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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3) ... 나무보다 숲을 보는 세상을 꿈꾼다

 다시 4.3을 맞는다. 무섭고 시렸고 한스러웠던 통한의 역사다. 목소리는 커녕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4·3은 지금으로부터 27년여전 제주의 한 언론사의 용기와 취재진들에 의해 세상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잔인무도였고 통곡이었다. 그 시절부터 20여년에 걸쳐 이뤄진 4·3 진상규명의 역사에 중심부에 있었던 양조훈 전 제주도 부지사의 육필 비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1988년 첫 4‧3 학술발표회

 

제주신문 4‧3취재반이 결성된 1988년은 4‧3 4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런 시대적 상징성을 반영하듯 이곳저곳에서 금기의 벽을 뚫어보려는 시도가 전개되었다. 5‧16쿠데타 이후 4‧3에 관련된 말조차 꺼낼 수 없었고, 시나 소설로 표현해도 범죄가 되던 세상에서 금줄을 걷어내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해 4월 3일 서울과 일본 도쿄에서 동시에 공개적인 4‧3 학술행사가 열렸다. 4‧3에 관한 첫 학술발표회였다. 서울 행사는 오후 2시 국회 앞 여의도 여성백인회관(가정법률상담소 소속)에서 열렸다. 서울에 사는 제주 출신 지식인들로 창립된 ‘제주사회문제협의회’(제사협)가 주최한 행사였다.

 

제사협은 1987년 9월 발족했다. ‘6월 민주항쟁’의 열기가 뜨겁던 1987년 6월 어느 날 제주대 재학생인 김윤삼이란 여학생이 시위도중 경찰이 던진 벽돌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고 서울대병원에 입원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에 사는 진보 성향의 제주출신 인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자연스럽게 제주사회의 현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대안을 모색해보자는 의견으로 발전했다.

 

그런 취지 아래 40여 명이 모여 제사협을 발족시킨 것이다, 회장에 홍익대 교수 정윤형, 부회장은 소설가 현기영ㆍ시인 김명식, 총무는 언론인 고희범이 맡았다. 제사협은 그후 탑동 공유수면 매립사건, 송악산 군사기지 철폐운동, 제주개발특별법 반대운동 등 제주 현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굵직굵직한 사건에 참여해 제주지역의 관련단체와 연대하거나 서울에서 별도의 집회를 가졌다.

 

그런데 제주 현안을 논의하다보면 항상 부닥치는 문제가 바로 4‧3이었다. 수많은 도민들이 학살을 당하고도 40년이 되도록 말조차 꺼낼 수 없는 4‧3문제를 외면하면서 무얼 논의하겠다는 것이냐는 자각이 생긴 것이다. 제주신문 4‧3취재반의 출범 배경과 똑같은 이치다.

 

이런 부담감을 덜기 위해 제사협은 회보 창간호부터 ‘제주지역 역사자료’란 난을 만들고 4‧3문제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창간호에는 잡지 『신천지』 1948년 8월호에 실린 홍한표의 글 ‘동란의 제주도 이모저모’에서 발췌한 내용을 2면에 걸쳐 싣기도 했다. 그리고 1988년 4월 3일 일요일 오후 2시, ‘거사’하듯 4‧3 40주년 기념학술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 행사를 준비했던 고희범은 그의 저서 [길과 길]에서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4‧3과 관련한 공개행사를 열 경우 당국이 어떻게 나올지 짐작할 수 없었다. 행사장이 봉쇄돼 행사 자체가 열리지 못하거나 발표자가 연행돼 곤욕을 치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위축되지는 않았다. 비장한 각오로 준비를 해나갔다. 행사 장소는 당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가정법률상담소의 여성백인회관을 예약했다.”

 

가정법률상담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면서 법학 박사인 이태영 박사가 설립한 민간 법률구조기관이었다, 사회적 약자를 돕는 첫 법률구조기관을 세운 이태영 박사는 우리나라 인권과 민주화운동에 큰 족적을 남긴 분으로 유명하다.

