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수)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0)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구정(九鼎)은 중국 고대 전설 속에 최초로 보인다. 하(夏)나라 우(禹)왕이 구정을 주조하여 구주(九州)를 상징으로 삼았고 삼대 때에 전국의 보물로 받들었다고 한다. 진(秦)나라가 서주(西周)를 공략할 때 구정을 얻어 그중 1정은 사수(泗水)에 빠졌고 나머지 8정은 행방불명이 됐다고 한다.

 

중국 고대에 청동 공예는 무척 발달했다. 청동으로 제작된 기명(器皿)은 후세인들의 국보급 문물이 되었다. 정(鼎)도 그중 하나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정은 원시사회의 취사도구 혹은 음식물을 담는 그릇으로 대부분 진흙을 구워 만들었다. 이후 상주(商周)시기에 야금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하자 정을 청동으로 주조하였다. 그 시기의 정은 귀족층의 권력의 상징이며 등급의 표지가 되었고 평민 백성은 사용할 수 없었다.

현재 중국역사박물관에 진열된 사모무방(司母戊方)정은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정동기로 지금으로부터 300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 이 정은 높이가 1.33미터, 무게 875킬로그램으로 상나라 왕 문정(文丁)이 자기 어머니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여기서 얘기하고자 하는 구정은 아홉 개의 커다란 ‘鼎’으로 사모무방정 제작 연대보다도 앞서고 주조형태도 더 정교하다. 전하는 바에 다르면 그 구정은 우임금의 아들 계(啓)가 주조하였다고 한다.

 

『춘추좌전』에 하나라 초기 하나라 왕은 천하를 구주로 나누고 주마다 주목(州牧)을 설치했다고 한다.

하나라 왕은 구주 목사에게 청동을 헌납 받고 구정을 주조하였다. 9개 정 마다 해당 주를 상징하기 위해 그 주의 산천과 명승지를 반영할 수 있도록 그림을 새겼다. 이를 위해 먼저 전국 각 주의 명산대천과 명승지, 신기한 물건을 그려오게 한 후 조각가에게 그것을 본떠 구정에 새기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구정을 보면 현지의 풍속, 귀신과 신령을 알게 되어 흉함을 피하고 길함을 추구도록 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사업은 천제의 칭찬을 받음으로써 하나라도 하늘의 보우를 받게 됐다고 한다.

 

후대사람들이 자주 ‘문정(問鼎)’이라는 말을 쓰는데 정권을 노리는 것을 의미하고 ‘정정(定鼎)’은 정권을 세우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전고가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기원전 11세기, 무왕(武王)이 주(紂)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얻어 주(周)나라를 세웠다. 당시 그는 국토를 자신의 친족과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분봉하여 많은 제후국이 생겨났다. 춘추시기에 제후 세력이 흥기하고 서로 패권을 다투게 되자 주나라의 천자는 천하를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초(楚)나라의 장왕(莊王)이 즉위한 후 용(庸)을 멸망시키고 송(宋)을 패퇴시킨 후 군대를 이끌고 육혼(陸渾)의 융(戎)을 공격하려 하였다. 그때 주나라 도성을 지날 때 유명무실화 된 주나라 천자는 놀라 대부 왕손만(王孫滿)을 성 밖으로 보내 초나라 군대를 안위하게 하였다.
 
당시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장왕은 서슬 퍼렇게 왕손만에게 물었다. “대우가 구정을 주조하니 오대로 전해 내려오게 되어 후세의 보물이 되었다고 들었소. 현재 낙읍(洛邑)에 진열돼 있다는데 정의 형태가 어떻소? 크기와 무게는 얼마나 되고? 내게 얘기 좀 해주시지.”

