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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명의 부모인문학(14) ... 가치

가치

 

엄마는 아빠와 딸이 시소놀이하고 있는 장면을 좀 떨어져서 바라보고 있다. 몸무게로 따지면 딸아이보다 세 배쯤 될 아빠. 몸집 큰 아빠가 궁둥이를 앞으로 밀어 시소의 균형을 맞춘다. 이렇게 딸에게로 다가간다. 시소 밖에서 엄마는 몸무게가 아닌 부모역할의 무게로 아빠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재본다. 몸무게보다 훨씬 더 무거운 부모역할과 그 가치는 아이에게로 더 다가가게 한다. 엄마도 아빠 앞에 앉아본다. 그리고 아이에게 부모가 함께 다가가 앉아본다. 아이에게로 다가가야 시소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 그러다 건너편 아이에게로 넘어가 아빠를 아빠 건너편에서 딸과 함께 마주본다. 움직임-다가오거나 멀어짐-으로 시소의 균형이 잡힌다. 엄마·아빠의 다가감으로 가족의 균형을 잡는다. 아빠의 역할, 엄마의 역할, 부모가 합심해서 해야 할 역할이 그네에 얹어져 출렁거린다. 제 몫을 하며 사는 일은 다가가거나 물러서거나와 같이 움직임으로서 삶의 균형을 잡아가는 일이다.

 

 

시소

 

“넌 나에게 치욕을 안겨줘서는 안 돼! 너 때문에 난 밤잠을 못자고 있단다. 나는 너에 대해서 책임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네가 무능한 사람이 되면 그 모든 책임은 내게로 돌아온단다.”

 

소설 <부모와의 이별>에서 엄마가 자식에게 하는 대사다. 우리의 부모, 특히 엄마가 떠오른다. 더욱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고 유별날수록 그 부모는 그 역할에만 함몰돼 사랑은 집착으로, 또 맹목으로 변하곤 한다. 상대에 대한 집착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오히려 제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든 정당화한다. 사랑이란 가면이 덧씌워져 자기의 행동을 아름답게 미화화하기도 한다. 집중과 집착의 차이, 집중하되 집착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 미묘한 차이의 조율이 지혜다.

 

“내가 널 얼마나~~~”
“내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네게~~~”

 

‘이러니 너는 나를 실망시켜서는 안 되며, 꼭 성공하여 내게 보답해야 할 의무가 있어.’ 자식에게 짐을 지운다. 서양의 한 소설에선 이를 ‘넌 나에게 치욕을 줘서는 안 돼!’라고 다르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집착은 부모역할에서의 가치를 쉽게 지워버리게 한다. 가치보다는 타인의식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자식의 삶이 아니라 소위 잘 나간다는 남의 삶을 이식시키고 성형하는 것이다. 부모의 뜻대로 따라와 줄 아이가 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으며, 그렇게 따라와 준다한들 그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자식의 삶이 아니라 부모의 삶일 뿐이다. 타인의 삶일 뿐이다. 아이에겐 부모도 타인이다.

 

부모의 선행교육

 

이제 막 결혼하려는, 또는 갓 결혼한, 그리고 곧 자녀를 얻게 될 예비부모들의 귀감 또는 타산지석이 먼저 아이를 키워본 부모들의 경험에 담겨있다. 이것은 귀담아 새겨들어야 하지만, 그들의 말 속에서 진실성과 솔직함의 필터로 제거하고 걸러들어야 한다는 전제는 필수다. 부모의 자식사랑은 지나치게 과장되었거나 거짓으로 감춰지기 일수이기 때문이다. 다른 부모의 자식사랑의 귀감 또는 타산지석은 부모의 자식사랑에 대한 그릇된 선행교육이 될 수도 있다.

 

‘오늘 날의 시대정신은 현대인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현대인은 과중한 일로 정신집중을 잃어버린 산만한 인간들이다. 때문에 이러한 끊임없는 외부 영향에 대하여 응당 있어야 할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사상에 대한 요구도 내세울 수 없다고 믿게 된다.’(슈바이처)

 

자식에 대한 최고의 교육법은 방목이라고 말하는 한 대학교수, 그리고 그 옆엔 그의 아들이 붙어 앉아있다. 노랑머리의 재수생. 재수는 절대 안 시킨다는 교수 아버지의 말과는 달리 그래도 대학은 간다고 하니 재수생이랄 수밖에. 좌중을 의식적으로 리드하려는 아빠를 따라 아들도 우쭐하며 당당해 보인다.
“내 삶은 내가 사는 거니까요.”

 

아들이 독일에서 인정하는 최고의 승마실력을 갖고 있다는 교수의 말 속엔 과장법으로 넘쳐나고, 이러한 아빠를 그 아들도 그대로 닮아있었다.

