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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7)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제자백가(諸子百家)는 선진(先秦)에서 한(漢)나라 초기까지의 여러 학파의 총칭이다. ‘제자’는 각 학파의 대표 인물을 가리키고 ‘백가’는 각 학파가 잡다하게 흥성한 것을 가리킨다. 제자는 일반적으로 유가의 공자, 맹자, 묵가의 묵자, 도가의 노자 등을 가리킨다. 서한(西漢)의 『칠략』은 각 학파를 유, 도, 음양, 법, 명, 묵, 종횡 등으로 나누었다.

 

기원 전 770년부터 기원 전 221년까지 550년간이 중국 역사상 유명한 춘추천국시대다. 중국의 전후 역사를 구분하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중국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 시기는 노예제 사회에서 봉건 사회로 가는 과도기라 한다.

 

 

춘추전국(春秋戰國) 시기에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경제적인 방면으로는 철기를 사용함으로써 우경(牛耕)이 일반화 됐고 수리 공사를 벌여 생산력 발전을 촉진시켰다. 노예주들에 의해 ‘정전(井田)’ 이외의 토지를 개간하면서 ‘사전(私田)’이 출현했다. 사전이 많아지면서 착취 방식도 변화가 생겨 봉건식의 생산방식이 생겨났으며 지주계급과 농민계급이란 새로운 양대 세력이 등장했다. 이때에 ‘공상식관(工商食官)’[주나라의 관영 수공업 제도. 당시의 수공업자와 상인은 모두 관부가 경영하는 노예로 그들은 반드시 관부의 규정과 요구에 따라 생산과 무역에 종사해야만 했던 것을 가리킨다]의 국면도 서서히 파괴되고 독립적으로 경영하는 수공업자와 상인이 출현하였다.

정치에 있어 제후국들이 경제, 정치, 군사의 힘이 장대해지고 왕실의 힘이 점차 쇠락하면서 서주(西周)시기에 건립된 혈연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종법제도는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귀족 하층의 사(士) 및 서인(庶人)들의 지위가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상하 투쟁이 극렬해지고 끊임없는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춘추시기 큰 나라들끼리 쟁패를 하였는데 중국 역사상 유명한 ‘춘추오패(春秋五覇)’이고 전국시대에는 秦(진), 齊(제), 楚(초), 燕(연), 趙(조), 魏(위), 韓(한)이 출현하였는바 역사상 유명한 ‘전국칠웅(戰國七雄)’이다.

 

사상문화에 있어 생산력의 발전과 상응하여 노동 대중의 지위가 높아지고 종법제도가 쇠약해지면서 사상에 있어서도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하(夏)나라 상(商)나라 주(周)나라 3대의 天(천), 命(명), 鬼(귀), 神(신)의 종교적 관념이 무너지고 ‘학재관부(學在官府)’[관부가 학교 교육 및 모든 학술문화를 농단하던 것]는 유일한 것이 되지 못하고 개인 강학[사학]이라는 새로운 풍조가 생겨났다. 세력이 약해진 노예주와 점차 강대해지는 지주계급, 그리고 서인들이 자신들의 이익 추구라는 기초아래 당시 사회 변혁에 자기의 의견을 표출하기 시작하였다. 학식이 있는 학자들은 정치제도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견지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 논쟁도 불사하였다. 예를 들어 천문, 지리, 물리와 수학 등의 각종 학술 문제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였고 논쟁을 벌였다. 이것이 중국 역사상 유명한 ‘백가쟁명(百家爭鳴)’이다. 전국시대에 와서는 제국이 ‘양사(養士)’[지식인들을 모아 부양했던 일]의 풍조가 성행한다. 각국에서 권세가 있는 귀족들이 현사(賢士)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전문 능력을 이용하는 것이다. ‘양사’의 풍조는 ‘백가쟁명’의 사상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춘추전국 시대에 사상가와 사상 파벌이 한꺼번에 끊임없이 출현하였다. 그렇다면 이른바 ‘제자’는 도대체 몇일까? 이 문제에 대해 여러 관점이 존재한다. 서한(西漢)초기 역사가인 사마담(司馬談)[『사기』를 쓴 사마천의 부친]의 관점을 따른다면 ‘제자백가’를 ‘陰陽家(음양가)’, ‘儒家(유가)’, ‘墨家(묵가)’, ‘法家(법가)’, ‘名家(명가)’, ‘道家(도가)’라 정의하였고 ; 서한의 유흠(劉歆)과 동한(東漢)의 반고(班固)는 ‘제자백가’를 ‘유가’, ‘도가’, ‘법가’, ‘명가’, ‘음양가’, ‘묵가’, ‘縱橫家(종횡가)’, ‘雜家(잡가)’, ‘小說家(소설가)’로 정의하였다.

