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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37)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화씨벽(和氏璧)은 아름다운 옥이라고 『한비자․화씨』에 기록돼 있다. 그 벽의 이야기는 곡절이 많고 복잡하여 연루돼 있는 유명인들이 많다. 『사기․염파린상여열전』에서 그 옥을 ‘천하가 공인하는 보배’라고 칭송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인상여(藺相如)의 ‘완벽귀조(完璧歸趙)’의 이야기는 천고에 전해 내려오는 아름다운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옥벽(玉璧)은 전국시대 제후국들이 국가를 안정시킬 수 있는 보물이라고 여겼고 ‘여러 성과 바꿀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천하가 공인하는 보배’로 받들었다. 각 제후국은 옥벽을 자신들이 가지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 빼앗으려고 하면서 전국시대 흥미로운 역사극이 벌어진다. 마지막에 그 진귀한 옥이 누구의 손에 들어갔는지가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 진귀한 옥의 유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춘추시대 초(楚)나라에 변화(卞和)라는 사람이 우연히 산 아래에서 평범하게 보이는 옥돌을 발견하였다. 군주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나타내기 위해 옥돌을 초나라 여왕(勵王)에게 바쳤다. 천연의 옥돌은 다듬지 않으면 겉으로는 일반 돌과 구별을 할 수 없다. 초나라 여왕은 석공을 불러 감정하도록 했다. 옥공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보통의 돌이라고 하였다. 여왕은 변화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고 화를 내며 변화의 왼쪽 다리를 자르고 쫓아내 버렸다.

 

초 여왕이 죽고 무왕(武王)이 즉위하자 변화는 초나라로 돌아와 그 옥돌을 또 무왕에게 바쳤다. 옥공이 또다시 일반 돌이라고 감정을 하자 무왕도 군왕을 속인 죄를 물어 변화의 오른쪽 다리를 잘라 버렸다.

 

몇 십 년이 지나고 무왕의 아들 문왕이 즉위하였다. 이때 변화는 옥돌을 문왕에게 바치려 하였으나 자신이 이미 꺼져가는 촛불과 같은 늙은이가 되었고 두 다리마저 잘린 상태라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자신의 바람이 실현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는 옥돌을 품고 산 아래에서 눈물이 말라 피눈물이 날 때까지 삼일 밤낮을 울었다. 초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파견하여 “하늘 아래 다리가 없는 사람이 그리도 많은데 어찌하여 당신은 그리도 슬피 우는가?”라고 물었다. 변화가 “나는 결코 두 다리를 잘렸다고 우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보배로운 옥인데도 불구하고 그냥 돌이라고 잘못 알려졌기에 우는 것입니다. 충성스런 사람이 임금을 속인 불충한 자로 매도당했습니다. 나는 왕을 위해 우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이 뒤바뀌고 흑백을 가리지 못하잖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문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변화를 궁전으로 데리고 가서 옥공에게 옥돌을 가르라 하니 과연 하자가 하나도 없는 아름다운 옥이 나왔다. 변화의 충심을 기리기 위해 문왕은 그 옥을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 이름 짓고 국보로 삼아 소중히 간직하였다.

 

 

‘화씨벽’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모든 제후국들에게 알려 졌다. 군왕들은 직접 그 보물을 보고 싶어 했다. 기원전 333년 초나라는 월(越)나라를 병합하고 초 위왕(威王)은 월나라를 멸하였는데 공이 많은 상국(相國) 소양(昭陽)에게 화씨지벽을 하사했다. 그때 화씨지벽이 사라졌다. 국보가 갑자기 없어지자 조정이 놀라 보옥을 찾아 나섰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투항한 장의(張儀)에게 돌렸다. 마침 장의는 초나라에서 유세를 하고 있었고 소양과 같이 술을 마셨었다. 장의가 그 틈을 이용하여 옥을 훔쳤을 것이라 의심하였던 것이다. 초나라 사람들은 장의를 잡아다 고문하였다. 장의가 끝내 시인하지 않자 초나라 사람들은 장의를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모욕을 당한 장의는 진(秦)나라에 투항한 후 나중에 재상이 돼 큰 공을 세운다. 초나라는 국보를 찾기 위해 인재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사라지고 몇 십 년이 흐른 뒤 화씨지벽이 갑자기 조(趙)나라에 출현하였다. 어떻게 조나라로 흘러들어갔는지 이 또한 역사의 수수께끼다. 조 혜문왕(惠文王) 때 환관 묘현(繆賢)이 옥을 사들였다. 옥공의 감정을 거쳐 오래전에 실종된 화씨지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나라 왕이 듣고 그 보옥을 빼앗았다. 조나라가 화씨벽을 얻었다는 소식이 진나라 소왕(昭王)에게 전해지자 진 소왕은 희귀한 보물을 손에 넣을 심산으로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 15개의 성(城)과 바꾸자고 제안하였다. 조나라는 진나라가 힘을 앞세워 강제로 빼앗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나라가 강국이라 거절을 하면 멸망의 재앙이 닥칠 것을 걱정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인상여(藺相如)가 나섰다. 그는 아무 탈 없이 옥을 가지고 돌아오겠다고 하며 진나라로 떠났다.

