 : ?-기원전 235년)를 만나 운명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여불위는 원대한 꿈을 가진 상인이었다. 그는 이인이 차후에 출세할 인재라고 보고 그에게 투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500근이나 되는 황금을 선물로 보냈다. 처음에는 이인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받지 않았다. 여불위는 명쾌하게 이인의 집안을 먼저 빛나게 하고 나서 여 씨의 가문을 빛나도록 도와달라고 얘기하였다.

 

 

이인은 생각하였다. “지금 소왕이 이미 늙었으니 내 부친 안국군(安國君)이 관례에 따라 군왕으로 즉위할 것이지만 그에게는 20여 명의 아들들이 있는데 누가 군왕이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 자신이 장자도 아니요 진나라에 있지도 않으니 장래에 군왕으로 즉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몸 하나 보존하기만 해도 나쁘지 않다.” 이렇듯 자초는 군왕의 지위에 대해 어떤 바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여불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런 조건도 없다. 우리가 상황을 만들면 되지 않는가? 군왕이 되는 것은 장사하는 것과 같다. 얼마나 많은 자본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짧은 시간 내에 얼마나 많이 이익을 남기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알려주는 방법대로 한다면 군왕의 보좌에 오를 수 있다.” 그렇게 이인을 믿게 만든다.

 

자초(子楚)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흔쾌히 황금을 받아들였다. 여불위의 묘계는 바로 이인의 부친의 총애를 받는 왕후 화양부인(華陽夫人)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그녀의 도움만 있으면 군왕의 보좌에 오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화양부인은 미모와 재주가 출중하였으나 그녀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녀의 마음만 얻을 수 있다면 이인도 군왕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단에서 인질의 삶을 살던 이인은 여불위의 지도를 받는다. 조나라에서 재물로 여러 부류와 광범위하게 교류를 하고 명망을 얻게 되면서 그의 이름이 진나라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때마침 여불위는 진나라에 잠입하여 이인의 이름으로 화양부인에게 선물을 보내 양아들로 삼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화양부인은 과연 여불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화양부인은 진왕의 면전에서 이인을 계속 칭찬하고 나중에는 여불위의 의도에 따라 이인을 태자로 삼기를 요청하였다. 끝내 이인은 인질에서 일약 진나라의 왕세자가 되고 마침내 진 장양공(莊襄公)에 올랐다. 총칼을 동원하지도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여불위의 묘책에 따라 하나하나 이루어졌던 것이다. 상인인 여불위의 귀계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만들었다.

 

이인의 집안을 빛나게 한 후 여불위 자신의 집안을 밝힐 시기가 도래하였다. 이인은 당시에 했던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 여불위를 재상에 앉혀 전 조정과 재야에 권력을 행사하게 하였다. 장양왕은 기쁜 나머지 자신의 아들이라 여긴 영정이 여불위의 사생아라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다. 길이 남을 자신의 자리를 여불위의 아들에게 순순히 넘겨주게 된 것이었으니. 무슨 말인가?

 

이인이 여불위와 맹약을 맺을 때 여불위는 자신이 총애하는 조희(趙姬)로 하여금 이인을 유혹하게 하였다. 이인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미혹돼 여불위에게 자신에게 주라고 요청하였다. 여불위가 바랐던 바였다. 후에 조희는 영정을 낳았다. 생각지도 않게 아들까지 얻었으니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보배 같은 아들이 자신의 혈육이 아니라 친부가 따로 있었음이니, 바로 정치적 상인인 여불위가 그였다. 여불위의 정치적 ‘통찰력’은 이렇듯 깊고도 깊었다.

 

『사기』에 기록된 관점은 영정은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진시황의 이런 출생의 비밀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 반고(班固)도 진시황은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여 그런 관점을 『한서』에 기록하고 있다. 영정을 여정(呂政)이라 부르자 더 많은 사람들이 믿고 의심치 않게 되었다. 나중에 남조의 송나라 배사(裵駟)는 『사기집해』에서 그런 관점에 찬동을 하여 “여정은 시황으로 이름은 정이다. 여불위가 총애하는 비가 임신을 하자 장양왕에게 바쳐 시황을 낳게 하였기에 여정이라 부르는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이후 많은 역사가들이 이런 전기적인 이야기를 재삼재사 기술하였다. 그래서 진시황이 여불위의 사생아라는 관점은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는 진실이 돼 버렸다.

 

 

진시황이 여불위의 핏줄이라는 이런 관점에 대해 의심을 품은 사람들은 있었으나 공개적으로 진시황을 위해 대변해 준 사람은 많지 않다. 명대 사학자 탕빙윤(湯聘尹)이 그나마 직접적으로 얘기한 사람이다. 『사패(史稗)』에서 진시황이 사생아라는 기록은 ‘전국시대 호사가들의 지어낸 것’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이고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하였다. 이외에 명대 왕세정(王世貞)도 「여불위열전」의 기록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음모가인 여불위가 고의로 지어낸 이야기로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높이기 위해 퍼뜨렸다고 분석하였다. 여불위의 문객이나 진나라에 멸망당한 6국의 유민들이 입을 통해 진시황이 사생아라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자신의 울분을 터뜨린 것이라 보았다.

