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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대우(大禹), 성은 사(姒)요 이름은 문명(文命)이다. 『사기․하본기』에 따르면, 전욱(顓頊)의 손자이며 곤(鯀)의 아들이다. 요(堯)임금의 치세에 대홍수가 발생하여 섭정인 순(舜)이 그에게 치수(治水)를 명령했다. 13년 동안 노심초사한 끝에 치수 사업에 성공해 천하를 9주(州)로 나누고 공부(貢賦)를 정했다.

순이 죽자 인망을 얻은 그가 제위를 계승했는데 나라이름을 하(夏)로 고치고 안읍(安邑)에 도읍했다. 치세 10년 만에 회계(會稽)에서 죽자 제후의 추대로 아들 계(啓)가 천자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천자 자리를 세습화하여 하 왕조가 시작되었다. 지금의 소흥(紹興)에 무덤이 있다. 그의 전설은 한족의 홍수 전설과 관련이 있으며, 신화학과 고대사학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우(禹)는 중국의 전설의 시대에 요(堯), 순(舜)과 함께 거명되는 성왕이다. 그의 가장 탁월한 공적은 역대이래로 칭송을 받고 있는 치수다. 전설 속 중고시대는 홍수가 중원지역을 위험에 빠뜨렸다. 요순도 성군이기는 하였으나 홍수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우임금 때에 이르러서야 치수에 성공하였다. 막힌 수로를 소통시키는 방법으로 홍수를 다른 강과 바다로 흐르게 하여 중원지역에 복을 내렸고 만백성의 존경을 받았다. 이러한 공적으로 말미암아 순임금의 계승자가 되었다. 대우가 치수하였다는 일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믿었고 그 일에 대해 회의를 품은 사람은 극소수였다. 심지어 사마천(司馬遷)조차도 의심하지 않았다.

『사기․하거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대우가 용문(龍門)을 뚫어 황하의 물길을 남쪽으로 지류를 이루어 화음(華陰)으로 흐르게 하였고 동쪽으로는 지주(砥柱), 맹진(孟津)으로 나누어 흐르게 하였다고 한다.

대우는 황하의 물이 고원에서 평원에 이르면 수로를 둘로 나누어 동쪽으로 흐르게 하였고 여러 갈래의 하류를 이루어 강물이 발해까지 순탄하게 흐르게 하였다고 한다. 치수를 위해 대우는 13년 동안 중원을 헤매면서 집을 세 번이나 지나치면서도 가족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왼쪽에는 먹줄을 들고 오른쪽에는 곱자와 그림쇠를 움켜쥐고는 피곤함도 잊고 노력하여 마침내 “구주를 열고 구도를 통하게 했으며 구택을 이루었고 구산을 넘었다”고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대우치수(大禹治水)’의 전설이다.

 

그러나 상고시대에 고대인의 문명수준으로 대우가 13년이란 시간 내에 장강과 황하를 다스릴 수 있었을까? 분류를 만들어 소통하게 하였다는 방법이 맞는다고 하더라도 원시사회의 인력 위주의 노동조건 아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의문 아래 근대 서양학자인 히르트(Friedrich Hirth)는 『차이나 고대사』에서 대우 치수의 사실을 부정하였다. 그는 장강과 황하의 개착공사의 양을 측정해본 결과 만리장성을 쌓은 것보다도 4배나 5배나 더 힘든 공사로 『상서』나 『사기』에 기록된 대우치수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현재 고고학 자료에 보면 대규모 치수의 유적은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것도 자신의 판단을 증명한다고 했다.

 

대우치수의 전설은 분명 과장된 바가 있는 것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중국의 역사학자 정문강(丁文江)도 대우치수 설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설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역사학자 주곡성(周谷城)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당시에 홍수는 강이 흐르고 있는 평원지역에서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러한 지역의 토지는 비옥하여 농업 생산에 적합하였던 까닭에 사람들은 강과 가까운 평원 지대에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수리시설을 이용하고 생활의 안전과 생산의 편리함을 위해 홍수와 같은 수재와 오랫동안 투쟁했을 것으로 대우치수의 전설은 이러한 배경에서 생겨났다. 치수의 목적은 안전한 거처를 도모한 것이지 대규모로 수로를 파는 공사를 진행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신석기 시대 말기에 결코 대규모의 치수 공사를 벌일 수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제방을 쌓아 물의 범람을 막는 것은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대우가 치수를 하였다는 전설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라 보았다. 

 

이것보다도 더 철저히 부정한 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고힐강(顧頡剛)이다. 그는 역사상 근본적으로 대우(大禹)라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언하였다. 따라서 그런 인물이 치수를 하였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했다. 대우라는 인물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며 신(神)적 물상이 인격화된 것이라고 한다. 도마뱀과 닮은 동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홍수를 다스린 영웅의 형상이 더 막막해져 버린다. 대우가 동물이라는 근거는 『설문해자』에 있다. ‘禹’를 ‘蟲(충: 벌레)’이라 해석을 한다. 그리고 ‘獸足蹂地(수족유지)’라 하였는데 “동물의 발이 땅에 닿는다”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蹂’란 밟다 뜻 이외에 축축하게 하다 뜻이 있는바 동물(벌레)의 발이 땅을 축축하게 하는 것으로 도마뱀과 같은 종류라 추론한다.

세상에 전하는 청동기의 문양 중에 ‘螭(리 : 교룡)’가 있는데 바로 도마뱀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구정(九鼎)의 문양에서 ‘禹’가 비롯된 것이 아닐까 추론한다. 우의 부친은 ‘鯀(곤 : 큰물고기)’이라 돼있다.

『설문해자』는 鯀을 물고기로 해석을 하였고 『국어』는 鯀은 누런 곰이 화해서 물속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으니 수생동물인 것이다. 『회남자』는 禹가 누런 곰으로 화했다고 돼 있으므로 禹와 鯀은 같은 부류로 일종의 수생동물이다.

『천문』『산해경』등에는 鴟(치 : 솔개), 龜(구 : 거북), 응룡(應龍) 등 수생동물이 우의 치수를 돕는다고 돼 있다. 이렇듯 치수의 신화에는 물과 관련된 동물들이 대단히 많은 것을 보면 우와 그들이 같은 부류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실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으로 학술계에서는 논쟁이 대단하다. 그러나 대우치수(大禹治水)를 지지할 증거가 너무 부족한바 그가 과연 치수의 영웅인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문부호로 남길 수밖에 없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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