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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명의 부모인문학(17) ... 감동

 

‘죽어서 슬픈 게 아니라 삶을 알 수 없어서. 왜 사라져버린 후에 깨닫게 되는 건지... 그것을 안 시기는 너무 늦고 말았다는...’(어느 미망인, 암으로 남편을 잃은 후)

 

삶은 손목시계를 볼 때보다는 모래시계를 볼 때 더 천천히 흘러간다는 말이 있다. 공중목욕탕의 사우나에서 우리는 이를 경험해 본 적이 있다. 베르그송은 ‘시계가 표시하는 시간은 경험한 시간인 우리 삶의 시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했다. 경험은 시계적 시간이라기보다는 경험의 시간이며 감정의 시간이다. 같은 시간을 똑같이 살아도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시간을 사는 이유는 서로 다른 감정을 품고 살기 때문이다.
‘내겐 잊혀진 시간이야.’
없는 과거의 시간이 되기도 하고,
‘내겐 평생 잊지 못할 시간이야.’

 

현재는 물론 후에도 기억될 미래의 시간, 무한한 시간이 되기도 하는 것은 시간 속에 내재해 있던 감정으로 인해서다. 감정에 따라서 시간은 짧아지기도 하고 길어지기도 한다는 말이다. 없어지기도 하고 늘어나기도 한다. 또 이 감정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감동이다. 나와 나 자신, 그리고 나와 남과의 관계를 감정의 이동인 감동이 이어주고 엮어준다. 남을 통해 내가 감동하고 나로 인해 남이 감동한다면 사회는 자연히 정화되고 순화된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사회정화요 순화다. 수의사가 들려주는 이야기.

 

유치원 옆 동물병원

 

‘연이’라고 이름을 지었단다.
“연이? 왜?”
“인연을 맺었으니까. 처음엔 ‘인연이’라고 했는데 발음을 해보니 이상하게 들리더라. 그래서 줄였어.”
어떤 인연이었기에.

 

살고 있는 서울의 한 오피스텔 지하에 쓰레기를 버리러갔다. 쓰레기통 뒤에서 고양이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쓰레기통과 통 사이에서 그 안에 숨어 있는 아주 작은 고양이를 발견했다. 신음소리는 단지 먹을 것을 못 먹어 우는 소리가 아니었다. 울부짖는 것을 보면 엄마를 잃었거나 크게 다친 게 틀림없었다. 구해주려고 좁은 틈 사이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좀 전의 끙끙 앓던 신음소리는 경계의 소리로 바뀌어 캭캭 하며 발톱을 세우고 이빨이 닿은 손을 마구 물고 할퀴어댔다. 한손 한 움큼 안에 들어온 아주 작은 새끼고양이. 엉덩이와 배는 큰 상처로 썩어가고 있었고 이래서 엄마고양이에게도 버림받았을 갓 태어난 고양이었다. 집 앞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다. 그냥 놔뒀더라면 이 장마철에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곧 죽었을 것이다, 라며 친절한 수의사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학생 같은데...”
“네.”
“입원하고 수술하려면 돈이 꽤 많이 들 텐데, 집에선 아니?”

 

아빠는 지방에 계시고 서울서 대학 다니느라 혼자 자취하고 있다고 했다.
“상처가 심해 유기된 동물들은 보통 안락사를 시키거든?”
“절대 그럴 수는 없어요.”

 

7일간 입원을 하고 수술도 했다. 너무 어려 마취를 할 수도 없었다. 수술하는 동안 수의사의 보조가 되어 아파 발버둥치고 두려워 할퀴어대는 새끼고양이를 붙들고 있어야 했다. 두 손과 팔에는 고양이가 할퀸 피투성이상처로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상처 깊은 새끼고양이를 생각하니 이게 뭐 대순가, 했단다.
“치료는 잘 됐다.”

 

이 말 한 마디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신 고맙다고 했다. 수의사는 기특하다며 치료비와 입원비를 반절 깎아줬다. 그러나 깎아줬다 해도 그 비용이 무려 50여 만 원.
“아빠, 집에 고양이가 있는데...”
“응? 뭐?”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온 아빠를 공항으로 마중 나온 아들은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연이’와의 인연을 처음 얘기했다.

 

약 10년 전, 키우던 치와와 강아지를 부주의사고로 졸지에 저승으로 보내고 난 뒤 어느 동물도 키우지 못하고 있었다.
“착하네, 내 아들이. 그런데 키우려면...”
“나도 아는데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어. 아마 그랬다면 죽었을 거야. 수의사님도 그랬을 거라 했어.”
아들의 꿈은 유기된 동물들을 보호해주는 동물보호센터를 자비로 운영하는 일이다. 지금은 경영학과 회계학을 전공해 그 쪽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지만, 훗날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비영리동물보호기관을 세우는 것이다.

