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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19) ... 한국기자상 수상과 인기리 출판

최고점수로 한국기자상 수상

 

"이번의 한국기자상 응모에서 큰 개가를 올린 부문이 ‘장기기획 보도부문’입니다. 응모작 중에서 제민일보의 「4‧3은 말한다」는 압권을 이룬 작품이라는데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일치했으며, 전 응모작 중 최고점수를 받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1993년 8월 17일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제25회 한국기자상 시상식에서 심사위원장 김정기 교수(한국외국어대)가 밝힌 ‘심사평’이다. 김 위원장은 “「4‧3은 말한다」는 방대한 기획 시리즈물이라는 점에서 한국 저널리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호평했다.

 

그 자리에는 이만섭 국회의장, 이회창 감사원장, 이기택 민주당 대표, 이경식‧한완상 부총리 등 정‧관계 인사들과 학계‧언론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4‧3취재반 연재물에 대한 심사위원장의 과찬이 있었기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았다.

 

애초 한국기자상에 추천하겠다는 주변의 권유가 있었을 때 망설였다. 4‧3의 깊은 상처를 앞에 두고, 그것을 대상으로 한 어떤 일을 했다고 해서 상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경솔한 행동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출품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4‧3은 말한다」가 중앙에 널리 알려져 4‧3 논의가 활성화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을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서였다.

 

결과론이지만, 「4‧3은 말한다」의 한국기자상 수상은 중앙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정치권과 학계, 언론계에서 저마다 제주4‧3과 제민일보 연재물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언론계 내부에서 “제민일보의 4‧3 시리즈를 보면서 중앙 언론이 반성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왔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4‧3취재반의 활동상을 소개해달라는 원고 청탁도 잇따라 들어왔다. 나는 한국기자협회가 발행하는 『저널리즘』 1993년 여름호에 “4‧3은 여전히 ‘공산폭동’이어야 하는가”, 역사비평사가 펴내는 『역사비평』 1994년 여름호에 “4‧3취재 6년-무참히 왜곡된 역사”란 제목으로 4‧3 취재기를 실었다.

 

한편, 한국언론연구원은 1996년 「4‧3은 말한다」를 탐사보도의 우수사례로 선정해 원고 청탁을 해왔다. 이에 4‧3취재반 김종민 기자가 취재 준비, 취재과정과 방법, 컴퓨터 활용, 취재보도 결과 등 취재반의 활동상을 상세히 기술했다.

 

뜻밖에 보내온 한 심사위원의 편지

 

한국기자상 수상과 관련해 ‘이제는 말할 수 있는’ 비화도 있다. 수상 결정 직후에 전혀 모르는 한 심사위원이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는 “마치 제가 큰 상을 받은 것처럼 흐뭇하기 그지없다.”는 글로 시작되었다.

 

제주도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자신이 4‧3의 비극을 처음 안 것은 군 복무 시절 휴가를 다녀온 제주 출신 후배 사병이 잠자리에서 흐느끼는 모습에서였다고 한다. 또 오사카에 취재 갔을 때 술집에서 만난 60대 동포로부터 “내가 왜 빨갱이인가. 왜 내가 부모 형제를 잃고 일본으로 와야만 했는가”라는 피눈물어린 체험을 들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후로 왜 4‧3의 진실이 규명되지 않는지 의아해 하던 차에 한국기자상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가 제민일보 시리즈를 보고 흥분했다는 것이다.

 

“단숨에 상당 부분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4‧3을 보는 저의 소박한 생각은 한마디로 냉전적 시각도, 이념적 시각도 아닌 지극히 냉정하고 객관적 입장에서의 진실 규명이지요. 바로 제민일보가 처음으로 4‧3을 객관적 입장에서 본격 조명했다는 것은 매우 값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감정과 보복 차원이 아니라는 점이 돋보이더군요. 많은 관련자의 증언, 사건마다 현장 소개와 취재, 미 군정 문서의 발굴 등은 이 시리즈를 더욱 신뢰성 있게 하는데 기여했다고 보여 집니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은 한국기자협회 회장을 지낸 당시 한국일보 이성춘 논설위원이었다. 그는 조바심 어린 마음으로 심사에 참여했는데, 「4‧3은 말한다」가 사실상 만장일치나 다름없는 압도적인 점수로 1위를 차지해서 또 한 번 놀랐다는 덕담도 썼다.