 

 

진나라에 도착한 인상여는 화씨벽을 진왕에게 바쳤다. 진왕은 옥벽을 보자 과연 명불허전이라 무척 기뻐하며 좌우의 후궁들과 대신들에게 보여주자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인상여는 진왕이 조나라에 약속한 성들을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왕의 앞으로 가면서 “옥에 하자가 좀 있습니다. 제가 대왕께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왕이 인상여에게 옥을 건네자 인상여는 옥을 들고 “대왕께서는 이 옥을 얻고자 조왕에게 사신을 파견하였습니다. 조왕이 여러 신하들을 소집하여 상의하니 군신들은 진나라가 세력으로 깔보는 것으로 생각하여 15개의 성과 옥을 바꾸자는 것은 거짓일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저는 백성들 사이에도 결코 기만이란 있을 수 없거늘 진나라와 같은 큰 나라가 어찌 기만하겠습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옥 하나를 가지고 진나라에 죄를 짓는 것도 가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조왕은 제 건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진나라에 존중을 표시하는 뜻으로 조왕이 5일 동안 재계한 후에야 제게 옥을 주면서 왕께 바치라 하였습니다. 제가 보니 대왕께서는 성과 옥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으십니다. 저는 이 옥을 가지고 돌아가겠습니다. 대왕께서 제게 억지로 옥을 바치라 하신다면 이 옥과 제 머리를 이 기둥에 내리쳐 산산조각을 내버리겠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인상여는 말을 끝내자마자 옥을 높이 지켜들고 기둥에 내리치는 시늉을 하였다. 진나라 왕은 옥이 부서질 것을 염려하여 연거푸 사과하면서 지도를 가지고 오라고 하여 조나라에 15개의 성을 할양하겠다고 하였다. 인상여는 그것도 진왕의 시간을 벌기 위한 계책임을 알아채고 진왕에게 “조왕이 5일을 재계하고 나서야 제게 이 옥을 대왕께 바치라고 했습니다. 대왕께서도 5일을 재계하고 구빈(九賓)의 예를 행하시면 제가 이 옥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진왕은 강제로 뺏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어쩔 수 없이 동의를 하였다. 인상여는 진왕이 재계를 하겠다고 대답은 하였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면 분명 조나라에 성을 할양할 뜻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부하에게 변장을 시키고 옥을 가지고 그 날 밤으로 조나라로 도망가게 하였다.

 

5일 후 진왕은 궁정에 구빈의 예를 설치하고 인상여를 불렀다. 인상여는 입궁 후 진왕에게 “진나라는 무공(繆公)이래 20여 군주가 계셨는데 약속을 지킨 분이 하나 없습니다. 저는 왕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아 조왕이 내게 내린 중임을 다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옥을 조나라로 보내 버렸습니다. 진나라는 강성하고 조나라는 약소한데 대왕께서 먼저 15개의 성을 조나라에 할양하신다면 조나라가 어찌 옥벽을 대왕께 바치지 않고 죄를 짓겠습니까? 군주를 기만한 죄는 당연히 주살돼야 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솥에 삶는다한 들 어찌 피하겠나이까.”라고 말했다. 진왕과 대신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인상여를 구금하고 조나라를 치자고 건의하는 대신도 있었지만 진왕은 인상여를 죽여본들 옥을 얻을 수도 없고 양국의 관계가 악화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인상여를 후하게 대접하고 자신은 명군이란 명예를 얻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진왕은 궁정에서 융숭한 예로 인상여를 대접한 후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이것이 중국 역사상 ‘완벽귀조(完璧歸趙)’의 고사다. 인상여는 자신의 용기와 지혜로 화씨벽을 지켜냈던 것이다.

 

기원전 228년 진나라 대군이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 유왕(幽王)은 투항하였고 화씨벽도 바쳤다. 진왕 영정(嬴政)은 6국을 병합하여 강대한 진나라를 세웠고 화씨벽도 마침내 진나라의 보물창고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화씨벽은 역사에서 완벽히 사라져 버렸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화씨벽으로 전국옥새(傳國玉璽)를 만들어 대대로 전했다고 한다. 옥새를 만들기 위해 잘라낸 옥으로 만든 옥결(玉玦)을 찾아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역사 사료에 진나라 옥새는 남전옥(藍田玉)으로 제작됐다고 상세히 기록돼 있다. 따라서 화씨벽으로 전국옥새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화씨벽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지금까지 두 가지 추측이 있다. 하나는 화씨벽이 부장품으로 진시황릉에 매장됐을 것이라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장래에 진시황릉의 지하 황궁을 발굴하면 화씨벽의 풍모를 일견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항우(項羽)가 함양(咸陽)에 들어와서 진의 궁전을 불사르고 진시황릉을 파헤쳐 보물과 미인을 강탈하였는데 화씨벽도 그 속에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뒤이어 벌어진 초한쟁패(楚漢爭覇) 후 항우가 패하자 화씨벽도 행방불명이 돼 버렸다. 항우의 도성이었던 팽성(彭城 : 현 강소성 서주[徐州])에 있다거나 항우가 죽은 해하(垓下 : 현 안휘성 영벽[靈璧])에 숨겨져 있다고 하기도 한다.

 

화씨벽은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무가지보(無價之寶)다. 몇 백 년을 흐르면서 여러 사람들의 운명과 여러 국가들의 명운과 같이 하였다. 신비로우면서 역사를 대변했던 옥이 또한 신비롭게 사라져 버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된 것, 중국 2천년의 역사 속의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되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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