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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32)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굴원(屈原 : 기원전 약 340 - 278), 이름은 平(평), 자는 原(원), 전국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시인으로 유명하다. 초나라 회왕(懷王)을 보좌하여 삼려대부(三閭大夫)에 올랐다. 학식이 뛰어나고 창명법도(彰明法度)의 정치 주장을 하였으나 나중에 파직을 당해 원상(沅湘) 일대로 유배당했다. 현실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멱라(汨羅)강에 몸을 던졌다. 그가 썼다는 『이소(離騷)』『구장(九章)』등의 저작은 언어가 아름답고 낭만적인 정서가 풍부하여 이천 여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이 낭송하고 있다.

 

2200년 전 중국인들이 위대한 애국시인이라 불리는 굴원(屈原)이 우국우민의 설움에 북받치는 마음으로 파도가 출렁이는 멱라(汨羅)강에 몸을 던져 굽힐 줄 모르는 의지, 재능이 넘쳐났던 일생을 마감하였다. 오랫동안 그의 죽음을 중국인들은 애석하게 여기고 애도하였다. 사람들은 그렇게 위대한 시인이 왜 스스로 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는지 이제까지 묻고 있다.

 

 

이에 대해 청나라 초기 사상가인 왕부지(王夫之)는 나름대로 해석을 내놓았다. 굴원의 죽음은 그의 작품 『애영(哀郢)』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영도를 떠나 고향 문을 나설 때 마음이 공허하고 멍청해져 정신이 없고 지금 떠나는 유랑길이 어디만큼 가야 끝날지 모르겠다.” “진정 내 죄가 아니었는데도 버림을 받고 쫓겨나 밤이나 낮이나 어느 하루도 고향 영도를 잊을 수 없다.” “임금이 어둡고 무능하여 나라가 황폐해 간다.” 이런 와중에 초나라의 경양(頃襄)왕은 진나라의 침입을 힘써 막으려 하지 않아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초나라의 도성을 공격하려는 것을 보면서 굴원은 실망하여 강에 몸을 던졌다고 하였다. 이런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가 있어 현대의 굴원 연구가들이 채용하고 있다.

 

곽말약(郭末若)이 대표로 그는 『굴원연구』에서 영도(郢都)가 함락될 때 굴원은 강남으로 피했고 강남도 머물 곳이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섭강(涉江)」「회사(懷沙)」「석왕일(惜往日)」등을 짓고는 끝내 스스로 강에 몸을 던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굴원고』에서는 영도가 함락된 그 해 굴원은 「애영」을 썼다. 그는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이 떠도는 것을 볼 수가 없어 비분강개한 마음에 자살을 하였다고도 했다. 그는 굴원의 자살은 확실히 국난을 당해 ‘순국(殉國)’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도 있다. 『사기․굴원열전』과 「애영」의 사료들을 근거로 삼는다. 굴원이 「애영」을 쓴 것은 경양왕 14년(기원전 285년)이고 굴원이 강에 몸을 던진 것은 경양왕 16년이나 17년으로 기원전 283년 혹은 282년이다. 『사기』에 따르면 경양왕 19년(기원전 280년)에 백기가 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3년이 되는 해(기원전 287년)에 영도가 함락된다. 따라서 굴원이 「애영」을 썼다는 시기와 멱라강에 몸을 던진 시기는 백기가 초나라를 멸망시킨 것보다 앞선다. 시간을 추론해보면 굴원이 국난을 당해 자살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즉 ‘순국’이란 허구라는 것이다.

 

 

이외에 「애영」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시인은 문장에서 자신의 비애를 읊고 있다. 자신이 무고하게 쫓겨났으며 나날이 영도와는 멀어지고 임금을 다시를 뵙지 못하는 상태에 놓였고 사람들이 향락에 빠져 재앙이 임박했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슬퍼하고 있다. 「애영」은 사실이 굴원이 나라에서 쫓겨나 영도를 돌아보면서 ‘망해가는 것을 슬퍼하는[將亡而哀之]’ 내용이다. 그래서 굴원이 이 시를 쓴 것과 영도의 함락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굴원이 강에 몸을 던지기 전에 절명시(絶命詩) 「회사」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시의 내용을 보면 국가가 망하는 것을 슬퍼하여 순국을 결심한 마음을 찾아볼 수 없다. 한번 상상해 보자. 만약 굴원이 순국했다면 정직하다는 사관들이 똑똑히 기록하여 그 뜻을 표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의(賈宜)가 「조굴원부」, 사마천(司馬遷)이 『사기․굴원열전』, 그리고 시대가 약간 뒤진 당나라 때 심아지(沈亞之)가 『굴원외전』을 쓰면서 굴원에 대해 깊은 동정을 하고 있지만 굴원이 국난을 당해 순국했다는 내용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그렇다면 굴원은 왜 멱라강에 몸을 던졌을까?