 

그러면서 그는 심사관계 내막은 비밀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내용이 외부로 흘러 나가지 않도록 해줄 것을 당부했다. 나는 이제 2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본인의 양해 없이 이 사실을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기자상 수상 후 쇄도한 출판 제의

 

1993년 제민일보 4‧3취재반의 한국기자상 수상 이후 현대사를 연구하던 중앙 진보학자들이 특별한 시선으로 제주4‧3과 우리 연재물을 보기 시작했다. 몇몇 학자들은 「4‧3은 말한다」 연재물을 입수할 수 없느냐고 직접 타진해오기도 했다. 출판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이 무렵 몇몇 출판사에서 「4‧3은 말한다」를 책으로 만들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 가운데도 김진홍 교수(한국외국어대, 신문학)가 적극적이었다. 도서출판 ‘전예원’ 설립자인 그는 한국기자상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가 「4‧3은 말한다」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인 그는 1982년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대학교수의 길을 걷게 되면서 전예원 대표는 그의 부인이 맡고 있었다.

 

전예원은 1988년 『4‧3민중항쟁 작품집-4‧3島 유채꽃』을 출간한 바 있다. 이 책은 이미 발표되었던 현기영‧현길언‧고시홍‧오경훈‧오성찬의 4‧3 소설과 이산하의 장편시 ‘한라산’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전예원 측과의 출판 협의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4‧3은 말한다」는 500회 연재 계획 중 한국기자상 수상 당시 200회에 근접하고 있었다. 결국 그때까지의 연재 내용을 정리해서 1994년 3월 두 권의 책으로 출간하기로 했다.

 

그동안 신문에 연재했던 내용을 책으로 엮으면서 일부 가필 보완했다. 특히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 신문 연재 때 생략했던 증언자와 인용 자료를 각주(脚註)로 처리했다.

 

『4‧3은 말한다』 제1권(608쪽)에는 ‘4‧3이 왜 일어났는가?’라는 의문에 초점을 맞춘 4‧3 전사(前史)가 다루어졌다. 제2권(485쪽)은 4‧3봉기, 화평-토벌의 갈림길, 제주도가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 단독선거 거부지역으로 역사에 남는 과정 등을 엮었다. 책 말미에는 부록으로 김익렬 연대장의 실록 유고 「4‧3의 진실」과 미군 비밀문서, 다랑쉬굴 참사 취재기 등을 다룬 특집기사를 실었다.

 

두 권의 책 표지는 강요배 화백의 ‘4‧3역사화’에서 발췌한 그림으로 디자인되었다. 뒷면에는 「4‧3은 말한다」 연재에 호평을 했던 재일 사학가 강재언 교수(일본 교토 花園대)를 비롯하여 정윤형(홍익대 교수ㆍ작고), 현기영(소설가),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송지나(극작가), 김정기(한국외국어대 교수) 등 각계인사 6명의 추천 글을 실었다.

 

출판되자마자 중앙 언론 뜨겁게 반응

 

출판을 앞둔 4‧3취재반은 옥동자의 탄생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들떠 있었다. 일말의 염려도 있었다. 그 무렵 사회과학도서가 다소 퇴조의 길을 걷고 있는데다, 제주도라는 지역의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을까하는 우려가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친 김에 중앙언론사를 방문해서 4‧3 연재와 출판 경위를 설명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출판사에 연락했더니 1994년 3월 20일 아침에 책이 나온다고 했다. 나는 책이 나온다는 그날 첫 비행기로 서울에 올라갔다. 갓 나온 책을 들고 경향‧동아‧문화‧서울‧조선‧중앙‧한겨레‧한국일보와 연합뉴스 등 9개 언론사를 방문했다.

 

교통이 혼잡한 서울에서 하루에 이렇게 많은 언론사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절친한 후배(양동주, 당시 국세청 공보관실 근무‧작고)의 도움이 컸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책이 나오기 하루 전인 3월 19일자 『한국일보』에 『4‧3은 말한다』 출간 사실이 대문짝만하게 보도됐다. 나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언론사를 방문한 것이다. 톱기사로 보도된 이 기사는 “극우‧美서 ‘공산폭동’ 왜곡 주장 / ‘남로당 지령설도 조작’ 밝혀 주목 / 진상규명 첫 체계적 접근”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한국일보 최진환 기자가 출간 사실을 알고 인쇄소에서 가제본한 책을 가져다가 “제주4‧3사건이 극우세력과 미국에 의해 ‘공산폭동’으로 왜곡됐으며 ‘남로당 지령설’도 정보기관이 꾸며낸 내용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제주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논의조차 금기시되었던 4‧3사건에 대해 명확한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체계적인 접근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보도한 것이다. 한편으론 고마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다른 언론사 보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4‧3은 말한다』 출간에 대한 한국일보의 선제 보도로 다른 중앙 언론사들이 외면하지 않을까하던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다른 중앙언론사들도 저마다 비중 있게 『4‧3은 말한다』 출간 사실을 보도했다.