 

미래를 두고 꾸는 꿈은 그러나 결코 미래로 미뤄둬서만은 안 되는 것이 또 꿈이기도 함을 잘 알고 있는 아빠는, 당장 실현할 수 있고 지금 실천해야 할 꿈을 당장 불편하거나 귀찮다하여 오불관언 방관할 수는 없었다. 꿈을 유기시킬 순 없었다.

 

“네 공부할 시간을 많이 빼앗길 텐데, 괜찮겠니? 그리고 외국으로 떠나야 하는 6개월 뒤에는 어떻게 하니?”
아들은 당연하다는 듯,
“아빠가 키워야지.”
“네가 결혼해서 손주를 나한테 봐 달라 해도 절대 안 해준다고 한 적 있었을 텐데?”
“내 자식은 내가 키우지. 이건 동물이잖아. 아무 힘도 없고 의지할 데 없는 가엾고 불쌍한 동물이잖아. 내 자식은 의지할 곳도 있고 또 부모가 버젓이 살아계시니 불쌍하지도 않잖아!”

 

동물병원을 자주 다녀야했다. 예방주사비용만도 앞으로 족히 20만원은 더 든다고 한다. 아빠는 속으로 아들이 기특하면서도 한편 걱정이 하나 생겼다. ‘연이’는 지금 손바닥 안에 들어오지만 6개월 뒤에는 엄청 클 것이고... 아빠는 강아지는 무척 좋아해도 고양이는 무척 싫어했다. 더욱이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어 비염이 심했다. 새끼고양이 ‘연이’와 놀아주면서 아들을 쳐다보았다. 올해 성인이 된 아들이다.

 

아들이 어떤 어른으로 크길 바랐던가?

 

어려운 남들을 배려하고, 어려운 남들을 진심으로 도울 수 있는 어른. 난사람보다는 든사람으로 심성이 곧고 바르며 또 든사람과 더불어 된사람으로 고운 마음을 지닌 어른이 되길 바라지 않았던가. 그래서 경제적으로는 어려워도 더 큰 세계에서 공부를 시키고 있는 게 아니던가.

 

지금 스무 살 아들의 이 실천을 보고 있음에, 6개월 뒤를 걱정하는 것은 아빠의 모순이며 이율배반이며, 자기안위이며 자기기만이 아닐 수 없다. 자신만이 아니라 자식을 속이는 일이다.
‘좋다, 좋아. 6개월 뒤 어떻게 되든...’

 

‘연이’와 함께 보낸 나흘 동안 그 작은 것에 정이 쏙 들고 말았다. 집에 혼자 두고 외출하려면 너무 안쓰럽고 밖에 나가서도 빨리 일을 마치고 ‘연이’ 먹을 것을 챙겨주러 서둘러 집으로 들어와야 했다. 집 문을 열면 첫 마디가,
“연이야, 잘 있었어? 심심했지?”

 

잊었던 노래가 나도 모르게 입에서 절로 흘러나왔다.
‘정이란 무엇인가. 주는 걸까 받는 걸까.’

 

정이란, 주기만 한 것 같더라도 이렇게 받기도 한다.
보고 있자면, 몸으론 다 큰 아들도, 아직 병치레를 하고 있는 새끼고양이 ‘연이’도, 모두 모두 흐뭇하다. 가족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따뜻해져온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들로 인해 웃는 자신의 얼굴을 가슴으로 느껴본다.

 

 

페르몬

 

대학생이 수의사를 감동시켰다며, 돈벌이로써 해온 동물병원 10년 경험이 이 어린 친구의 행동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동물과의 교감 없이 지내온 10년이었다. ‘동물사랑’ 병원 간판에 쓰인 병원명이 자기를 비웃는 듯했다.

 

“개미와 같은 곤충들은 호르몬 외에 밖으로 분출하는 감정호르몬을 가지고 있습니다. 페르몬이죠. 위험 등 먼저 발견한 개미가 이것을 방출하면 주변의 다른 동료 개미들이 이 페르몬을 받아 집단으로 대비하거나 대피한다는 겁니다. 곤충들의 교감방식이지요.”

 

수의사는 다른 사람(대학생)과 동물(버려진 고양이)의 교감이 자기에게로도 전해져 감동하게 되었다며, 감동은 인간의 페르몬임을 강조한다. 감동을 행동으로 옮기면 자기 인생을 전환하는 계기 그리고 힘이 되어준다.

