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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공자(孔子 : 기원전 511-479),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노나라 추읍(陬邑 : 지금의 산동 곡부[曲阜]) 사람이다. 어릴 적에는 빈한하였다. 예를 좋아하여 노나라에 이름을 떨쳤다. 젊었을 때 제자들을 거느리고 열국을 주유하였으나 중용되지 못했다. 만년에 은거하여 수학하고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춘추』를 저술하고 『서전』과 『역』에 서를 달았으며 인의예지신을 주장하였다. 그 학설은 넓고 심오하여 후세에 유학으로 불리며 성인으로 존숭 받는다.

 

 

중국 고금의 제일 성인인 공자의 출생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노 양공(襄公) 21년(기원전 551년) 나이 70이 넘은 숙양흘(叔梁紇)의 아홉이나 되는 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출가를 하고 쇠약한 아들 맹피(孟皮)만 남았다. 절음발이로 수백 년이나 이어져 내려온 가문의 대를 이을 자격이 없었다. 비탄 끝에 어쩔 수 없이 재취(再娶)하기도 하였다. 현지 명문가인 안양(顔襄)에게는 묘령의 딸이 셋 있었는데 함께 모아 놓고 얘기를 하였다. “숙양흘은 성인의 후예로 비록 연령이 고희이고 성정이 근엄하기는 하나 품행이 간명하고 키가 10척이며 무지무지 힘이 세다. 너희 셋 중 누가 시집을 갈 것이냐?” 그러자 큰 딸과 둘째 딸은 나이가 너무 많은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셋째 안정(安征)이 언니 둘이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부친께 말하였다. “상의할 게 뭐 있습니까? 딸이 되어 집에서는 아버지를 쫓고 출가하여서는 남편을 쫓으며 남편이 없으면 아들을 쫓는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대로 저는 쫓을 것입니다. 제가 숙양흘에게 시집을 가겠습니다.” 안양은 기뻐하며 나이가 많은 숙양흘에게 셋째를 시집보냈다. 그래서 숙양흘은 묘령의 미인 안정을 처로 삼게 되었다.

 

안정은 성품이 고결하고 마음이 섬세한 여인이었다. 동방화촉을 밝힌 후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남편이 나이가 많은데 정력이 넘치기는 하나 건강한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위대한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것인데. 나조차 확신할 수 없구나. 그렇다면 마을 동쪽 산의 신묘에 가서 신령님들께 비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그녀는 이산(尼山)으로 갔다.

 

안정이 성심으로 이산의 신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봄바람이 불어와 꿇어앉아 있는 안정을 잠들게 하였다. 몽롱한 중에서 자신이 이산의 봉황이 되어 신이 진중하게 자신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상제의 뜻이다. 하늘의 문곡성(文曲星)이 네 몸을 빌려 속세에 다시 태어날 것이다. 잘 키우도록 하라. 주나라를 진흥시킬 수 있는 성인이니 네가 고통을 받는 일이 생기더라도 이름을 만세에 떨칠 것이니 참고 견디어라.” 안정이 어떻게 하면 미래의 성인을 올바르게 키울 수 있을지를 물으려 할 때 몸이 갑자기 기울어졌다. 놀라 잠에서 깨자 태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정은 정신이 초롱같이 밝아지며 자신이 이미 성인의 선골을 잉태하였음을 알고 이산의 신에게 기도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반 여 년이 지나 공자는 이산 부자동(夫子洞)에서 태어났다. 공자는 왜 집에서 태어나지 않고 황량한 야외에서 태어났을까?

 

전하는 바에 따르면 노 양공 22년 봄, 안정은 이산에서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때가 음력 8월 15일로 일반적인 임신은 10개월 잉태하고 나면 분만이 되는데도 안정은 출산시기가 이미 지나 있었다. 실로 성인은 대기만성인 셈이다. 안정은 급한 마음에 남편 숙양흘에게 같이 이산에 가서 기도를 드리자고 부탁하였다. 둘이 부자동에 이르자 갑자기 하늘에 상서로운 구름이 깔리고 창룡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 선녀 둘이 하늘에서 술을 내리고 이산 다섯 봉우리에서 다섯 신선이 공손히 기다리고 있었다. 세속의 음악과는 다른 아름다운 선율이 세상 가득 넘쳐났다. 안정은 분만 시기가 된 것을 알고 급히 남편과 함께 굴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없어 고고지성이 들렸다. 성인이 될 아이가 세상에 나온 것이다.

 

