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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3)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피휘(避諱)는 중국 고대의 특수한 풍속이다. 말을 할 때나 문장을 쓸 때 군주와 존장의 이름을 직접 입에 담거나 글로 쓸 수 없었다. 즉 피해야 하는 글자다. 예를 들어 『홍루몽』중 임대옥(林黛玉)의 모친 이름이 ‘敏(민)’인데 임대옥이 이 글자를 대하면 ‘密(밀)’이나 ‘米(미)’로 읽었다. 또 한나라 무제의 이름은 ‘徹(철)’인데 관작 이름인 철후(徹侯)를 통후(通侯)라 고쳤다. 공자의 이름인 ‘丘(구)’도 고문헌 중에는 글자의 획을 빠뜨려 ‘正(정)’과 같이 썼다. 기휘(忌諱)를 범하면 가볍게는 감옥에 가든지 유배를 당하고 중하면 목이 잘리거나 구족을 멸하는 화를 당했다. 따라서 고대에 피휘는 중요한 상식이었고 신민이 된 자는 반드시 알아야만 됐었다.

 

 

이런 피휘의 문화현상을 통해 우리는 봉건문화의 전제 정치의 잔혹성과 봉건 윤리 예교의 황당무계하고 비열함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도 피휘를 이해하는 지식이 있다면 사서 자료의 내원을 정확하게 추론할 수 있고 고서 판본의 진위를 감정할 수 있으며 역사의 진상을 고증할 수 있다. 이처럼 피휘를 연구하는 것은 중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중국인들은 ‘가휘(家諱)’를 피하는데 웃지 못 할 일들이 많다. 남송의 전양신(錢良臣)의 이름을 피휘하기 위해 그의 아들이 경서와 사서를 읽을 때 ‘良臣[어진 신하]’이란 두 글자가 나오면 ‘아버지(爹爹)’라고 읽었다고 한다. 하루는 『맹자』를 읽다가 “今之所謂良臣(금지소위양신) 지금은 이른바 좋은 신하요 古之所謂民賊也(고지소위민적야) 옛날에는 이른바 백성의 도적이라.”는 구절이 나오자 “今之所謂爹爹(금지소위다다) 지금 아버지라는 사람은 古之所謂民賊也(고지소위민적야) 옛날에는 백성의 도적이었다.”라고 읽었다. 단순히 피휘를 위해 자신이 무엇을 읽고 있으며 무슨 뜻이 되는지도 모르는 지경까지 된다는 것은 쓴웃음이 나올밖에.

 

시대에 따라 특수한 피휘가 있기도 했다. 어떤 규칙도 없고 도리에 맞지도 않은 순전히 황제의 개인 호오(好惡)에 따르거나 심지어 감정 변화에 따라 만들어 지기도 하였다. 명(明)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빈천한 신분에서 출세하였던 인물로 어릴 적에 출가하여 중이 됐었다. 그래서 이에 대해 특별한 기휘가 있었다. 청나라 조익(趙翼)의 『입이사찰기』기록에 보면 항주의 교수 서일기(徐一蘷)가 하표에 “光天之下,天生聖人,爲世作則(광천지하,천생성인,위세작칙)”라 하였는데 뜻은 “빛이 가득한 천하에 하늘이 성인을 낳아 세상을 위해 법칙을 만들도다.”라는 칭송하는 글이다. 그런데 ‘광(光)’은 대머리를, ‘생(生)’은 스님의 ‘승(僧)’을, ‘칙(則)’은 도적인 ‘적(賊)’을 빗댄 것이라 하여 참수해 버렸다.

 

청(淸)나라 때부터 피휘의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학자들이 중시하게 됐고 고염무(顧炎武), 전대은(錢大昕), 조익(趙翼) 등 학자들이 심도 있게 연구를 하였다. 1928년 초 사학자인 진원(陳垣)은 이런 학문을 ‘피휘학’이라 하여 전문적인 학문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피휘의 풍속은 어디에서 기원하였을까? 이 문제에 관해 학자들은 여전히 논쟁 중이다.

 

어떤 학자들은 피휘의 구습은 원시 무술(巫術) 신앙이나 미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프로이드는 『토템과 금기』에서 원시 씨족의 관념 속에 성명이란 사람이 존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로 여겼기 때문에 이름을 지음으로써 그 존재 혹은 영혼이 있게 되고 동시에 그 이름 자체에 어떤 힘이 존재한다고 믿었다고 하였다. 원시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연에 대해 대단히 경외하였다. 그들이 보기에는 바람, 비, 천둥과 번개, 그리고 사람의 생로병사와 같은 자연 현상 모두 신령이 주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신령들을 맹목적으로 숭배하였고 걸핏하면 이것저것 의심하여 신령들이 화가 나면 자신들에게 보복을 가한다고 믿었다.