 

인륜으로 본다면 「여불위열전」의 기록은 사실 재고해 볼 여지가 있다. 기록을 보면 조희가 회임을 한 후 “지대기생자정[至大期生子政]”라 돼 있다. ‘대기(大期)’가 되자 아들 정을 낳았다는 뜻인데 여기서 ‘대기’란 어떤 기간을 말하고 있을까? 동진의 서광(徐光)은 대략 12개월로 보았고 삼국시대 초나라 사람 초주(譙周)는 10개월로 보았다. 조희가 여불위의 아이를 가졌다면 이인의 여자가 되고서 10여 개월 후에 영정을 낳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분명 일반적인 출산일과 맞지 않는다. 그리고 조희가 임신을 하였다면 40여 일에서 2,3 개월이 지나서야 임신 여부를 알 수 있었을 텐데 자초의 아내가 된 후 10개월 이내에 분만을 했어야 맞는 것이고 어떻게든지 더 연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 아니던가. 이렇게 계산한다면 영정은 자초의 아들일 수밖에 없고 여불위의 혈육이 될 수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조희가 이인의 아내가 된 후 10개월 후에 영정을 낳았을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 여불위와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하기도 한다. 여불위가 조희를 자초에게 주었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 사통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10여 개월의 시간 속에서 여불위는 자신의 계략을 충분히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는 말이다. 조희가 임신한 것이 아들이든 딸이든 여불위는 손해 볼 게 없었다는 것.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기회를 보던 상인이라면 큰 이익을 거저먹을 수 있는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을 것이라 본다.

 

이외에도 『사기』에는 간접적으로 이런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진시황이 어렸을 때 태후는 자주 여불위와 사통하였다……시황제가 성장하였지만 태후의 음탕은 그치지 않았다. 여불위는 발각돼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몰래 음경이 큰 노애(嫪毐)를 사인으로 삼게 하였다.” 영정은 13세 때 즉위하였기 때문에 모든 정사는 여불위가 처리하였다. 영정은 여불위를 ‘중부(仲父)’라 불렀다. 조희는 태후가 된 후에도 여전히 여불위와 사통하였다. 영정이 성장하였지만 태후는 자주 여불위를 궁으로 불렀다. 여불위는 사통이 발각되면 화가 미칠 것을 걱정하여 몰래 음경이 큰 노애로 하여금 시종으로 삼게 하여 태후를 유혹하도록 하였다. 마침내 태후는 그의 농간에 놀아나게 되었다.

 

여불위는 또 사람을 시켜 노애를 고발하게 하고 법에 따라 궁형(宮刑)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러면서도 태후로 하여금 궁형을 담당하는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 거짓으로 노애를 궁형에 처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태감으로 삼아 태후를 시봉하게 하였다. 태후는 몰래 노애와 사통을 하다가 임신을 하자 남의 눈을 속이기 위해 점을 쳐보니 액운을 피해야 한다고 거짓으로 꾸민 후 옹성(雍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노애도 함께 따라갔고 태후는 늘 그와 정사를 논하면서 후한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노애는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한번은 궁에서 시중들과 술을 마신 후 대취하여 “나는 진왕의 계부다. 너희들이 감히 나와 다툴 수 있는가!”라고 외치자 진왕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진왕은 진상을 조사케 하였다. 노애가 환관도 아니며 태후와 사통을 하였고 두 명의 아들을 뒀으며 진왕이 죽으면 그 아들로 하여금 왕위에 앉히려고 계획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사건은 여불위에게도 파급되었다. 노애는 들통 나자 진왕의 옥새와 태후의 옥새를 위조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진왕이 알고 상국(相國)에게 명령을 내려 노애를 에워싸니 노애는 도망을 쳤다. 진왕은 전국에 노애를 살려서 잡아오면 백만금을 내릴 것이요 죽이면 50만을 내릴 것이라는 수배를 내렸다. 결국 노애가 잡혀오자 진왕은 노애를 거열(車裂)하여 대중들에게 본보기로 삼게 하였다. 3족을 주멸하였으며 태후가 낳은 두 아들도 함께 피살 되었다.

 

진왕은 원래 여불위를 주살한 준비를 하였으나 부왕을 도운 공로가 크니 상국의 직위를 파면하고 봉국(封國) 하남(河南)으로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1년 후 제후 빈객들이 여불위를 사면할 것을 청하자 진왕은 여불위가 난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 편지를 보냈다. “그대는 진나라에 무슨 공로가 있는가? 무엇을 근거로 하남에 봉하여 10만 호의 식읍을 향유하는가? 그대와 진왕은 무슨 친척 관계가 있어 그대를 중부라 불러야 하는가? 그대 집안을 촉나라로 옮겨 가시게!” 여불위는 진왕이 자신을 점차 중하게 처벌하다가 결국은 죽일 것이라 염려하여 독주를 마시고 자살하였다.

 

진시황은 정말 여불위의 사생아였을까? 사실 진시황이 사생아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진시황이 여불위의 핏줄이었는지 아닌지는 역사가들의 사담으로 남겨 둬도 된다. 진시황이 중국 역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풍운아였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지 않는가. 자신이 선택하여 태어나는 것이 아님에, 태어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중요할 뿐. 야합한 공자도 사생아라는 진시황도 자신의 출신을 선택할 수 없지 않던가. 출신성분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이제 과거의 신분제의 악폐에서 기인한, 탈피해야할 악습임에랴.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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