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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수의 원도심 만들기(7) ... 주천석과 만산장

1611년 3월 어느 날 보물선이 제주 바다에 나타났다. 독립왕국이던 유구국(지금의 오키나와)이 일본에 먹힌 후였다.

 

24개월 전 유구국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왕과 왕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 가고시마로 끌려갔다. 제주에 나타난 보물선에는 유구국 왕자가 타고 있었다. 기록을 토대로 이야기를 꾸며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어느 큰 배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제주의 산지 바닷가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린 사람은 100명이 넘었다. 이들 가운데 제일 높은 이가 관가에 불려 갔을 때 사또가 물었다.

 

“너희는 누구냐”

 

옷을 잘 차려입은 젊은이가 대답했다.

 

“저는 유구국의 왕자입니다.”

 

사또는 먼 곳에 있는 왕자가 이곳까지 온 게 궁금했다. 왕자가 말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서 왕이신 제 아버지를 잡아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 슬퍼서 보물을 갖고 일본에 들어가 왕을 풀어 달라고 하려 배를 타고 떠났다가 이 곳으로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사또는 군사를 풀어 배 안을 뒤져보니 아닌 게 아니라 엄청난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그만 포대기가 두 장 있었는데 만산장(漫山帳)이라고 했다. 거미줄을 모아서 짰다는 이 포대기는 마음대로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해서 아무리 큰 물건이라도 마음대로 덮을 수가 있으며, 또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역시 마음대로 덮을 수가 있는데, 비가 와도 새지 않는 신기한 물건이었다.

 

또 주천석(酒泉石)이라는 네모난 돌이 있었다. 가운데 움푹 팬 곳에다 물을 넣기만 하면 술로 변하는 것이었다. 또 앵무새 한 쌍이 있었는데 왼쪽 발톱으로 비파를 켜는 것이었다. 거위 알만큼 큰 수정 두개는 밤에 방 안에 두면 대낮처럼 밝았다. 이 밖에도 매우 신기하고 처음 보는 것들이 많았다. 사또가 왕자에게 말했다.

 

“나에게 술이 샘솟는 돌을 달라. 그러면 너희들을 일본에 들어가도록 보내 주겠다.”

 

왕자는 간곡하게 청했다.

 

“제가 보물을 아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부왕께서 힘없이 갇혀 계셔서 보물이 없으면 풀어 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치욕은 이웃 나라의 치욕과 같으니, 원컨대 나리는 이를 슬퍼하소서.”

 

욕심이 난 사또는 이들을 전부 가두라고 명령했다. 그때 왕자의 신하 한명이 주천석과 만산장을 가지고 도망을 갔다. 군인들이 벼랑까지 쫓아오자 바다로 뛰어들었으나 보물과 함께 그만 빠져 죽고 말았다. 군인들이 여러 날 일대를 뒤졌으나 찾을 수 없었다. 사또는 배 안의 물건을 모두 약탈하고 왕자와 일행을 죽여 버렸다. 왕자는 죽음에 임해 혈서로 시를 지어 읊었다.

 

“죽서루 아래에 도도히 흐르는 물은 남은 원한을 실어 분명히 만 년 봄을 두고 오열하리라.”

 

앵무새 한 쌍도 슬프게 울다 왕자 곁에서 죽었다.

 

제주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쪽 팔리는' 이야기일 수가 있겠다. 유구 왕세자 피살설은 허구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광해군일기’‘인조실록’‘택리지’ ‘연려실기술’ ‘열하일기’ 등의 기록이 확연하다.

 

이야기 속의 사또는 이기빈(1563~1625)이었다. 그는 국경을 침범한 도적의 무리를 처단했다고 왕에게 거짓으로 보고하고 상까지 받았다가 진실을 들키고 만다. ‘인조실록’에 의하면 그는 이 배에서 탈취한 보물을 왕에게 뇌물로도 바쳤다.

 

“일이 발각되어 이기빈은 옥에 갇혔으나 많은 보물과 진주를 광해군에게 바쳤기 때문에 형벌을 면할 수 있었다. 반정이 일어난 뒤에도 기빈에게 여전히 북변의 중책을 맡기는 데 까지 이르렀으니, 오늘날 인재등용이 구차하다고 이를 만하다.”

 

왕자가 남긴 시에 등장하는 죽서루(竹西樓)는 산지포구에 있는 정자였다. 이 곳에 정박했던 그 배의 규모가 굉장했는데, “배 한 척에 10여 개의 돛을 전례에 따라 세운 것을 보면 분명 왜구의 배는 아니었다.”고 실록에 기록하고 있다. 이기빈은 행동대장이던 판관 문희현을 시켜 증거를 없애느라 이 배를 태워버리고 배에서 내린 사람 100여 명을 다 죽여 버렸다.

