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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명의 부모인문학(11) ... 가능성

극복의 딜레마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다. 어느 책에선가는 10살까지 인생의 상당부분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인간은 모든 가능성을 품고 태어난다고 할 수 있겠다. 모든 사람은 수많은 가능성을 갖고 태어나지만 나이가 들면서 환경이나 자기의지부족에 따라 가능성을 줄여가며 제게 맞는 또는 제 것일 수밖에 없는 가능성에 안착해간다.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의 지향이나 방향 그리고 크기와 깊이가 달라질 수 있음을 속담이나 주장이 달리 표현하며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공의 삶을 누구나 바란다. 그 성공의 종류도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모든 성공에 있어 공통점은, 그것은 남이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어린 아이에게 성공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성공을 스스로 찾아가기에는 너무나 이른 나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시기가 삶에서 참으로 중요하다고 한다. 어른으로서의 모양이나 소양을 이미 이 시기에 상당히 갖추게 된다고 보기 때문인데, 이래서 어린 아이의 의지보다는 부모나 선생 등 아이의 주변 인물이나 환경에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맹모삼천도 그 하나의 예이다. 아이에 대한 어른 역할의 강조이다. 유아원이나 유치원·초등학교의 선생은 지식을 통해 대체로 생활인으로서 키우지만, 가정에서는 지혜 등 대체로 삶에 깊이 영향을 준다. 한 개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를 어떤 이유에서든 적절하거나 온전치 못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던 어린이는 훗날 이를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삶의 전환이란 또 다른 시간을 할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하기에 모든 사람에게, 즉 모든 어린이에게 주어진 가능성은 어린 시절에 부모와 선생을 통해 계발되고 발전시켜야함은 극복의 딜레마에서 배운다. 극복의 딜레마는 발전이나 성공에 꼭 필요한 극복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후 청심환

 

어린이집에 있으면서 선생은 단지 학생을 어린이집 안에서만 보살펴주는 것보다 학생과 부모 사이의 중간자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하는 사실을 절감한다. 중간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부모에게 바라기 힘든 객관성이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이 가장 예쁘다지 않는가. 부모의 사랑이 눈을 멀게도 하기 때문이다. 그 공백을 선생이 맡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객관성은 보편성이나 대중성과는 다르다. 오히려 개별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각기 다른 가능성을 가진 아이들 각자의 개성과 특성을 파악하고 이를 개별적으로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며, 제 자식에 대해 주관적이기에 편향적으로 흐르기 쉬운 부모에 대해서 이성적 이해로 상황을 온전히 판단할 수 있도록 선생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와 부모 간의 중간자 또는 중개자인 선생은 관계의 친밀이 불미스러운 오해 또는 실재(촌지 등)로 번져 그 역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의 현실에 답답하고 암울하다. 중간자로서의 역할시기를 놓친 졸업 후 한참 뒤에야 그 중간자 역할을 다시 맡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런 일조차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의 사후 약방문·사후 청심환이 되고 말아 선생은 아쉬움을 넘어 후회하곤 하는데 이미 때를 놓치고 말았기 때문이며 선생의 한계를 실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후 약방문도 잘만 쓰면 효과는 있다. 사후 약방문을 후회와 반성의 깨우침으로 극복할 수만 있다면 지혜가 될 수 있다. 어떤 일이나 사건의 수습은 결과가 아니라 이 역시 과정이라는 인식에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죽을 때까지 어느 것 하나 결정된 것 없이 태어난 우리지만 무엇인가 되고 무엇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엄마의 뱃속에서 갖고 태어난다. 꼬옥 오므린 아이의 두 주먹에서 가능성을 붙잡고 있는 듯해 보인다.

태어나며 결정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누구나 가능성을 타고나며 또 이것을 평생 지니고 산다. 하지만 대부분 이 가능성을 묵혀두거나 묻어두기에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 가능성을 밖으로 꺼내놓는 사람만이 성공한다.