 

“제주민중운동 역사적 조명 / 증언‧美비밀문서 토대 진실 파헤쳐”(경향), “더 이상 덮어질 수 없는 진실 ‘4‧3은 말한다’ / ‘공산세력 폭동’ 조작과정 소상히 밝혀내”(한겨레), “제주4‧3사건 전말 밝힌 보고서”(서울), “3천명 증언 등 3년 9개월 연재”(문화),

 

“1천 1백여 쪽 방대한 분량의 4‧3사건 보고서 발간”(조선), “제주4‧3사건 진상 재조명 / 미군비밀문서 주민증언 등 다각적으로 다뤄”(동아), “미군정 치하였던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일어난 도민봉기의 내막을 파헤친 책”(연합뉴스) 등 각 언론의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덩달아 서울 서점가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출판사로부터 출판 5일 만에 재판 인쇄에 돌입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당시 제주시 탐라서적의 주간 베스트셀러 집계에서 『4‧3은 말한다』가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전예원 관계자는 사회과학도서가 이렇게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며 놀라워했다.

 

KBS, 「4‧3은 말한다」 1시간 전국 방송

 

나는 1994년 3월 25일 CBS(기독교방송) ‘시사자키’ 프로(진행 이양원 변호사)에 출연, 15분간 『4‧3은 말한다』 출간을 주제로 인터뷰했다. 그 직후였다. KBS PD가 전화를 걸어와 KBS-1 TV ‘책과의 만남’ 프로에 『4‧3은 말한다』를 초대하겠다는 것이다.

 

공영방송에서 화제의 책을 중심으로 1시간동안 전국 방영하는 프로였다. 며칠 사이에 너무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시점인데도 오히려 정신이 몽롱해지는 느낌이었다.

 

KBS ‘책과의 만남’ 촬영반 3명이 급히 제주에 내려와 4‧3취재반의 활동 모습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PD는 이 프로가 4월 3일 아침에 방영될 예정이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하다면서 협조를 구했다.

 

‘책과의 만남’ 프로는 『4‧3은 말한다』를 집중 조명하면서 취재반의 활동상과 책 내용, 한국현대사에 남게 될 족적 등을 탐구한다는 것이다. 이 프로는 전영태 교수(중앙대)의 사회로 「순이삼촌」의 작가 현기영, 현대사 연구가 김남식 선생이 출연해 4‧3취재반장인 나와 대담하는 형식으로 짜여 있었다.

 

3월 말, 녹화 스튜디오가 있는 서울 여의도 ‘서울텔레콤’으로 갔다. 이 회사가 외주를 맡아 KBS에 납품하는 형식인데, 연출은 KBS PD가 직접 맡고 있었다.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싸늘했다.

 

먼저 와 있던 현기영, 김남식 선생이 얼른 눈짓을 하며 나를 옆으로 끌었다. 귓속말로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불방은 막아야 한다.”고 했다. 순간적으로 1990년 ‘KBS 불방 파동’이 머리를 스쳐갔다. 역사 탐험 3부작 중 1부작에 4‧3 프로를 만들었다가 불방 되는 바람에 교양국 PD들이 들고 일어났던 사건이다.

 

조금 있으니 KBS 외주 주간이란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젊은 PD들이 욕심을 부려 아직 정립이 안 된 4‧3문제를 정면으로 방송하려고 해서 ‘높은 분들’의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이 시점에서 백지화할 수도 없음을 잘 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서 자극적인 말은 삼가주길 바란다. 우리도 가능한 한 불방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그 문제를 길게 따져 논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온에어 표시등에 불이 켜지자 사회자를 포함한 4명의 출연진은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이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어갔다.

 

그런데 몇 분 지나지 않아 중단 사인이 들어왔다. 주간은 몇몇 용어를 수정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사망’ ‘희생’ 등 지금 생각해도 별 문제가 안 되는 용어들인데, 예민하게 반응했다. 몇 차례 NG가 난 뒤 겨우 촬영을 마칠 수가 있었다.

 

그 무렵 현기영 선생이 소설집 『마지막 테우리』(창작과비평사) 출간을 앞두고 있었다. “테우리가 무어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목동을 뜻하는 카우 보이!”라고 넉살좋게 대답하던 현 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심각한 방송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제스처였던 것 같다. 서울텔레콤 관계자는 KBS 외주 주간이 자기 사무실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다.