 

‘제주도 현대사의 재조명 - 4‧3의 배경과 경과’란 주제로 양한권(서울대)ㆍ박명림(고려대)이 발표했다. 두 사람은 4‧3관련 석사 논문을 발표했거나 준비 중이었다. 100여 평 남짓한 여성백인회관 발표장은 300여 명의 청중으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주최 측의 예상을 뛰어넘는 성황을 이뤘고 열기도 뜨거웠다. 당초 주최 측이 염려했던 공안당국의 훼방은 없었다. 별 문제 없이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당시 제주신문은 바로 직전 4‧3취재반까지 결성했음에도 이 행사를 스트레이트 기사 없이 서울 주재 기자의 ‘기자수첩’만으로 보도했다. 경황이 없었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주최 측도 매한가지다. 이런 중대한 행사를 결행하면서도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행사 이후에 4‧3연구소 설립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다.

 

도쿄에서도 성황리에 4‧3 강연회 열려

 

같은 날, 도쿄에서 열린 4‧3 강연회도 대성황이었다. 일본에서 처음 열린 4‧3 강연회는 ‘제주도 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회장 현광수, 사무국장 김민주) 주최로 도쿄 소재 한국YMCA회관에서 열렸다. 도쿄 행사 역시 서울 못지않게 대성황을 이뤘다. 500명의 청중이 운집하는 바람에 의자가 부족해 일부는 맨바닥에 앉을 정도였다.

 

강연 연사로는 ‘행동하는 지성’으로 유명한 일본인 동양사학자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를 비롯해 한신대 교수 정하은, 소설가 김석범, 시인 김명식이 나섰다. 이날 행사는 주최 측도 놀랄 정도로 성황을 이뤘는데, 사무국 요원으로 참여한 문경수 교수, 출판사 신간사 대표 고이삼, 도쿄대 대학원에 유학중인 강창일 등의 활약이 돋보였다고 한다.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강창일의 회고에 의하면 "1987년 일본에서 김명식 형과 만나서 작전을 짰다"고 한다. 4‧3사건 40주년을 맞는 1988년 서울과 제주도, 도쿄와 오사카에서 동시에 4‧3 심포지엄을 열자는 ‘원대한 계획’을. 그래서 다짜고짜로 둘이서 초면인 [화산도] 작가 김석범 선생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런 노력의 결과, 1988년 4월 3일 서울과 도쿄에서는 행사가 열렸지만 제주와 오사카 행사는 당국의 압력으로 불발됐다는 게 그의 증언이다.

 

혹자는 일본에선 4‧3을 이야기하는 게 쉬운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4‧3을 거론하면, 대한민국을 대변하는 민단은 ‘반정부 활동’으로 보고, 친북단체인 조총련은 ‘반혁명 행위’로 취급하기 일쑤였다. 한반도보다 더 심한 이념 갈등이 재일 동포사회에 흐르고 있었다. 이는 나중에 4‧3 취재를 위해 일본에 갔다가 절실하게 느낀 점이다.

 

서울, 도쿄와는 달리 제주도에서는 공개행사 없이 제주대학교 학생들이 4‧3 추모기간을 정해 이날 학내 행사로 위령제와 진상규명 촉구집회를 가졌을 뿐이다.

 

그러나 그해 7월 23일 제주YMCA회관에서 열린 ‘4‧3 강연회’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재경 제주학우회가 주최한 이 강연회는 제주에서 열린 첫 4‧3 공개행사였다. 700여 명이 강연장을 꽉 메웠다. 회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청중들은 회관 마당에 자리를 깔고 앉았고, 심지어는 울타리나 나무 위로 올라가서 강연을 듣는 사람도 있었다. 강연은 제주대 교수 고창훈, 소설가 오성찬, 시인 김명식이 맡았다. 이 강연장에 4‧3취재반 기자들도 대부분 참석했다.