 

실패 후

 

‘때때로 실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시도하지 않고 적당히 살고 있다는 뜻이다.’(티나 실리그)

 

가능성은 실패와 성공을 동시에 품고 있다. 실패도 배움이다. 이래서 ‘실패 후’도 가능성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성공이 그렇듯이 실패도 어른들에게나 익숙한 단어다. 사후 약방문의 지혜는 놓치게 된 시기의 뼈저린 아픔이기에 적절한 시기, 시의적절에 대한 절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니 소중한 어린 시절을 당사자인 아이보다 우선 부모가 후회할 일을 줄여야 하지 않을까. 이러자면 부모가 깨어있어야 한다. 눈 떠 있어야 하며 귀를 밝혀두고 있어야한다.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환경이나 조건은 아이의 몫이 아니라 오히려 부모의 것이다.

 

‘예측불가능한 것은 두려워하기보다는 기다려야 하는 것이고, 기다린다는 말은 미지의 것에 대비한다는 뜻이다.’(마키아벨리)

 

가능성은 사랑의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은 다 고귀하지만 그 중에서 부모의 자식사랑만한 사랑이 있을까. 지켜본다 함은 기다림이요 준비로서 대비하는 것이리라.

가능성이란, 포대에 담겨진 밀가루일 수 있고 쌀이 될 수 있다. 밀가루와 쌀은 무엇인가로 만들어질 때 그 기능을 제대로 다한다고 말할 수 있다. 빵을 만들 수 있고 국수로도 만들어지고 빵이 되거나 밥이 되어야 밀가루이고 쌀이다. 포대는 가능성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밀가루나 쌀이 스스로 다른 무엇을 만들어낼 수 없듯이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이의 가능성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부모에 의해 정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모의 도움은 절대 필요하며 부모에 의해서 아이의 가능성은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해야 하는 부모의 의무를 이왕이면 기꺼이 즐겁게 할 수 있다면 아이의 삶은 사뭇 달라질 것이다. 이는 아이의 자립심이란 의지가 형성되기 이전의 시기에 해당된다.

 

‘세상은 그대의 의지에 따라 그 모습이 변한다. 동일한 조건 속에서도 어떤 사람은 절망하지만 어떤 사람은 여유 있는 마음으로 행복을 즐긴다.’(그라시안)

 

 

가장 아름다운 옷

 

부모의 의지에 따라 자식의 모습이 변한다. 어린 시절은 말로 다 표현이 불가할 정도로 인생에서 너무나 소중하기에 부모가 부모 임의대로 이를 훗날로 미뤄놓을 순 없다. 미룬다면 직무유기가 될 것이다. 후에 극복한다 해도 극복은 미루기 전보다 더 힘든 고뇌와 고충 그리고 더 큰 불확실성을 내재하고 있다.

이러하기에 극복이란 성취보다 더 이루기 어렵기에 기적과 같은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 조금은 덜 힘들 지금의 할 일을 훗날로 미룬다는 것은 시간과 노력의 낭비이며 한편 미련한 행동이랄 수 있다. 더욱이 내가 아닌 나의 자식, 다름 아닌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훗날로 미룰 순 없지 않은가.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오늘 처리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사람이라면 과연 내년에는 또 무슨 일을 하겠느냐?’(알렉산더)

 

미루는 사람은 늘 미루기만 한다. 이것을 자식들도 그대로 배운다. 우리 부모가 오늘 처리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거창하게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못한다면 이것도 참으로 우매하다 할 수 있다. 시간을 지키는 것.
자식에 대해 해야 할 일 중 가장 우선 되어야 할 것은 시간을 지키는 일이다. 어린이의 시간에 맞춰 할 수 있는 일, 예쁘고 고운 옷보다도 이것을 먼저 우리 아이들에게 입혀줘야 할 것이다. ‘시간을 잘 지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과 같다.’라는 중국격언이 있다. 시간을 지키는 것은 자기 삶에 애정을 갖는 일이다. 자기 삶에 애정을 갖는 부모에게서 애정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고 그런 아이로 성장할 수 있다.