 

 

여기서는 10가만 소개한다. [일반적인 개념적 정의만을 소개한다. 철학적 관점에서 논한다면 연구하는 학자들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공자(孔子)는 유가의 창시자다. 등급의 구별에 대해 엄격했다. 공자의 사상의 핵심은 ‘인(仁)’이다. 흔히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라 해석한다. 그의 교육사상은 ‘유교무류(有敎無類)’이며 ‘거현인(擧賢人)’을 주장하였다. 전국시기의 맹자(孟子)와 순자(荀子)는 유가의 새로운 대표적 인물이다. 맹자는 공자의 ‘인’의 학설을 계승하였다. ‘인정(仁政)’과 ‘민귀군경(民貴君輕)’이 중심 사상이다. 또 ‘의(義)’를 강조하여 ‘사생취의(捨生取義)’를 주장하였다. 성선설이 그의 철학사상이다. 순자는 ‘인성악(人性惡)’을 주장하여 후천적 교육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공자의 ‘예(禮)’ 학설을 계승하여 ‘예’와 ‘법치’가 그의 중심 사상이다. 그의 ‘사람의 결정이 하늘을 이긴다[人定勝天(인정승천)]’은 유물주의 사상의 대표라고 보기도 한다. 『논어』『맹자』는 유교사상의 주요 대표작이다.

 

 

춘추 말, 전국 초기의 묵자(墨子)는 묵가의 대표 인물이다. 그는 수공업자들의 이익과 요구를 대표한다고 한다. ‘겸애’와 ‘비공(非攻)’[국가 사이 전쟁 반대]을 주장하였다. 묵자가 강대한 초(楚)나라가 약소국인 송(宋)나라를 침략하려 하자 그는 노나라에서 10일 밤낮을 달려 초나라의 도성에 가서 초나라와 송나라의 전쟁을 중지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묵자는 또 ‘상현(尙賢)’을 주장하였다. 어진 사람을 중용해야지 출신성분을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절장(節葬)’과 ‘절용(節用)’을 주장하면서 귀족들의 ‘후장(厚葬)’을 반대하고 사치와 낭비를 반대하였다. 『묵자』는 묵가의 대표작이다.

 

노자(老子)는 노담(老聃)이라 하기도 하는데 성은 이(李)요 이름은 이(耳)라 한다. 도가의 창시자다. 춘추 말 초나라 고현(苦顯 : 지금의 하남성 녹읍[鹿邑]현) 여향(勵鄕) 곡인(曲人)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노자』는 노자 사상의 대표작으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노자』(『도덕경』이라 하기도 한다)는 노자의 중심 사상을 모아 놓았다. 그러나 노자가 지은 것은 아니다.

 

노자는 중국에서 자연의 본 모습을 가지고 세계를 해석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하늘의 의지에 의탁하지 않았다. 그의 사상에 있어 ‘道(도)’는 중요한 개념이다. 도를 천지만물의 본원으로 삼았다. 세계의 모든 사물은 대립 관계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귀와 천, 고와 저, 유와 무, 생과 멸, 강과 약과 같이 상호 대립적이라 본 것이다. 그리고 대립하는 쌍방은 서로 전화(轉化)할 수 있고 상성(相成)할 수도 있다. 이런 사상을 변증유물주의의 요소를 갖췄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의 철학사상은 자연에 따르며 ‘무위이치(無爲而治)’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가 묘사한 이상사회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사회라 본다.

 

전국시기 장자(莊子)는 도가의 대표 인물이다. 그는 노자의 ‘도법자연(道法自然)’ 관점을 계승 발전시켰다. 사물의 자생자멸을 강조하였고 의지가 있는 주제자인 하늘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권력과 이익을 경시하였고 개인 자유를 추구한 사상가다. 그의 사상은 소극적인 면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전국시기의 추연(鄒衍)은 음양가의 대표 인물이다. 그는 오행설을 가지고 자사(子思)와 맹자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물질세계가 아무리 복잡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金(금), 木(목), 水(수), 火(화), 土(토) 다섯 가지로 구성된 것이라고 귀납시켰다. 소박한 유물주의 사상과 결합한 것이라 평가하는 음양오행설이 그것이다. 그는 음양의 성쇠와 오행의 ‘상생상극(相生相剋)’을 결합시켜 사회현상을 해석하고 각 왕조의 흥망성쇠를 해석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오덕시종(五德始終)’설이다.

 

‘오덕(五德)’은 오행 중의 토, 목, 금, 화, 수이다. 역사상 각 왕조는 그중의 한 덕을 대표한다고 보았다. 오행의 순서에 따라 번갈아 교체되며 부단히 반복된다고 하였다. 추연이 살았던 시대는 중국사회가 노예사회에서 봉건사회로 변하는 과도기라 그의 오덕시종의 학설은 신흥 지주계급 정권이 노예주 귀족정권을 대체하는데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줬다. 그러나 추연의 학설은 후에 운명론과 같은 미신적 근거로 이용되면서 과학적 인식론에 방해가 되는 요소가 되었다.

