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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4.3 그 진실을 찾아서' 펴낸 양조훈 전 제주도 환경부지사

불혹의 나이에 돌연 4·3을 만났다.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제주의 언론인이었을 뿐이다. 그 시절 하나 뿐인 지역일간지 사회부장이었던 터라 4·3이 40주년을 맞은 때 무언가라도 해야 할 요량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만난 4·3의 취재반장으로 10년 동안 증언채록과 정리에 매진했다. 그리고 기자직을 내려 놓은 뒤엔 다시 10년간 숨죽였던 4·3을 세상에 알렸고, 누명을 벗기는데 매달렸다. 어찌보면 수많은 이가 제 역할을 했지만 4·3특별법은 그가 없었더라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양조훈(67) 전 제주도 환경부지사.

 

 

그가 <4·3 그 진실을 찾아서>란 책을 들고 나타났다. 거의 평생을 매달려 온 그의 소명의식의 발로였고, 그 결과 이뤄낸 결실에 대한 담담한 기록이자 역사다.

 

금기시됐던 4·3은 그가 1988년 제주신문 사회부장 재직시절 기획되고 89년 '4·3의 증언‘이란 이름으로 첫 연재에 들어간 뒤 1999년 8월 그가 제민일보에서 퇴임할 때까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456회에 걸쳐 연재된 ’4·3은 말한다‘ 기획은 한국기자상을 받는 언론계의 금자탑 같은 기록이었다.

 

그를 <제이누리> 편집국에서 만나 그간의 소회를 들어봤다.

 

한국언론사에서도 주목할만한 기획이었다. 그간의 취재과정과 이후 진상규명 운동사까지 다시 기록했다. ‘4·3은 말한다’는 기획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1987년 6월 민주화 바람은 거셌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위기를 뒤엎는 정서였다. 그런 분위기가 제주신문 편집국에도 밀어 닥쳤다. 젊은 기자들이 에너지가 충천하던 시절이다. 시간이 흘러 1988년이 됐다. 4·3이 발발한 지 40주년이 되어갈 무렵 무얼 기사화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고작 마흔살 사회부장일 때다. 그냥 단발기획을 생각하다 어찌하다보니 장기기획으로 계획이 바뀌었고, 3월 초가 되자 취재반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다.”

 

취재반을 꾸리는 것도 만만친 않았을 텐데···.

 

“기획을 들이대다보니 덜컥 내가 취재반장이 됐다. 당시만해도 주변에선 ‘그러면 너 인생 망한다’는 걱정이 쏟아졌다. 하지만 달리 퇴로가 없었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무작정 취재반을 구성했다. 16명이나 된다. 당시 편집국 인력이 40여명이고, 외근기자가 20명인데 거의 대부분이 4·3취재반으로 합류한 것이다. 방대한 취재인력이 필요하단 생각이었지만 그만큼 탄탄한 조직구성으로 방패막이를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제주 전역을 훑으며 사람을 만나 차곡차곡 기록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을 텐데···.

 

 

“처음엔 길이 안보였다. 그 혹독한 참상을 겪었던 이를 만나면 도무지 말을 열지 않더라. 어쩌다 겨우 말문을 열어도 나중 이 사람 저사람 말을 모아보면 제각각이었다. 서로 말이 엇갈리고 기억이 달랐다. 더욱이 40여년 억압과 통제에 갇혀있었던 터인데다 반공교육으로 세뇌되다시피 한 이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자기합리화의 영향으로 도무지 사실관계를 확인하기가 먹먹했다. 한마디로 뒤죽박죽이었다. 그래서 무조건 의심하자고 마음 먹었다. 돌다리 두들기는 심정으로 검증에 검증을 거듭했다. 취재반 기자들이 증언을 모아오면 진술이 일치하는 부분은 정리하고, 그러지 않은 경우 다시 재조사를 했다. 4·3을 연재하면서 실수를 해선 안되기 때문이었다. 내 개인의 신상문제만이 아니라 신문사의 존폐문제가 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송상일 편집국장은 사측에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진다’는 각서까지 제출한 것으로 안다.”

 

▶‘4·3은 말한다’ 연재가 1999년 8얼 종료된다. 그 시절 마무리된 건가?

 

“종료라기 보단 중단이라는 표현이 더 맞다. 제민일보 경영진이 바뀌면서 중단된 걸로 보면 된다. 1996년 t새로이 취임한 경영진 대표는 재일동포다. 스스로가 남북으로 갈린 가족사를 안고 있는 분이었다. 그 분이 취임 후 ‘4.3은 말한다’ 연재를 언제까지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무언의 압력이었다. 하지만 버텼다. 하지만 99년 신문사를 그만두라는 통보를 받았다. 생각조차 못해 당황했다. 그리고 회사를 떠났다. 물론 연재 역시 곧바로 중단됐다. 456회 연재로 끝났다.”

 

기획이 한국기자상 등 각종 상을 거머쥐는 기록을 낳았다. 4·3특별법 제정의 기폭제가 됐는데 ···.

 

“토대가 됐다고 생각한다. 신문사를 나왔지만 해직 후 두달이 지나자 시민단체에서 연락이 왔다. 4.3특별법 쟁취 연대회의를 만드는데 공동대표를 맡아달라는 제의였다. 신문사를 나와 51세의 나이에 충격과 실의에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새로운 운명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열심히 뛰었다. 기적적으로 특별법 제정을 이끌어냈다. 이어 정부에 진상조사팀이 만들어지며 합류했다. 4·.3은 나에게 운명이다. 취재반장을 맡은 것도, 특별법 쟁취 운동에 나선 것도, 정부 진상조사위 수석전문위원을 한 것도 모든 게 그런 환경이 만들어지며 내가 다가왔다.”