숙양흘은 기뻐하며 아이를 안고 자세히 보니, 세상에! 그야말로 눈 뜨고 볼 수 없는 못난이가 아닌가! 화가 나서 아내를 업고 집으로 가 버렸다. 아내는 애걸복걸했으나 숙량흘은 자신의 아들을 집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처를 휴양시키고 숙량흘은 나들이를 나가 버렸다. 안정은 이불 속에 누워 자신이 낳은 아들을 야산에 버려 둔 것을 생각하니 칼로 도려낸 듯 마음이 아팠다. 마침내 아들을 데려오기로 결심하고 이미 날이 저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산으로 향했다. 안정이 ‘곤령동(坤靈洞)’으로 가면서 어린 공자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울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동굴에 들어가 보니 공자가 호랑이 품에 안겨 호랑이 젖을 맛있게 빨고 있는 게 아닌가? 호랑이도 조심스레 아기 공자의 몸을 핥고 있었다. 때가 8월 중추라 모기가 많았다. 독수리 한 마리가 아기 공자의 몸을 물까봐 아기 옆에서 날개를 저으며 모기들을 쫓아내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신화 같은 전설이 민간에서 전해오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이는 옛사람들이 공자를 지극히 존경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리라. 공자가 유학의 비조인 까닭에 공자의 출생도 자연스레 예사롭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민간 전설은 역시 전설일 뿐이다. 그런데 중국 정사서인 사마천의 『사기․공자세가』에도 이런 기록이 보인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남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쓰지는 않았다. 여러 번 조사를 거친 후 사실이 증명된다 싶으면 기록하였다는 것이 일반 학자들의 평가다. 그런데 사마천조차 세상을 놀라게 하는 관점을 스스럼없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노나라의 평창향(平昌鄕) 추읍(陬邑)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송나라 사람 공방숙(孔方叔)이다. 방숙은 백하(伯夏)를 낳았고 백하는 숙양흘(叔梁紇)을 낳았다. 흘(紇)은 안씨(顔氏)녀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 이들은 이구(尼丘)에 기도해 공자를 얻었다. 공자는 노(魯) 양공(襄公) 22년(BC 551)에 태어났다. 태어남에 머리의 정수리 가운데가 움푹 파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구(丘)라 했다. 자는 중니(仲尼)이고 성은 공(孔)이다.”

 

바로 만세에 추앙받는 성인 공부자가 혼인을 하지 않고 낳은 사생아라는 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천하의 유학자들은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로 사마천은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 진솔하며 엄격했다. 그 본인도 어려움을 여러 번 겪어 말재주를 부려 환심을 사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세에 ‘무운(無韻)의 이소(離騷)’라 칭송하는 『사기』를 남긴 것이다. 사마천은 공자가 세상을 뜬 지 400여 년밖에 되지 않아 시대적으로 보면 그리 오래됐다고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사마천 당시에는 ‘독존유술(獨存儒術)’의 기본 정책인 시대인지라 사마천이 느닷없이 ‘야합’이라는 말을 정사로 기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거 없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사마천이 ‘야합’을 말한 후 많은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다. 물론 찬동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대의 사학가 사마정(司馬貞)은 『사기색은』에서 숙양흘은 늙었고 안정은 어려 정식 결혼을 못했기 때문에 야합이라 하여 예의에 맞지 않았음을 말하려고 하였다고 보았다. 무슨 말인고 하면, 남자는 너무 나이가 들고 여자는 어려 나이차가 너무 나니 예교에 어긋난 것이라 하여 야합이라 하였다는 말이다. 당대의 지리학자이면서 사학자인 장수절(張守節)도 이런 관점을 견지했다. 그는 남성이 64세를 넘겨 결혼을 하면 모두 야합이라 한다고 했다. 숙양흘이 안정과 결합할 때 군인 출신으로 신체가 건강하여 생육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미 너무 늙어 합법적인 부부였다고 하더라도 공자는 여전히 ‘야합’하여 난 아들이라고 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해석은 견강부회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냥 공자가 사생아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했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공자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공자 자신도 ‘나는 어릴 적에 빈천하였다[吾少也賤(오소야천)]’이라 하였던 것처럼 안정의 가정형편이 무척 곤궁하였고 군인 출신인 숙양흘이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났기 때문에 안정은 정실의 위치에 설 수 없었다고 본다. 심지어 첩이라는 자격도 억지로 붙인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즉 공자의 어머니 안정은 무척 궁핍했고 지위도 낮았다.

 

둘째, 안정은 오랫동안 공자에게 부친 묘소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다. 이는 어머니가 공 씨 집안과는 떨어져서 독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안정이 일정한 지위가 있거나 분명한 명분이 있었다면 어찌 공 씨 집안에서 같이 살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공자 부친의 묘소를 숨길 필요가 있었겠는가? 이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기가 난처했었던 어떤 일이 있었음을 뜻한다. 심지어 아들이 자기 아버지에 대해 묻는 것조차 염려했을 수도 있다.

 

셋째, 숙양흘이 죽은 후 안정은 장례를 치르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미 자기 남편에게 아무런 감정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어쩌면 안정은 숙양흘과 강압적으로 결합을 하여 공자를 낳았을 수도 있다. 이산(尼山)에서 기도할 때 이미 부적절한 일이 발생하고 난 후일 수도 있고.

 

어떤 학자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기도 한다. 공자가 출생할 때 아버지인 공양흘은 70여 세의 노인이었고 어머니 안정은 16세였다. 안정이 숙양흘에게 시집을 간 것은 처로써가 아니라 첩으로 갔다고 본다. 그렇기에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하면서 공자를 낳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사실 이런 것들이 뭐 그리 중요할까? 야합이 그리 잘못된 것인가? 사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자기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던가? 어떻게 태어났는가 하는 문제는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의 인품, 학문, 도덕, 사업 등과 필연적 연관관계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공자가 야합하여 태어났다고 해도 무엇이 문제가 될 것이며 또 뭐 그리 영예롭지 못한 것이라 폄하할 수 있겠는가. 공자의 부모가 누가 되었든 공자가 사상가로써 교육자로써의 숭고한 위치는 변함이 없을 것인데. 만세에 이름을 떨친 공자는 어디서, 어떻게 왔던 지금도 인류의 표상인 성인임엔. <26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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