 

 

전국 중기의 허행(許行)은 농가의 대표 인물이다. 그는 당시 농민의 이익을 대표한다. 군주도 백성과 똑 같이 소득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착취와 피착취를 반대하였다. 물물교환 방식을 제창하였고 시장에서 같은 물품은 같은 가격으로 판매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시가(市價)가 다르지 않으면 나라에 거짓이 없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구체적인 정가(定價) 방법을 제시하였다. 상품의 길이, 중량과 용량으로 가격을 규정하고 규격이 같은 마포, 비단, 곡물, 신발 등 같은 가격으로 판매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허행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사회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조건들이었다.

 

전국시기 혜시(惠施)와 공손룡(公孫龍)은 명가의 대표 인물이다. 춘추전국은 중국 역사에 있어 중요한 변혁의 시대였다. 새로운 사건들이 빈번히 일어났다. 당시 공손룡은 ‘백마비마(白馬非馬)’를 제시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馬(말)’는 ‘형(形)’의 개념이고 ‘白(희다)’은 ‘색(色)’의 개념이라 다른 감각으로 얻어진 다른 느낌이기 때문에 ‘백마는 말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공손룡은 개별과 일반의 관계를 확실하게 구분하였다. 개별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을 서로 구별했다는 것은 객관유심주의의 관점에 속한다고 평가를 받는다. 명가는 신흥 지주들을 위하여 봉건통치를 유지하는데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들이 제자백자의 논쟁에 끼어들면서 객관적으로 로직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이리(李悝), 오기(吳起), 상앙(商鞅)과 한비(韓非)는 법가의 중요 인물들이다. 이리는 위나라의 재상을 지냈던 인물로 전국 초기 법가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법경』6편을 지어 봉건제도를 법률로 고정시켰다. 중국 봉건사회의 최초의 법전이다. 오기는 위나라 장군을 역임했다. 그의 『오기병법』은 『손자병법』과 병칭되는 군사 저작이다. 나중에 초나라에 투항하여 영윤(令尹)을 역임하면서 몰락한 노예주 계급의 ‘세경세록’의 특권을 없앴다. 상앙은 진나라에서 변법을 시행했는데 그 주요 내용은 정전을 폐지하고 천맥(阡陌)을 만들었으며 군공(軍功)과 경직을 장려하고 진나라 율법을 제정하고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상앙 변법은 진나라의 봉건제를 확립시키고 진나라의 생산력의 발전을 이루어 이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한비는 법가사상의 집대성자다. 그의 대표작인 『고분』『오독』 등 10여 만 자에 이르는 문장은 『한비자』55편에 수록되었다. 그는 전기 법가의 ‘法(법)’, ‘術(술)’, ‘勢(세)’를 결합하였다. ‘법’은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규정이고 ; ‘술’은 권술로 황제가 백성을 통치하는 수단이며 ; ‘세’는 권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국왕은 반드시 침범할 수 없는 권력을 가지며 왕권은 공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비의 이러한 정치 주장은 당시의 봉건제도를 공고히 하고 발전시켜 진시황이 그의 주장을 높이 평가하였다.

 

 

손무(孫武), 손빈(孫臏)은 병가의 중요 대표 인물이다. 손무는 춘추말기 제나라 사람으로 중국 고대 병가의 창시자다. 『손자병법』13편은 그의 대표작으로 6천 여 자를 가지고 군사 이론의 기초를 닦았다.
손무의 후손인 손빈은 1만1천 여 자의『손빈병법』30편을 지었다. 이 책은 손무와 오기 등의 군사 전문가들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 전국 전반기의 전투 경험의 총결로 신흥 지주계급의 요구에 부응하였다.

 

 

장의(張儀)와 소진(蘇秦)은 종횡가의 대표 인물이다. 합종의 실질은 약소국들이 연합하여 강국의 침략에 방어하는 것이고 연횡은 강국이 약소국과 연합하여 다른 약소국을 병합하는 것이다. 장의는 진나라 ‘연횡’ 정책의 실행자로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데 공헌을 하였다.

 

소진은 ‘합종’의 실행자로 그는 위, 조, 한, 연, 제를 연합시켜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소진은 약소국인 연나라를 도와 강국인 제나라에 승리를 거두게 하였는데 이 또한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데 이로운 국면을 불러왔다.

 

전국말기 여불위(呂不韋)는 잡가의 대표 인물이다. 그는 진시황의 재상으로 있을 때 『여씨춘추』를 편찬하였다. 유가, 법가, 묵가 등 여러 학파의 관점과 이론을 모아 ‘천지만물(天地萬物), 고금지사(古今之事)’를 결집하였다. 이 책은 진귀한 역사지식을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28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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