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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9)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양사(養士)는 중국 전국시대의 독특한 현상이다. 여러 제후들은 자신들이 인재들을 중시한다는 품성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하여 사인(士人)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재능 있고 뜻 있는 지식인들을 문하로 불러들였다. 이것이 ‘양사(養士)’에 숨겨진 뜻이다. 예를 들어 진나라 승상 여불위(呂不韋)는 ‘삼천의 지식인(士)을 양성하여’ 『여씨춘추』라는 거작을 저술하였다.

 

중국의 전국시대는 양사(養士) 풍조가 성행한 시기다. 그중 전국 4공자, 즉 제나라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 위나라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無忌), 월나라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과 초나라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은 종실의 후예로 인재를 중시하고 문객 수천 명을 양성하여 후대에 추앙하는 지식인(士)들을 우대하는 기풍을 진작하였다.

 

그렇다면 ‘양사(養士)’란 도대체 무엇인가?
‘士’란 고대 중국에서 남자, 특히 미혼 남자에 대한 존칭이었다. 나중에 일정한 지위와 신분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게 되면서 일정한 직무가 있는 특정 계층을 지칭하는 말이 됐다. 이런 계층은 시대에 따라 다른 뜻을 갖게 된다.

 

 

서주(西周)시기에 ‘士’는 통치계급 중에서 하층에 속하였다. 노예를 가진 소귀족으로 제후(諸侯)와 경대부(卿大夫) 아래였다. 자신이 속한 대부에 충성하는 계층이다. 그들은 적지 않은 토지와 노예를 소유하면서 이른 바 ‘국인(國人)’의 주체가 되었다. 정치적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전쟁이 발발하면 군대의 주력이 되어 ‘무사(武士)’ 혹은 ‘갑사(甲士)’라 불리기도 했다. 그들은 정치 경험이 풍부하여 대부나 제후의 가신 혹은 모사가 되기도 하면서 존귀한 지위를 누렸다. 춘추시기 노예사회의 계급 관계에 변동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士’에는 새로운 부류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경제적 능력을 가지거나 전쟁의 공로로 작위와 관직을 얻게 된 서민 공상업자가 그들이다. 이로써 원래의 ‘士’는 파산하거나 정치적 이유로 평민이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전국시대로 오면 사학(私學)이 성행하여 교육의 범위가 확대 되면서 사인(士人)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재능을 앞세워 전문적인 교육에 종사한다. 어떤 사람들은 제자백가의 대표 인물이 되기도 했다. 적지 않은 ‘士’들은 기존 특권과 지위를 상실하면서 생계를 위해, 정치적 관점을 위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신념을 버리고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 협객이나 자객이 되기도 하고 “국가 간에 고정된 외교란 없고 한 사람만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다.”는 변사가 되기도 했으며 종횡가(縱橫家)인 소진(蘇秦)이나 장의(張儀)처럼 어떤 집단의 책략 등을 결정하는 인물이 되기도 하였다. 전국시대로 들어서면서 ‘士’의 개념은 이전의 통치계층 중 특정 계층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삼교구류(三敎九流),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면서 개념적으로나 신분적으로나 거대한 변화가 생겼다.

 

이처럼 전국시대 각국의 제후들은 천하의 인재를 광범위하게 모집하면서 양사의 풍조가 성행하였다. 각국 귀족 문하에 식객으로 들어간 인재들은 소수가 아니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양사를 했던 제후들은 인재를 등용한다는 미명아래 많은 문객의 충성을 얻을 수 있었고 문객 중에 관료가 되어 주인과 동맹을 하는 경우가 많아 정치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명분과 실리가 맞았다고 해석한다. 사인(士人)들은 자신의 지식과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생활해 나갈 수 있는 재원이 마련됐으며 주인의 추천을 받아 자신의 정치 포부를 펼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지름길을 얻기 위해서였다.

 

 

앞서 얘기했던 전국시대 4공자 전문, 위무기, 조승과 황헐은 당시 문하에 식객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사인들을 최대한 받아들여 식객이 3000여 인이 됐으며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사인들도 주인에게 목숨을 다할 때까지 충성을 하기도 했다. 그중 재능이 특출한 사람은 주인의 지낭이 되거나 참모가 되었고 주인을 위해 책략을 내놓고 어려움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절부구조(竊符求趙)’[훔친 병부(兵簿)로 조나라를 구했다]와 ‘모수자천(毛遂自薦)’[모수가 스스로 천거했다, 자기가 자기를 추천하는 것] 등의 사례가 그것이다. 이러한 문객들의 도움으로 4공자의 세력이 나날이 커졌고 명성이 드높아 한 나라의 군주를 뛰어넘는 세력을 만들었다.

 

 

4공자 이후 양사, 식객의 풍조는 날로 성행하였다. 당시 진나라의 승상 여불위도 그랬다. 그 문하의 식객이 3000여 인이 되었다. 풍아(風雅)를 표방하기 위해 여불위는 수많은 식객을 모아 유명한 저작 『여씨춘추』를 공동으로 저술하기도 하였다.

 

전국시대의 양사의 기풍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전국시대 현실 정치, 경제와 군사 발전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당시 여러 나라가 할거하여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각 나라의 군주들은 변법으로 자강을 도모하였고 자신을 보호하고 패권을 노리기 위해서는 재능이 있는 인사들이 필요하였다. 특히 정치, 군사 방면에 재능이 있는 사인들은 군주들이 특히 필요로 하는 중요한 인재들이었다. 그러한 인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각국의 귀족들은 온 힘을 기울였고 성심을 다하였다.

 

전국칠웅이 병립하고 있던 때라 사인들도 선택의 여지가 넓었다. 각 나라의 군주들은 이러한 현상을 무시할 수 없어 양사의 기풍은 날로 성행하였다. 사실 전국초기 위나라의 이리(李悝) 변법, 초나라의 오기(吳起) 변법과 나중의 상앙(商鞅) 변법, 연나라 소왕(昭王)이 황금대를 세워 악의(樂毅)를 초빙한 것 등등이 모두 그런 정책의 실현이었다. 군주들이 나서서 인재들을 존중하자 다른 귀족들도 본을 받으면서 전국시대는 양사의 풍조가 성행했다. ‘시대정신’이라 하기 보다는 이익을 위한 양대 세력 간의 교묘한 연합이라 할 것이다.
<30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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