왕손만은 말속에 숨은 뜻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게 대답하였다. “하, 상, 주 삼대는 덕으로 유지하였는바 어찌 정에 의지했겠습니까? 이전에 대우가 천하를 통치할 때 아홉 개 주가 그 주에서 나는 청동을 바치자 구정을 주조한 것입니다. 하나라 걸(桀)이 무도하여 정은 상의 소유가 되었고 ; 상나라의 주(紂)가 폭정을 일삼아 정은 또 주나라에 전하게 된 것입니다. 도덕이 있으면 정이 작다하더라도 무게가 있게 되는 것이고 만약 도덕이 없다면 정이 커다란들 가볍게 되는 것입니다. 성왕(成王)이 정을 겹욕(郟鄏)에 안치한 후 이미 30대, 7백년을 이어왔습니다. 지금 주나라 천자의 지위가 쇠약해졌으나 아직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시기가 되지 않았습니다. 정의 경중에 대해 묻고 싶으신 것은 아니신 거지요?”

왕손만이 이치가 정당하고 엄숙하게 말을 하자 장왕의 분수에 맞지 않은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그 스스로도 주나라를 엎을 실력을 갖추지 못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기를 내리고 북소리를 멈추어 하직을 고했다.

 

 

정은 이처럼 중요했다. 정치적 의미도 강했다. 구정은 가치를 논할 수 없는 보물이요 국가를 안정시키는 지보였다. 그러나 주나라 이후 구정은 행방불명이 돼 버렸다.

 

역대 사적에 구정의 행방에 대한 자료는 많으나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되기에는 미약하다. 추측은 많으나 귀납하면 대체로 두 가지 설로 집약할 수 있다.

 

하나는 구정은 동주(東周)가 멸망하기 이전에 사라졌다는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봉선서』에서 “주(周)의 덕이 쇠하고 송(宋)의 사직이 황폐해지자 정은 가라앉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곧 구정은 동주 말기에 이미 없어졌다는 것이다.

반고(班固)는 『한서』에서 사마천의 논법을 보충하여 주 현왕(顯王) 42년 구정은 팽성(彭城) 사수에 가라앉았다고 하였다. 후에 진시황이 순시하던 중 팽성을 지날 때 몇 천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사수에서 건지려고 하였으나 헛수고로 끝났다.

서한 때 신항평(辛恒平)은 “주나라 정이 사수에 가라앉았는데 지금 황하가 물길을 바꿔 사수하고 통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동북 분음(汾陰)을 보니 금빛이 찬란하니 어쩌면 주나라의 정이 다시 출현할 것 모양입니다.”라고 말하자 한 문제가 이를 믿고 음분에 묘를 세우고 정이 강림하기를 기원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까지 정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청대 학자 왕선겸(王先謙)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주 왕실은 강대해진 방국(邦國)이 노릴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더불어 재정이 곤란하게 되어 수지가 맞지 않자 구정을 녹여 동전을 만들고서 대외적으로는 구정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거짓으로 알림으로써 제후국들은 군대를 일으켜 정의 행방을 묻는 것을 방지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믿을 수 없다. 구정은 하나라 초기에 주조된 것으로 형태가 그리 크지 않았을 터인데 동주의 왕이 몇 안 되는 동전을 위해 정을 녹여 동전을 만들 리가 있겠는가? 자기 스스로 천명을 위배했다는 말인가? 구정은 주나라를 안정시키는 보물이다. 천명을 간직하고 있는 신물이다. 그것은 사직과 운명을 같이 한다. 그런데 주나라 왕이 그것을 없앨 수 있겠는가?

 

이런 여러 가지 논점들은 구정이 동주 멸망 이전에 사라졌다는 것에는 일치한다. 그렇다면 구정이 매몰된 지역이 관동(關東)이란 말이 된다. 다른 설도 있다. 구정이 진(秦)나라 말기에 없어졌다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진나라 소왕(昭王) 52년, 주나라 난왕(赧王)이 죽자 진은 낙읍에서 구정을 탈취해 진나라로 옮겼다고 기록한 부분도 있다. 이 말은 앞에 말과 달라 서로 모순된다. 한 번은 진나라와 관련이 있다고 해놓고 또다시 진나라와 관련이 없다고 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진짜로 진나라 말기에 없어졌다면 매몰된 지점은 관중(關中)이거나 아니면 사수 팽성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추측일 뿐이다. 만약 항우가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구정을 팽성으로 옮겼다면 역사서에 이렇게 중요한 기록을 빠뜨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언제 구정이 세상에 나타날 지 알 길이 없다.  <21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관련기사

더보기
93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