 

“독일서 배운 것을 아빠와 함께 여기 한국에 이식시켜 놓을 겁니다.”
옆에 있던 엄마가 결국 한 마디 한다.

 

“니가 뭘 가르친다고 해. 대학이나 들어가!”
내년에 자기 대학에 입학시키면 된다는 교수 아버지가 하는 말에 오가던 대화는 침묵으로 잠시 끊겼다. 그 침묵을 깬 이도 대학교수다.

 

“서울대 다닌다고 했나? 요즘 서울대 나와도 취직하기 힘들다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지. 지금 시대가 바뀌어서 공부가 다는 아냐!”

 

그 자리엔 또 다른 가족이 함께 하고 있었다. 교수의 노랑머리 아들과 비슷한 또래의 대학생에게 관심을 돌린다.

 

“예. 취직하기 힘든가 봐요.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공부밖에 없는 학생 신분이니까요.”
노랑머리의 엄마가 제 아들을 좀 가르쳐줄 수 있냐고 하자, 남편인 교수아버지가 끼어든다. 그의 자존심일 게다.

 

“그러지 말고 내 아들한테 말 배워라. 체력이 국력이야. 젊은 놈의 몸이 그렇게 비실거려서야 쯧쯧. 아들, 저 형한테 승마 가르쳐줄 수 있지?”
“예. 그럼요. 기초부터 철저히 가르쳐야지요.”
“승마선수할 것도 아닌데, 뭘. 고맙다. 기회가 되면 배우고 싶다. 근데 나는 말을 탄다는 게 아직 익숙지 않아. 아직 어려서 그런지 동물학대처럼 여겨져서...”
그 재수생 아들의 대답에, 다른 대학생의 대답이다.

 

“공부만 해서 속이 아주 좁구나.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범생이로군. 요즘 공부 좀 한다는 애들 저런 점이 문제야. 아주 허약하게 키워졌기 때문이지. 승마가 동물학대라니?”

 

대학교수는 방목해서 기른 아들의 자식자랑을 계속 늘어놓았다. 그곳에 같이 앉아있던 30대의 다른 청년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고등학교 땐 말만 탔니? 독일에서 최고로 말을 잘 탔다면서 왜 한국엔 들어왔지?”
전혀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방목으로 키운 아이답다.

 

“제주도가 말의 고향 아닙니까?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았으니까요.”
결국 그 자리는 다른 사람도 아닌 노랑머리의 엄마가 화를 내며 일어나면서 파장을 맞았다.

 

“방목 좋아하시네. 제 하자는 대로 내버려둔 게 방목인가? 남들 다가는 흔하디흔한 대학도 못가는 주제에 입만 살아서... 당신 대학에 어떻게 집어넣을지 모르겠지만, 들여보내놓고 입방아에나 오르지 않게 당신 아들 입단속이나 잘 시켜요.”

 

대학교수 남편은 말로도 아내에게 지지 않았다. 이 또한 그는 그의 입으로 자존심이라고 말한다.
“능력 있는 내가 다 알아서 할 일. 당신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집어먹으면 돼!”

 

또 다른 형태의 산만한 가족을 본다. 그들의 방목장에는 부모에게선 무책임이 보이며 그 자식에게선 무지·무례함만 보인다. 방목은 자유가 아니라 무질서가 된다. 방목은 코스모스가 아니라 카오스가 된다. 방목이 아니라 방치가 된다. 방치는 무관심이 나타내는 무책임한 행동이지 않은가. 슈바이처가 얘기했듯이, 자기 자신의 사상을 내세우지 못하는 게 현대인이기도 하면서 주저 없이 무사상의 자기주장을 앞세우는 이들이 같은 현대인으로 공존하고 있다. 아버지를 빼닮은 아들, 두 부자 간에서 그릇된 시대정신의 전래·전수를 엿본다. 무조건 자식감싸기는 부모의 자기변명이 될 수 있다. ‘무조건 자식감싸기’가 부모역할인 양 되어버린 이즈음 자식자랑이 자식사랑으로 포장·치장되어 과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예비 부모들은 새겨듣고 보아야 한다.

 

많이 듣되 곧이곧대로 무조건 듣진 말라는 말이다. 경청하되 걸러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걸러듣는 것도 지혜다.

 

 

정말 소중한 가치

 

‘그대의 탄생, 그 의미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대가 세계에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 스스로 배우게 될 것이다.’(아렌트)

 

반복적으로, 짜인 대로, 맹목적인 것에 갇혀버리면 그 때부터 사람은 죽음의 힘 쪽으로 기울게 된다고 아렌트는 덧붙인다. 반복, 짜인 대로, 맹목... 갇히게 하는 곳도 우선 가정이다. 부모의 부정적인 태도나 습관을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맹목적으로 전수받는다. 반대로 부모의 긍정적인 면 역시 가정생활에서 터득한다. 부정과 긍정의 요소는 대개 가정마다 다 공유하고 있으며 이를 보완·보충·계발해주는 것이 학교교육이라지만... 긍정과 부정은 가정 안에 섞여 있다. 가릴 줄 알아야 한다. 가릴 줄 아는 것도 지혜다.