 

연사들이 민중항쟁 측면에서 4‧3을 언급하자 방청석 한쪽에선 심하게 반발하기도 하였다. 주로 무장유격대로부터 피해를 입은 유족들로 그들의 항의는 매우 거셌다. 이런 진보진영의 분위기에 자극받은 그들은 그해 10월 ‘4‧3 반공유족회’를 결성하게 된다.

 

김석범 선생의 고향 방문

 

1988년 11월 14일로 기억된다. 제주신문 편집국으로 낯선 전화가 걸려왔다. “나 김석범이요, 방금 전에 제주에 도착했어요.” 말로만 들었던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 선생과의 첫 상봉은 이렇게 시작됐다. 짙은 눈썹, 예사롭지 않은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창작의 뿌리를 제주4‧3에 두고서도 43년 동안 제주 땅을 밟지 못하던 김 선생의 귀향은 많은 화제를 몰고 왔다. 첫째는 국적 문제다. 그는 무국적을 고수했다. 외국인 등록 국적 란에 ‘조선’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그것은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닌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기 이전의 이름인 동시에 미래에 있을 통일 조국의 이름”이라고 고집했다. 그 때문에 당국은 그의 입국을 불허했다. 그때 방문은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의 초청으로 어렵게 비자가 발급된 것이다.

 

두 번째 화제는 배를 타고 온 이유였다. 그는 4‧3 희생자의 유골이 묻혀 있을 공항에 비행기로 착륙하고 싶지 않고, 40여 년 동안 고대하던 고향 방문을 ‘비행기 타고 쌩하게 날아올 수 없다.’면서 배편을 고집했다. 한라산을 멀리서 찬찬히 보면서, 갖가지 상념을 하며 제주 땅을 밟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서울과 광주를 거쳐 완도에서 여객선을 타고 조용히 제주에 왔다.

 

그는 그때부터 제주공항 활주로 밑에, 또는 그 주변에 4‧3 유골이 묻혀 있으니 발굴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 때만 해도 그런 주장은 ‘노인네의 치기’ 정도로 취급당했다. 그런 쪽에 관심을 쏟을 사회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2008년부터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옆에서 유해 발굴작업이 진행됐는데, 놀랍게도 384구의 4‧3 유해가 쏟아져 나왔다. 그의 주장이 거짓이 아님을 발굴된 유해들이 입증해 낸 것이다. 정밀 조사 결과, 그 유해들은 1949년 군법회의와 1950년 예비검속 희생자들이었다. 그런데 제주경찰서에 감금됐던 이른바 ‘북부 예비검속 희생자’ 500여명의 시신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활주로 밑이나 그 주변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일화도 있다. 그는 아사히신문사(朝日新聞)가 우수한 일본어 산문작품에 수여하는 오사라기지로상(大佛次郎賞)을 1984년에 받았다. 그 후 고향 방문을 추진했으나 국적문제가 걸림돌이 됐다. 가고픈 고향을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사히신문사 측에서 특별한 제안을 했다.

 

취재용 세스나 경비행기를 제주도 인근 공해 하늘에 띄워 한라산을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탔는데, 구름에 싸인 희미한 한라산만 멀리서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김석범 선생이 나와의 인터뷰 도중 눈물을 글썽이며 들려준 내용이다.

 

그는 1957년 일본 문예지에 4‧3 단편소설 「까마귀의 죽음」을 발표한다. 「까마귀의 죽음」은 국내외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1976년부터 대작 [화산도]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1997년 전 7권이 간행될 때까지 20여년이 걸렸다. 이 작품은 200자 원고지 2만 2000장 분량이며,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만 100여 명에 이른다. [화산도] 일부는 1988년 실천문학사에 의해 한글로 번역되어 5권의 책으로 발간됐다.

 

김석범 선생은 1925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고향은 삼양이다. 제주에는 유년시절과 1945년 청년시절에 잠깐 다녀갔을 뿐이다. 하지만 그에게 고향은 언제나 제주밖에 없었던 듯하다. 그는 아사히신문 이외에도 마이니치신문사(每日新聞)의 예술상을 수상할 정도로 일본 문학계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작가다. 국내외에서 그의 작품을 연구하는 여러 편의 논문도 발표됐다.