 

우여곡절을 겪은 ‘책과의 만남 - 4‧3은 말한다’는 1994년 4월 3일 오전 7시부터 1시간동안 전국에 방영됐다. 나는 그 시간 일본에 건너가 있어서 TV를 보지 못했다. 『4‧3은 말한다』 제1권이 일본어판으로 출간돼 그 기념으로 4월 2~3일 오사카와 도쿄에서 내가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신간사, 손해불구 일어판 6권까지 출간

 

『4‧3은 말한다』 일본어판 제1권은 1994년 4월 도쿄 ‘신간사(新幹社)’에서 출간되었다. 출판사 대표는 고이삼이다. 아버지 고향이 제주도 우도인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서 한국말을 잘 모른다.

 

그러나 고향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순수하면서도 집념의 소유자인 그는 1988년 도쿄 거주 제주인을 중심으로 ‘제주도 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할 때 초대 사무국장을 맡아 4‧3 알리기에 앞장섰다.

 

그런 그가 문경수 교수(일본 立命館대)를 통해 『4‧3은 말한다』의 일본어판 출간 의사를 알려왔다. 『4‧3은 말한다』 일어판은 끝까지 출간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그래서 그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제1권 일어판은 550쪽에 이르렀다.

 

일본에서는 이렇게 두꺼운 책은 잘 만들지 않는다. 잘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자가 제한된 사회과학도서를 편찬하는 것은 경영상 적자를 각오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고이삼은 「탐라연구회보」(제12회)에 실린 ‘4‧3은 말한다 제1권을 출간하며’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 친구의 전화가 왔다. ‘너는 출판사 사장, 경영자가 아니냐. 그럼에도 왜 돈 벌 수 없다고 알고 있는 것에 열중하느냐’라고. 비록 손해를 입어도 출간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본서를 간행한 후 다시 다짐하고 있다.

 

거기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든 고향을 위해서든 우정을 위해서든 여러 요소가 있다. 그러나 그보다 내가 느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가는 4‧3취재반의 정열을 생각하면 말단이라 해도 그 대열에 참가하고 있는 사실이 상쾌한 감동이다. 괴로워도 기분이 좋다.”

이런 사람이기에 만나는 순간부터 동지애가 느껴졌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하면서도 『4‧3은 말한다』 일어판 제6권까지 출판하는 약속을 지켰다. 오히려 4‧3취재반이 제7권의 원고를 보내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현재 한글판 5권까지 나온 『4‧3은 말한다』는 제7권까지 출간하여 마무리할 예정이다.

 

『4‧3은 말한다』 일어판 출판기념 강연회가 ‘4‧3을 생각하는 모임’과 신간사 공동 주최로 1994년 4월 2일 오사카 재일 한국YMCA회관에서, 3일에는 도쿄 神田파노세홀에서 각각 열렸다. 필자가 ‘제주4‧3 진상규명의 현주소’란 주제로 강연했다.

 

오사카 강연장에는 재일동포 이외에도 일본대학 교수와 NHK 기자 등이 참석했다. 도쿄 강연장에는 『화산도』 작가 김석범과 시인 이철, 임철‧이경민 교수 등이 자리를 같이했다. 김석범 선생은 축사에서 “제민일보 기획물 「4‧3은 말한다」가 이처럼 한국어와 일어로 동시 출간된 것은 4‧3 진상규명에 있어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4‧3은 말한다』 일어판 출판 사실은 [아사히신문](朝日新聞)과 [마이니찌신문](每日新聞) 등 일본 유수 신문에도 보도됐다. 또 재일 사학자인 강재언 교수(일본 花園대)와 이경민 교수(일본 호카이도대) 등이 일본신문에 서평을 실어 호평했다.

 

공안검사 샅샅이 검색한 뒤 “학술적이다” 결론

 

일본에서의 바쁜 여정을 지내고 제주에 돌아오니 공안당국에서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이 나온 직후 중앙 언론들이 극우세력과 미군이 4‧3을 ‘공산폭동’으로 왜곡시켰고, 정보기관이 ‘남로당 지령설’을 조작했다는 식으로 보도했으니, 어떤 형식이든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중앙 지시에 의해 공안검사가 『4‧3은 말한다』를 이 잡듯이 샅샅이 검색했으나, “학술적이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진실의 힘이 버티게 해준 것 같다.

 

한편으로 제주도 현안의 출판에 대해 이처럼 중앙언론이나 일본 등지에서의 뜨거운 반응은 매우 드문 사례일 것이다. 그만큼 4‧3이 안고 있는 역사적 무게감이 크다는 것을 방증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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