 

‘이미 고등학생들의 머리는 굳어져 있다.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지식인데, 이마저 학원에 빼앗기고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할 일이란 무엇인가? 등하교 지도밖에 없는 것 같다.’(고등학교 교사)

 

가정, 특히 초등학교 이전 가정에서의 교육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가치관이 이때 형성되기 때문이다. 대체로 가정에서의 교육이 어긋나있으면 학교교육까지 그대로 연장된다. 바뀐다하더라도 이것은 극히 예외이며 엄청난 진통을 겪어야한다. 지식은 뒤늦게 훗날에라도 채울 수 있다. 그러나 가치를 아는 것, 즉 태어난 가치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하는 것은 이를수록 좋다. 이 역시 아이 몫이 아니라 부모의 몫이다.

부모의 행동에서 배우는 것이기에 아이들 앞에서 자연스러워야한다. 행동으로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가치의 개념을 전혀 모르고 있는 아이들이지만 부모의 행동으로 가치, 그리고 가치 있는 삶이 어렴풋하게 그러나 강력하게 각인된다. 아이로서 개념도 모르고 터득하기에 어렴풋하지만 인상적으로는 강하게 남는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가치는 너무나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다름 아닌 부모의 방관으로 부모에 의해 무시된다.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에는 풍부함이 깃들어있다.’(코란)

 

남이 가지 않는 길로 가라 함을 그저 시 하나 외우는 것으로 그친다. 의미는 요령에 묻힌다. 시험문제에 맞는 정답만 쓰고 나면 그뿐이다. 현실은 좋아하는 일만 하라고 부추기는 것밖에 없다. 자식을 똑똑하게 키운다는 부모일수록 좋아하지 않을, 보이지 않는 가치보다는 눈에 보이는 좋아하는 것(대학·자격증·직업·직장 등)에 더 깊이 빠져 그쪽으로만 이끌려하며, 이것이 올바른 자식교육이자 자식사랑이라고 찰떡같이 여긴다.

 

내면화

 

엄마는 다시 시소놀이를 즐기는 딸과 아버지를 본다. 저 아이를 편하게 태워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 아이를 편하게 살 수 있게 할 방안은 무엇일까? 저 아이를 보람되게 살게 할 방도는 또 무엇일까? 저 아이의 삶이 스스로 만족하고 의미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딸을 바라본다. 저 아이의 얼굴에 웃음을 짓게 해주고 싶다. 그것들은 많다. 값어치는 다 다르다. 그 중 가장 소중한 가치, 가장 값나가는 가치는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엄마는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 화장을 하기 위해서 보는 얼굴이 아닌 자기 내면을 얼마 만에 들여다보는 거울인가. 내 자신을 얼마나 아끼고 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어본다. 자식사랑 앞에 내려놓았던 나의 존재를 오랜만에, 아마 처음으로 더듬어본다. 엄마가 아닌 나 자신을.

내가 따뜻해야 자식이 따뜻해질 수 있고,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길 때 그 삶의 소중함을 자식들도 배우고 익히며 깨우치는 게 아닐까.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존중하지 않고 어찌 자식을 사랑하며 자식의 삶에 관여할 수 있단 말인가, 자각한다.

 

‘사랑하기 전에 자각이 있어야 하며, 자각 후의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으로 가는 길이기에 사랑의 전제조건은 자각이다. 즉 자각 없이 사랑은 없다.’(라즈니쉬)

 

일반적으로, 젊어서의 행복은 그저 자기만 좋으면 그만인 것으로 알지만 나이가 들면서, 아이를 키우면서 행복의 가치는 보람과 의미에서 더 찾게 된다고 한다. 보람과 의미로서의 가치, 아이들에게, 그토록 사랑하는 자식에게 이 가치를, 뒤늦게 깨우친 가치를 조금이라도 일찍 전해줘야 하는 게 부모의 참된 역할이 아닐까.

 

자식을 다 키워 대학까지 마쳐주고도 더 걱정하는 부모들이 주변엔 많다. 결혼 후에도 자식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부모들도 많다. 왜일까? 자식을 책임져야한다는 의식은 참으로 고귀하고 아름답지만 이는 물질적 기준으로 자식을 이끌어왔던 아이의 어릴 적 생각이나 행동의 연장은 아닌지. 가치관은 처음 비틀어지면 끝은 더 뒤틀리게 돼있다. 부모가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의 철학이란 소신을 말한다.