 

“왜 4‧3에 매달렸는가?”란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4‧3 직후 일본으로 밀항해온 동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은 내 평생 지워지지 않았다. 재일인의 입장에 처한 부채감과 애향의 마음이 고향을 이야기하게끔 한 것 같다.”

 

그는 체험자들의 증언을 채록하며 제주도 지도를 일일이 그렸다. 그럼에도 4‧3 당시 제주사람들의 생각과 풍경, 풍습, 거리,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감각과 감정까지 몰입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의 견해는 해방 공간의 한반도 모순이 제주에서 터져 나왔다는 것이다. 친일파 문제, 신탁통치 문제 등도 재해석하고 재연구돼야 한다는 게 그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는 그때의 고향 방문 소감을 [고국행]이란 책으로 발간했다. 그는 재일동포사회에 제주4‧3 진실찾기 혼을 불어 넣었으며, 일본 지식인사회에도 4‧3을 알리는 선구적 역할을 했다.

 

4‧3평화상 선정과 논란

 

그런 김석범 선생이 2015년 4‧3평화재단이 제정한 제주4‧3평화상 제1회 수상자로 뽑혔다. 제주4‧3평화상위원회(위원장 강우일 주교)는 제1회 4‧3평화상 수상자로 재일 작가 김석범 선생을, 특별상에 인도네시아 학살사건의 진상규명과 화해운동에 앞장서온 무하마드 이맘 아지즈 씨를 선정했다.

 

위원회는 김석범의 선정 이유로 “4‧3이 침묵을 강요당하던 시기인 1957년 최초의 4‧3소설을 쓴 이후 20여년에 걸쳐 4‧3 대하소설 [화산도]를 발표하는 등 국제사회에 4‧3을 알리고, 4‧3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해왔다. 흔들림 없는 신념으로 전 생애를 바쳐 4‧3진실 규명에 혼을 불어넣고, 국제적인 평화연대를 주장하는 등 인권의 존엄과 정신을 문학과 행동으로 구현하여 일본사회의 정신적인 지주로 추앙받는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밝혔다.

지난 4월 1일 제주KAL 호텔에서 열린 4‧3평화상 시상식에는 일본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4‧3운동가와 내빈들이 참석해서 그의 수상을 축하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수상을 문제 삼은 사람들도 있다.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한 사람에게 어떻게 거액의 상금을 주는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할 수 있느냐"는 항변이다. 주로 문제 삼는 것이 다음과 같은 수상 연설 내용에 있는 것 같다.

 

“해방 전에는 민족을 팔아먹은 친일파, 해방 후에는 반공세력으로, 친미세력으로 변신한 그 민족 반역자들이 틀어잡은 정권이 제주도를 젖먹이 갓난아이까지 빨갱이로 몰아부친 것입니다. 이승만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표방했지만 과연 친일파, 민족반역자 세력을 바탕으로 구성한 이승만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날 시상식 자리에 나도 참석했는데, 그는 길게 격동적으로 수상 소회를 밝혔다. 이런 표현도 기억에 남는다. “기억이 말살당한 곳에는 역사가 없다. 오랫동안 기억을 말살당한 4‧3은 한국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 막강한 권력에 의한 기억의 타살도 있었고,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이 스스로 기억을 망각 속에 집어던져 죽이는 기억의 자살도 있었다”고.

 

역시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기에 표현의 자유는 있다. 수상자 결정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바라기는, 나무만 보지 말고 전체의 숲을 봤으면 하는 것이다.

 

아흔 살의 노인네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억압당한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을 하면서 느꼈을 공포, 수모, 외로움을 생각해 봤는지, ‘조센징’이라고 민족차별이 심한 일본 사회에서, 일본의 대표적인 언론인 아사히신문과 마이니치신문은 왜 그에게 상을 줬는지, 이승만 정권이 국제법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초토화작전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에 대해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 일은 있는지 등을 되묻고 싶은 아침이다. <4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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