 

특별법 제정 후 나온 진상조사보고서가 좌편향적이란 시각, 무장대 중심이란 시각이 있는데···.

 

“정부 진상조사위는 위원장이 총리였다. 위원 8명은 모두 장관급이다. 위원회의 엄청난 검토와 여과를 거친 산물이다. 그래도 그렇다면 특별법 정신을 잘 이해하지 못한 오해다. 4.3특별법이 추구하는 목적은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방향은 인권신장과 국민통합이다. 우리가 진상규명 작업을 벌이면서 포인트를 준 것은 과연 인권이 어떻게 침해됐나는 것이었다. 인권유린의 실태를 알고자 한 것이 특별법 정신이다. 과거 붉은 색으로 덧칠해진 것 자체가 왜곡이다. 과거 아픈 역사가 있었고 한이 맺힌 사실이 있었다. '진상조사를 통해 해원하라'는 메시지가 특별법이다.”

 

 

 

부지사로서 도정에 참여했다. 4·3 해결에 매달린 작업의 연장선인가?

 

 

“호출 당했다. 하지만 이탈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원했던 것도 아니고, 부지사로 임명된 건 나로선 소환이다. 당시 현직 지사가 강정문제로 주민소환을 당하다 보니 지사로선 제주사정을 잘 아는 부지사를 원한 것 같다. 한 3일간 고사하며 버텼지만 결국 제의를 받아들였다. 가고 보니 4·3평화재단이 제주도와 갈등하고 있었고, 재단 이사장 선임문제로 시끄러웠다. 도의회 의장, 국회의원을 지낸 장정언 전 의장을 정말 30번 찾아가 조르는 30고초려 끝에 이사장으로 모셨다. 재단과 민간 단체간 갈등을 봉합하는 등 윤활유 역할을 맡은 것에 보람을 느낀다.”

 

그런데 지금도 4·3평화공원 기념관 전시물 놓고도 말들이 많은데···.

 

“소모적인 논쟁이다. 전체 숲을 안 보고 나무만 집착하는 것이다. 책에도 기술했지만 이념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낡은 이념의 틀 속에 함몰되면 보지 못한다. 예컨대 제주에 오는 중국관광객을 보며 우리가 이념, 사회주의 확산을 걱정하는가? 오히려 부동산 잠식을 걱정한다. 1992년 우리가 중국과 수교하면서 반공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는 대만을 발로 걷어찼다. 반공이란 주술에 매몰됐던 시절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한민국도 국익 따라 가는 것이다. 이념 초월하고 보면 별 것도 아닌데···. 안타깝고 측은하다.”

 

 

한마디만 묻겠다. 27년여를 매달려 온 4·3이다. 책 제목도 ‘4·3 그 진실을 찾아서’다. 단독직입적으로 4·3의 진실은 무엇인가?

 

 

“4.3취재반장으로 10여년, 그후 10여년은 공적 영역에서 4·3에 다가갔다. 내 사견을 드러낼 순 없었다. 4·3은 세계적인 사건이다. 동서 냉전으로 촉발돼 분단으로 파생된 희생이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 같은 게 제주도의 희생자다. 냉전·분단 상황이 만들어낸 역사다. 그 시절의 선택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산으로 올라가든, 해안으로 밀려가든 역사의 소용돌이에 도민이 휘말리고 희생된 것이다. 그 희생은 국가공권력에 의한 초토화작전의 결과다. 국제법상 할 수 없던 작전이 수행된 이유를 찾아야 한다. 구조적 분석을 해야 4.3의 진실을 알 수 있다. 그 점에서 제주사람들은 실제론 4.3의 진실을 모를 수도 있다.”

 

아쉬움이 있나? 남은 과제는?

 

“30만명이 숨진 중국의 난징 대참사 추모제에 2000명이 모인다. 대만 2·28사건 국가기념일엔 500명이 모인다. 광주 5·18 추모제에도 고작 1500~2000명이 모인다. 하지만 4·3 추모위령제엔 1만명 가까운 도민이 모인다. 외국인들이 놀란다. 물론 많은 걸 해결했지만 미결된 것 있다. 하지만 차근차근해야 한다. 다른 지역 과거사와 비교하는, 되돌아보는 성찰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4·3의 진실은 그동안 너무 왜곡돼 왔다. 이걸 제대로 알릴 필요가 있다. 불행한 역사지만 이젠 긍정의 역사로, 에너지로 바꿔야 한다. 4.3은 두가지 역사를 갖고 있다. 60여년 전 역사도 역사지만 반세기 이상 묻힌 역사를 규명하는 진실찾기 운동이 또 하나의 역사가 됐다. 그 속에서 진실을 찾고 화해와 상생이란 정신을 찾았다. 유족회와 경우회가 화해했다. 대단한 것이다. 물과 기름처럼 융합할 수 없는 조직이 악수를 한 것이다. 동네 심방 안 알아주듯 하면 안된다. 성균관대 갈등해소센터는 제주4.3을 둘러싼 이해관계 세력이 화합하는 사례를 연구주제로 삼았다. 이제 그 길로 가야 한다.”

 

양조훈 전 부지사의 책 출판기념회는 오는 20일 오후 5시 제주언론인클럽(회장 홍명표) 주관으로 제주상공회의소 5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제이누리=양성철 기자]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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