 

‘네 이성을 심장 가까이에, 네 심장을 이성 가까이에 두면 뜻밖의 기회를 포착하게 된다.’(헤라클레이토스)

 

놀이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기 위해, 좀 더 나은 삶을 선물하기 위해 바쁜 일상으로 분주한 우리 부모는 전적으로 남의 힘을 빌려 자식을 교육시킨다. 현실이라지만 현실에 대한 절대적 의존은 변명으로서 부모가 오늘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기피하는 것일 수도 있다.

교육전문가들은 부모와 자식 간의 놀이가 사라지고 있다며 이를 심히 우려하고 있다. 놀이마저 남에게 맡겨지고 있다. 요즘은 상업성 미디어가 그 기능을 떠맡아 하니 더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보고 내버려둔다면 이젠 기피가 아니라 방치요 죄악의 공범이 된다. 부모가 자기 자녀의 범죄인이 된다? 이래서 내 자식 제대로 버젓이 키우고자 한다면 아이들만이 아니라 부모자식 사이의 놀이 시간을 늘려야 한다. 의식적으로라도 부모 자녀 간 놀이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떤 기능에 숙달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의식적으로 배우고 연습해야 한다. 그러다가 완전히 몸에 익게 되면 점차 의식하지 않고도 비로소 그 일을 해낼 수 있다.’(루트번스타인)

 

예를 들면 자전거타기가 그렇고 피아노연습 같은 것이 그렇다. 어릴 적에는 이것들을 머리로 보다는 발과 손가락으로 기억한다고 루트번스타인 박사는 얘기한다. 놀이를 통해 몸에 배게 한 경험은 수학자 파인먼에게서 두드러진다. 수학문제를 풀었다고 하지 않았다. 어려서 숫자놀이를 즐겼다고 했다. 전문가가 된 뒤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문제라도 어릴 적 숫자놀이 방식의 풀이로 해결할 수 있었다고 했다. 어릴 적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놀이는 틀을 깨준다. 공식은 다양한 상상, 나아가 해결(풀이)을 오히려 방해했다고 파인먼은 말했다.

삶의 긴 시간 중 상대적으로 꽤 짧은 어린 시절이 평생에 달성시킬 가능성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가장 높은 이유는 어린 시절의 자유로움에 있고 이것은 놀이로써 발현되며 몸 안에 지속적으로 축적될 수 있다. 그러나, 놀이가 사라지면서 우리의 아이들은 부모 때보다도 더 일찍 틀에 짜인 삶을 시작한다.

쇠처럼 주물형틀에 맞춰진 채로 자유로움을 속박한다. 자유구상과 자유상상을 가둬버린 채 세뇌·기계화된 교육으로 말랑말랑한 머리를 채운다. 일찍부터 딱딱한 경직기계로 만들어진다. 다 어른들에 의해서다. 이것을 깨야만 하는데, 깨는 일이야말로 지금 우리 부모가 오늘 처리해야 할 일이며 내일로 미뤄서는 안 될 일이다. 우선 상업적 도구들을 놀이로 착각하는 것, 이것을 벗어던져야 한다. 아이의 첫 번째 놀이도구는 바로 ‘함께’이다. 부모와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놀이다.

놀이의 상실시대에 부모가 자식과 함께 놀이를 즐기는 것, 놀이로써 기억하게 하는 것, 놀아주는 스킨십이 삶의 질을 높이는 최상의 방법임이라고 세계의 유력한 교육자들은 한결같이 주장한다. 세상을 이끌 리더가 갖춰야 할 소양임을 강조한다. 놀아주는 스킨십이 어린 아이들에게 가장 질 좋은 교육방법이라는 말이다. 역설로, 남이 시키는 대로 사는 피동적인 삶을 내 자식에게서 기대한다면 놀이 따위는 필요 없다.