 

원시인들은 적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되면 무술(巫術)을 이용하여 자신을 해칠 수 있다고 믿었고 귀신들도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되어 영혼을 흡수해 버리면 어떤 치료도 소용없이 죽는다고 여겼다. 반대로 적들의 이름이나 귀신의 이름을 알게 되면 그들을 제압하거나 겁주어 멀리 떨어지게 만들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런 까닭에 원시인들은 알길 없는 재난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면서 자신의 진짜 이름을 숨기고 꺼리어 감추었다. 그래서 성명에 대한 금기가 생겨났고 점차 관습이 되고 규칙이 되었다. 이에 수응하여 피휘도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원시시대의 피휘에 대해 분석한 결과에 대한 믿을 만한 물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어 여러 학자들에 의해 반박 당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피휘는 하(夏)나라 상(商)나라에서 기원한다고 본다. 전희언(錢希言)은 『희하』에서 피휘의 풍속은 하나라 상나라 때 이미 있었다고 하면서 『산해경』에서 하후계(夏后啓)를 왕왕 하후개(夏后開)로 썼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진광견(陳光堅)은 「휘원약설」문장에서 피휘가 하․상시대에서 비롯됐다는 논점은 근거가 부족하다고 반박하였다. 『상서』에는 하나라 상나라 군주의 이름을 있는 그대로 쓰고 피휘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상서』는 한진(漢晉) 때에 전해진 것으로 그 내용은 위작들이 섞여 있어 믿을 수 없다. 그렇지만 한진 시기에 피휘는 이미 보편화 돼 있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상서』에 피휘 습속이 섞여 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주의를 끌었을 것이 분명하고 심지어 고증을 하거나 자세히 해석을 한 글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 방면의 문자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세 번째 관점은 피휘가 서주시대에 비롯됐다는 것이다. 『좌전․환공6년』에 “ 주나라 사람은 휘로써 신을 섬기며 이름은 그 사람이 죽자 기휘했습니다.(周人以諱事神,名終將諱之.)”라는 글이 보이고, 『단궁하』에 “죽어 곡을 하고 나면 피휘하였고 산 사람은 일이 끝나면 귀신의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卒哭而諱,生事畢而鬼事始也)”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송대 홍매(洪邁)는 『용재삼필․제왕휘명』에서 피휘 제도는 주나라 때 시작됐고 죽은 자에 대해 피휘했다고 하였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피휘가 그리 엄격하지 않았다.

 

주나라 때는 귀신과 죽은 자의 이름을 피휘하는 것은 자주 볼 수 있으나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규칙이 없었다. 주나라 사람들이 귀신의 이름을 피휘한 것은 귀신을 즐겁게 하여 신령의 보호를 받기 위함 이었다. 동시에 살아생전에 사람들의 목숨을 관장했던 인물들에 대해 그들이 죽은 후에도 신령과 같은 능력을 보유하여 신통력이 끝이 없기 때문에 함부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죽은 자의 이름에 대해 피휘하는 습속이 생겼다고 본다.

 

네 번째는 춘추시기에 피휘가 생겼다는 관점이다. 『좌전․환공6년』에 노나라 헌공의 이름이 구(具)이고 노 무공의 이름이 오(敖)였는데 피휘의 습속으로 노나라에서는 구, 오라는 이름을 가진 두 개의 산 이름을 없애고 그 지방의 이름으로 산명을 바꿨다는 기록이 있다. 이 예를 가지고 춘추시대에 이미 사람들은 피휘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좌전․진진지전』에서 왕손만(王孫滿)이란 동주시대의 인물이 나오는데 서주시대의 목왕(穆王) 이름이 ‘滿(만)’이다. 만약 피휘가 춘추시대에서 비롯됐다면 선왕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피휘를 하지 않은 까닭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반박한다. 당연히 춘추시대에는 피휘의 습속이 없었거나 미미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관점은 피휘라는 제도가 고정된 것은 진한시대라 보는 것이다. 진시황의 아버지인 장양왕(莊襄王)의 이름이 자초(子楚)다. 이에 진나라 때는 ‘楚(초)’를 모두 ‘荊(형)’이라 바꿨다. 한나라 때에는 고조의 이름을 피휘하여 ‘邦(방)’을 ‘國(국)’으로 모두 고쳤다. 예를 들어 『논어․미자』의 원문이 “어찌 부모의 나라를 떠날 필요가 있겠소(何必去父母之邦)”라 돼 있는데 한나라 때의 석비에는 모두 “何必去父母之國”이라 바꿨다. 이렇게 보면 중앙집권제도가 진한시기에 공고하게 되면서 피휘도 통치자들이 중시하게 되었고 점차 모든 사회의 보편적 제도로 뿌리를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휘의 풍습은 당(唐)나라, 송(宋)나라와 청(淸)나라 때 가장 성행했다. 이 시기는 봉건통치가 가장 강했던 때이기도 하고 봉건 예교가 가장 엄격한 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피휘라는 풍속을 공고히 하면서 통치를 강화하는, 즉 피휘라는 기이한 풍습을 가지고 사상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휘라는 기상천외의 방법은 2천년 동안 통치자와 집권세력의 권위를 위해 활용하면서 중국뿐만 아니라 동양사회의 사상의 자유를 말살했다. <24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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