 

‘우리는 이성뿐만 아니라 감정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는다.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이다. 감정은 이성이 영원히 다가갈 수 없는 것을 포착해낸다.’(파스칼)

 

인사

 

감정은 대체로 표현에 의해 전해지는데, 우리가 가장 흔히 하는 감정표현은 인사다. 생활이 각박해지다보니 인사가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살기 힘들수록 인사를 더 나눔으로써 서로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게 아닌지. 인사는 돈을 전혀 들이지 않고도 나를 기쁘게 하고 나아가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내는 효율극대화의 방법이다.

 

인사를 잘 하는 아이들을 보면 부모 역시 그렇다.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게 인사습관이다. 관용의 나라인 프랑스에서는 단지 ‘감사합니다’라고만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꼭 ‘누구’를 넣는데, 이를 테면 ‘엄마, 감사해.’ ‘선생님, 감사합니다.’이다. 구체적 대상을 대화 속에 넣음으로써 감정표현마저도 더 분명히 더 적확히 하는데, 이를 어른, 주로 부모들이 어릴 적부터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분명한 대상·상대에게 하는 인사법을 프랑스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인사에 인사치레는 있을 수 없다. 형식적인 인사가 아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인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부모가 생활 속에서 보여주며 일깨운다는 것이다.

 

허투로 하는 인사가 아닌 진심을 담은 인사는 상대를 밝혀주는 것, 이 단순한 행동으로부터 시작한다. 배꼽인사라며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지만 눈을 맞추는 일은 적다. 마음에도 없는 형식인사를 누구에게서 배웠을까. 부모며 선생들일 것이다. 구체적 대상인 상대의 이름을 담아 인사하는 일은 진심과 정성이 깃든 감정표현이다. 감정의 구체화, 즉 정확한 감정표현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어릴 적부터 일찌감치 깨우치게 하는 일은 바로 가정에서 해야 할 몫이다.

 

얼굴

 

‘남이 가까이 있음으로 얼굴이 갖는 의미가 생겨난다.’(레비나스)

 

감정은 마음으로 나누게 되지만 처음 얼굴로써 주고받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 얼굴이 페르몬일 수 있다. 얼굴에 희로애락이 담겨지고 그것으로 희로애락이 전해진다. 아쉽게도 다 똑같은 듯한 무표정의 얼굴들이 늘어나고 있다. 무표정한 얼굴을 보면 겁이 난다. 나눔이 얼굴에서부터 단절된다. 아이들마저 점점 이렇게 어른을 닮아간다. 아이들의 얼굴, 즉 표정은 부모가 거울이건만... 부모를 그저 따라하는 아이들의 습성에 의해 부모의 얼굴을 그대로 모사·모방하기 마련이다. 지금이 힘들더라도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을 제대로, 정말 ‘제대로 잘’ 키워내고 싶다면, 아이들의 삶에 진정한 행복을 선물하고 싶다면, 아이들 앞에서 부모의 얼굴은 우선 어때야 할까? 지금 힘들어도 지금 웃어야 할 이유는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포기가 아니라 미래를 희망하고 소망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망치는 때

 

모범생 형; “네가 뭘 알아? 넌 평생 무엇을 하려고 한 적이 없잖아!”
망나니 동생; “난 사람이 자신을 망치는 때를 알아.”

 

영화 <트랙>에 나오는 대화다. 여러 번 마음이 흔들려본 불량학생 동생은 처음으로 마음이 흔들리는 모범학생 형을 감화시킨다. 끝내 그들은 포옹하며 서로에게 감사하다고 말한다. 동생은 형 덕분에, 형은 동생 덕택에... 이 역시 감동의 힘이다.

 

마음 가는 대로

 

하느님; “조지, 네 전부를 걸어봤느냐? 그냥 눈을 감고 마음 가는 대로 내맡겨보았느냐?”

 

천국 앞에서 하느님이 조지 신부에게 묻더란다. 그 후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깨우기 위해 기적을 꿈꾸는 제자의 마라톤 시합에 코치로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조지 신부는 교장 앞에서 대답한다. ‘마음 가는 대로 할 것이다.’ 이는 ‘신부가 마라톤에 참가해 권위를 손상시켜?’교장의 압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교사직을 그만 두는 한이 있더라도, 제자를 위해 결정을 내린다. 그는 주변의 반대와 압력을 극복한다. 이로써 마라토너로서 젊었을 때 못 다한 자기 자신을 걸어본다. 제자는 기적을 향해 달렸고 코치인 조지 신부는 자기 자신을 위해 경기장 밖에서 함께 뛰었다. 제자와 선생의 교감이 끝내 기적을 이루고 만다. 영화 <리틀 러너>다. 이 역시 감정의 나눔에서 비롯되었다. 14살의 꼬마 학생이 보스톤마라톤에서 우승을 꿈꾸다니, 교장 선생도 친구들도 모두 비웃어댔다. 그러나 비웃던 이들은 이런 말을 한다.