놀이의 상실은 가능성의 상실이기도 하다. 좀 더 나은 삶의 포기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옷은 놀이이며, 이 옷은 부모가 입혀줘야 한다. 아이의 가능성을 부모가 어느 정도 이끌어주고 난 뒤에, 그리고 스스로 하기에 힘든 미숙아에서 벗어나 좀 더 큰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첫 마디는 비로소 이런 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세계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내는 것이다.’(퐁티)

 

<부모 먼저>

 

“외할머니집 맛이 나요.”
생고구마를 먹던 네 살 시원이가 하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른들의 맛은 달고 쓰고 짜고 맵고 시고... 이렇게 몇 가지로 한정되지만 아이들의 맛은 기억으로도 느껴지기에 그 맛은 다양하다. 그러니 표현도 다양하다. 아이는 어른보다 천차만별로 개성이 더 풍부하다. 그러나 한데 뭉키어 ‘어린이’로 똑같이 보려한다. 똑같겠거니 해버린다. 교육학이나 심리학, 정신분석학에서조차도 5세, 7세 또는 취학 전이라 하며 생물적인 나이로 아이들을 규정지으려고 한다. 이것은 틀을 만들어 규정짓기 좋아하는 학문의 취향에 불과할 따름이다.

어린이를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규정짓고자 한다면 단 하나, 어린이는 각기 다 개성을 갖고 있으며 각자의 특성으로 자기세계가 엄연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아이들의 개성도 점점 줄어들거나 사라져가고 있다. 보고 듣고 맡고 느낀 각기 색다른 접촉에서 비롯될진대 주변의 모든 것이 비슷비슷하고 다 똑같은 것들에 의해 그 맛과 느낌이 공통화·단일화되면서 아이들의 개성은 집단성, 즉 어른들과 다름없는 몇 가지의 맛과 느낌으로 통일되거나 한정되어가고 있다.
 
이 현상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피자나 치킨, 햄버거 등이 나타난 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할 것이다.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맛에서부터 개성을 상실시키는 일이며 창조성을 분실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외식이나 사서 먹는 일을 줄이고 직접 해서 먹는 음식에서 아이들은 잃어버린 맛을 되찾아낼 수가 있으리라. 바쁘다는 이유로, 편하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개성을 죽일 것인가. 아이들은 ‘외할머니집맛’ ‘엄마맛’ 또는 ‘아빠맛’을 직접 해주는 음식에서 기억할 것이다. 만들어먹는 과정에서 보고 맡고 듣고 느낀 오감의 맛으로서 기억할 것이다. 외식이나 사서 먹이는 음식에선 오로지 입맛밖에 남는 게 없다. 그 입맛은 딱 두 가지뿐이다. ‘맛있다’와 ‘맛없다’

직접 해서 먹게 하는 일은 아이들의 개성을 창의성으로 발전시킨다. 이는 창의성을 발달시킨다는 교재를 비싼 돈 주고 사주기만 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또 집에서도 다 된 음식을 내놓아 먹게만 하기보다는 요리과정을 보게 하고 참여하게 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더없이 중요한 창의성 교육이 된다. 꺼내오고 가져오고 씻고 자르고 하면서 코로는 냄새도 맡고 눈으로는 색을 보고 손으로는 여러 촉감들을 느끼게 하는 것에서 다양성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시켜보면 의외로 잘 따라하며 즐겨서 한다. 의외란 말은 여기서 맞지 않다. 아이라는 선입견으로 아이들을 재단해버리는 의식이 의외라는 단어 안에 들어있다. 예단, 미리 판단하는 것은 아이들에겐 금물이다. 재단은 정해 놓아 규정지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른들의 예단이나 재단엔 똑같이 보려는 성향을 내포하고 있기에 아이들을 보는 눈은 이래서는 절대 안 된다는 말이다. 각기 다른 성향의 아이들을 똑같이 하나로만 보려하다니...

네 살 시원이의 입에서 나온 ‘외할머니집맛이 나요’, 듣기에도 얼마나 맛깔스러운가. <12편으로 이어집니다>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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