 

굴원이 장기간 추방당하여 다시는 중용될 수 없음을 비관하여 절망적인 심정 때문에 자살했다고 본다. 굴원은 관직에 있을 때 제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줄곧 주장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경양왕은 부왕(회왕[懷王])이 계략에 속아 진나라로 갔다가 죽임을 당한 치욕도 잊고 강토가 유린되고 있음도 모른 채 진나라와 선린 관계에 있다고 여겨 향락에 빠져 국가대사를 돌보지 않고 있었다. 초나라가 망국의 대재앙을 맞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소인배들의 아첨을 믿는 군왕을 되돌릴 방법이 없고 보국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상태에서 또다시 추방을 당하니 만년에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굴원이 「회사」에서 초나라 혼군(昏君)을 책망하고 「왕석일」에서는

 

寧溘死而流亡兮(영합사이류망혜) : 차라리 나는 죽어 떠돌지 않으리니
恐禍殃之有再(공화앙지유재) : 재앙이 거듭될까 두려워라.
不畢辭而赴淵兮(불필사이부연혜) :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연못에 이르니
惜庸君之不識(석용군지불식) : 어리석은 군주가 깨닫지 못함이 안타깝도다.

 

라고 읊고 있다. 무능한 용군을 죽음으로 일깨우기 위해 선택한 최후의 방법이 절명(絶命)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국(憂國)은 맞을까? 거듭되는 재앙은 어쩌면 ‘쫓겨나는 것’일 뿐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어쨌든 순국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애국시인’이란 말은 지나친 찬양인 셈이다.

 

 

약간 사족을 달아보자.

 

굴원의 작품 중에서 문학성이 가장 뛰어난 낭만주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이 「이소(離騷)」다. 373구 2490자로 구성되어 있는 고대 중국의 시가 중에서도 가장 긴 서정시다.

‘이소’의 ‘이(離)’는 ‘만나다, 멀리 떨어지다’는 뜻이고 ‘소(騷)’는 ‘불만, 울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굴원은 이 시에서 조국에 대한 사랑, 이상에 대한 추구, 부패한 현실에 대한 비판, 사악한 무리에 대한 원한을 표현함으로써 시인의 인격과 진리를 견지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 받는다.

그런데 「이소」를 포함하는 초사(楚辭)가 뛰어난 문학적 성취와 후세에 미친 영향이 지대함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점에서 전국시대의 문학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첫째, 『사기』의 「굴원가생열전」과 유향(劉向)의 『신서(新序)』「절사편(節士篇)」에 실려 있는 굴원의 전기가 서로 모순되고 사실(史實)과 맞지 않는 등 문제가 있다.

둘째, 전국시대란 방황하는 사람이 그처럼 엄청난 개인적인 글을 쓸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었고 한대 이전에는 초사나 굴원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전국시대 중엽에 굴원과 송옥(宋玉)의 작품 같은 뛰어난 문장이 있었다면 그보다 분명히 뒤에 나왔고 부(賦)까지 지은 순자를 비롯하여 『한비자(韓非子)』『전국책(戰國策)』『여씨춘추(呂氏春秋)』등에 그들의 문학에 관한 얘기가 없다는 것은 이상하다.

셋째, 초사는 한대에 와서 유행했던 것이고 문체상 한부(漢賦)와 비슷하다.

넷째, 굴원의 존재를 부정한 학자도 나왔다. 굴원이 실제 인물이라 할지라도 기원전 300년을 전후하여 굴원에 의해 초사라는 작품이 나왔으나 그 후 100여 년 동안 영향을 주지 못하다가 한대에 와서 그러한 형식의 문학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 그것이다.

청대 말기 요평(廖平)은 『초사강의(楚辭講義)』에서 가장 먼저 굴원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하천행(何天行)은 『초사작어한대고(楚辭作於漢代考)』에서 굴원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이소」는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지은 유선시(遊仙詩)이고 그 밖의 작품들도 모두 한대에 이루어진 것임을 고증하였다. 그 뒤로 위취현(衛聚賢), 정적호(丁迪豪), 주동윤(朱東潤) 등이 하천행의 설에 동조하였다. 이들의 고증은 상당한 근거가 있으나 그렇다고 굴원이 가설적인 인물임을 확실히 증명했다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설사 굴원이 전국시대에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전국시대의 문학으로서는 문학사상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는 것이므로 한대의 문학으로 ‘한부’ 또는 ‘사부(辭賦)’ 속에 초사를 포함시켜 논하는 게 올바른 문학사의 방법”이며 그렇게 해야만 “초사의 중국문학사상 의의나 가치도 더 뚜렷하고 올바르게 파악될 수 있다.”(김학주『중국고대문학사』)는 주장은 유념해야 할 것이다.

 

시대의 요구에 따라 역사적 인물들의 평가가 달라진다. 어쩌면 시대적 요구에 의해 창출될 수도 있다. 역사의 기록은 참고할 만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라고만 본다면 오류에 빠질 우려가 많다. 시대에 따른 굴원의 평가를 더 알고 싶거든 ‘곽말약(郭末若)은 왜 굴원을 특별히 좋아했는가?’라는 문장을 찾아보시라.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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