 

“너로 인해 우리 모두 위대해진 것 같았어.”

 

감동의 힘이 기적을 만들어냈다. 모든 기적은 함께 더불어 나누는 감응에 의한 동화다. 모두의 가슴을 뛰게 하며 뜨겁게 하는 힘, 감정이며 감동이다. 남을 움직이게 하는 힘의 출발지는 어느 것, 어느 누구나 바로 내 가슴이며 내 마음이며 내 얼굴이다.

 

감동의 힘

 

내 마음을 일으키는 감정이 남을 흔들어 감동이 된다. 자신 스스로 감동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이보다 더한 위인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크든 작든. 부모가 자식을 감동시킬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아이들의 삶은 이미 위인의 길로 발을 들이고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부모로 배우는 진실성이다.

 

‘인간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잃는다면 세계를 얻은들 무얼 하겠느냐.’(그리스도)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셰익스피어)

 

부모의 진실함과 진정함만이 자식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 아래의 말은 자식 앞에서의 부모를 떠오르게 한다.

 

‘울어야 할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다시 한 번 삶의 의욕을 얻을 수 있다.’(베어너 핑크)

 

부모의 웃음은 자식들에겐 희망이며, 이 나눔으로 부모도 자식도 모두 삶에 의욕이 붙는다.
자기 자신을 감동시키는 삶을 한번이라도 살아보았는가?

 

살면서 자기에게 종종 물어봐야 할 질문이다. 자기 가슴에 품을 수 있을 때 내 삶도 감동이 된다. 이 감동의 마음 그리고 그 힘으로 자식을 키운다면? 남의 것을 보고 즐기기만 할 게 아니라 우리에게도 영화 같은 삶이 때로는 필요하다. 단막극이든 아님... 실패작이 될지 성공작이 될지는 감독인 부모에게 달려있다. 주인공인 자식은 부모의 연출에 따라 달라진다. 부모의 감정은 자식에겐 영감으로 옮겨진다. 이것이 세상 최초의 교감이자 세상 최고의 감동이지 않겠는가.

 

<우리 먼저>

 

아이들과 눈 감고 걷기를 해보면 아주 좋다. 아이들이 이 놀이를 하자고 먼저 제안해온다. 거절할 일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아이와 엄마·아빠의 자리바꿈을 해보면 더 좋다. 아빠나 엄마가 눈을 감고 아이의 손에 이끌려 걸어본다.
“전방에 과속방지턱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천천히 걸으라는 말을 대신해 내비게이션을 흉내 내 이렇게 말한다.
“전방에 개똥이 있습니다.”

 

아빠가 눈 감은 아이를 이끌 차례에서 이렇게 말을 바꿔본다. 놀이의 재미에서 믿음, 즉 신뢰감을 익힌다.
또 눈 감은 채로 앞으로 넘어지거나 등으로 넘어지는 아이를 부모가 두 손으로 받아주는 놀이를 해보는 것도 신뢰의 교감놀이로 꽤 좋다. 보는 것에만 익숙해져가는 아이들에게 보지 않고 넘어지게 해보는 것은 여간만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누군가 잡아주지 않으면 나는 크게 다칠 수 있어, 이러면서 넘어지는, 제 몸을 누군가에게 넘겨주는 아이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아찔함의 스릴로 재미있어 하지만 한편 믿음으로의 나눔을 통해 교감신경을 발달시킬 수도 있다. 작용과 반작용이란 감각반응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중매자는 바로 믿음, 신뢰이다. 뉴런 그 자체보다도 더 중요할 뉴런 사이의 연결자가 바로 믿음, 신뢰이다.

관계의 절대적이고도 강력한 연결자가 바로 믿음, 신뢰라는 말이다. 살면서 중요한 여러 요소 중에 믿음만큼 소중한 게 있을까. 성경에선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지만 믿음의 바탕이 없는 사랑은 결코 진정한 사랑이랄 수 없을 것이다. 영원할 것 같던 사랑도 믿음의 상실로 식거나 잃게 돼 한시적이고 일시적으로 끝나고 만다. 그렇다면 사랑보다도 믿음이 제일이지 않겠는가. 다시 말하자면 믿음과 사랑은 비교부터가 불가능하다. 소망도 사랑도 믿음을 바탕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의심이 많은 아이는 눈감고 걷기나 등으로 넘어지기 놀이를 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사려 깊은 것과는 전혀 다르다. 믿음이 돈독하지 못할 때 아이는 이런 놀이에 응하지 않는다. 믿음을 주지 못하면 아이는 반응해오지 않는다. <18편으로 이어집니다>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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