자식사랑이 부모의 삶을 옭아맨다면 이건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다. 사랑은 더불어 나누고 함께 즐겁고 같이 존중하는 것이다. 일방적이어서는 진정한 사랑이랄 수 없다. 부모사랑 역시 짝사랑이나 외사랑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사랑이라 해도 아픔은 그저 아픔, 마음의 상처일 뿐이다. 자식에게 온전한 사랑을 전수하는 일도 부모의 몫이거늘, 짝사랑이 될 부모사랑은 자식에게도 부담스럽다.

엄마는 오르내리는 시소를 보며 밝게 웃는 어린 딸을 본다. 저 아이가 자라 지금처럼 웃고 있을 어른이 된 딸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마주앉은 아빠를 본다. 아빠는 딸의 어떤 모습으로 흐뭇해할 수 있을까?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이기도 하다. 저 아이를, 우리 아이들을 진정 웃게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바로 부모가 먼저 웃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시소를 보며 깨닫는다.

내가 웃으려면 나를 우선 사랑해야 한다. 자식사랑 이전에 나를 먼저 사랑해야 한다. 웃음은 자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만족이며 긍정적인 삶의 표출이다. 내가 기뻐함으로서 남도 즐겁게 하는 것이 웃음이다. 내가 웃지 못하면서 남을 웃기려는 웃음은 가짜다. 코미디다. 가짜, 가식 웃음이 아닌 진짜 진품 웃음! 가짜를 자식에게 물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삶의 긍정이란, 삶에 참다운 가치를 부여하려고 외경심을 갖고 자기부터 내면화하는 일이다. 이와 동시에 인간은 제대로 살려고 하려는 모든 남의 의지에 대해서도 자기 것을 대했을 때와 똑같은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가져야 한다.’(슈바이처)

 

가치의 앎은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며, 아울러 이런 부모를 보고 자라는 자식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지는 것이 바로 가치의 앎이며 가치 있는 삶이다.

 

<엄마 먼저>

 

인형을 만들고 있는 한 여 선생에게,
“태교에 아주 좋겠는데요.”

 

인형을 만들면서 예비엄마는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절로 웃고 있을 배부른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받아들이기에 따라 다 달라요.”

보건소에서 임산부를 상대로 인형만들기로 강의를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아이를 가진 엄마들의 표정이 다들 무거웠어요. 그것도 어둡게 말입니다. 이런 엄마들한테 무엇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 고민만 하다가 마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드는 강의였지요.”

 

자기 아이를 갖는다는 게 얼마나 신기하고 신나는 일이냐고 했더니 표정이 여전히 달라지지 않더란다. 한 여자가 물었다.
“그래요? 저는 부담만 되는데요. 어떻게 키울지 암담하기까지 합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의 부담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부담으로 더 큰 기쁨이 감춰져서야 되겠느냐며,
“태어날 아이를 생각해보세요. 어떠세요? 이것만으로도 기쁘지 않은가요?”

 

강의를 듣는 예비엄마들의 표정이 별반 달라지지 않더란다. 곧 세상에 나올 아이가 갖고 놀 인형을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말을 해도 역시 별 반응이 없다. 수강 임산부는 약 삼십 명쯤 되었다. 다행이도 강의를 끝내고 나오려는데 한 사람이 따라 나오며,

“강의 잘 들었어요. 특히 눈코입이 없는데도 표정이 살아있는 듯한 인형에 감명 깊었습니다.”더 배우고 싶다고 했고 인형이 맺어준 인연은 아이를 낳은 뒤에도 오 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단다.

“선생님 강의를 뱃속에서 저하고 함께 들었던 아이가 벌써 여섯 살이에요. 강의 때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남에게 맡기지 않고 아직까지 아이를 제가 돌보고 있는데 여섯 살이 되니 어린이집에 보내야하지 않을까 해서 선생님께 부탁하려고 하는데... 지금쯤 괜찮을까요?”

어린이집을 찾아온 날,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의 손에는 엄마가 손수 만든 인형이 들려있었다.

 

“삼십 명 중 한 명 건졌지요.”
웃지만 선생의 얼굴이 밝지만은 않다.

“삼십 명 중 스물아홉 명의 엄마는 아이들을 일찌감치 어린이집이라는, 아이들에게 아주 낯선 곳으로 보내지요.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을 이해 못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가치기준에 돈이 우선 하니 이게 문제지요. 그래서 강의 때 표정이 다들 그랬나봐요.”

사랑스럽다는 아이, 말로만 그럴 게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아이들에게 해주며 사는지 묻고 싶어진단다. <14편으로 이어집니다>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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