 

다른 버전에는 죽서루 대신에 조천관(朝天館)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지금의 조천포구에 있는 숙소였다. 이 곳이 육지와 연결하는 요지였기에 왕래하는 관리와 조공선이 많았다. 이기빈은 유구왕자를 죽이기 전에 이곳에 살게 했던 것 같다.

 

이 사건의 여파는 오래 갔다. 제주도 보재기(포작인), 즉 뱃사람들은 일본이나 유구국 지역에 표착할 경우 나주, 강진, 영광 출신이라고 거짓말을 해야 살아 돌아올 수가 있다고 믿었다. 또 유구국 군사들이 피살된 왕자의 원수를 갚기 위해 백령도에 들어와 잠복해 있다는 소문이 나돌아 광해군(1575~1641)이 직접 비변사에 대책을 강구하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했다.

 

유구 왕자가 죽임을 당한지 12년 후인 1623년 4월 한양에 쿠데타가 일어났다. 서인 일파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한 사건인데 인조반정이라 한다. 조선 15대 왕이던 광해군은 혼란무도(昏亂無道) 실정백출(失政百出)이란 죄목으로 왕자의 신분인 군(君)으로 강등되어 유배되었다. 강화도에서 제주로 옮겨 유배된 때가 1637년 6월, 조선왕조 오백년 간 제주에 유배된 200여 명 가운데 최고 신분이었으나 외롭게 죽었다. 광해군이 마지막 4년을 살았던 곳은 원도심 중앙로의 외환은행 앞에 표석만 남아있다. 제주에서 살다 이렇게 죽은 것은 유구왕자의 원한이 그에게 씌운 것인지도 모른다.

 

오백년 동안 철저히 해양을 닫아버린 조선과 달리 유구국은 일찍이 서구의 해양세력과 활발히 교역을 했다. 동양 최초의 국제무역항인 말라카에 1512년부터 1515년까지 머물렀던 포르투갈 상인 토메 피레스는 유구 상인들에 대한 극찬을 남겼다.

 

“유구상인은 신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노예를 사지 않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네 사람을 노예로 팔지 않는다. 그들은 빛깔이 희고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며 중국인보다 우수하고 위엄이 있다. 그들은 말라카에서 상품을 실어다 중국 일본 등으로 가서 장사를 한다. 유구상인은 신용거래를 하지만 채권을 청산할 때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면 칼을 대서라도 대금을 걷는다. 그들은 성실하고 중국인보다 믿을 수 있으며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연산군이 흥청망청하고 정치인들은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며 파벌 다툼으로 피바람을 불러올 무렵 유구상인들은 동남아, 중국, 일본에 중개무역을 하여 풍요로운 해상왕국을 일구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 등장하는 주천석과 만산장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당시 제주인들의 눈에는 경악할 만한 문명의 상징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구체적인 보물로 황견사(黃繭絲) 150석이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견사는 누에고치에서 켠 천연 섬유로 비단을 짜는 데 쓴다. 황색 비단은 왕이나 최고 권력자 아니면 옷으로 지어 입을 수 없었다. 석(石)이라는 단위는 섬이라고도 하는데, 장정 한 사람이 짊어질 수 있는 양이었다. 또, 명주(明珠)와 마노(瑪瑙)라는 보석이 1100개가 나왔다고 한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교훈은 늘 있다. 만약 이기빈이 욕심을 버리고 그들과 친선우호를 다졌다면 제주도가 해상왕국으로 발돋움할 비법을 전수받지는 않았을까? 이 사건이 있기 이미 125년 전에 제주 보재기들의 해양기술은 상당했었다. 조선 최고의 쾌속선을 부리고 있었음이 1486년 실록에 나타나는데, ‘두무악’이라 불렸다. 두무악(頭無岳)은 원래 한라산의 별칭이었으나 제주 출신 뱃사람, 또는 그 선박을 이르기도 했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가 왕에게 보고 하기를, “두무악은 모두 배를 잘 부려 물결에 달려가는 것이 나는 새와 같으니, 그들을 어루만져 편히 살게 하면 급할 때에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빠른 만큼 배의 규모는 작았다. 그렇다면 제주 해민들은 조선해군에 투입되었을까? 두무악은 일종의 해적일 수도 있고 물위에서 붙어살며 정처 없이 유동하고 옮기므로, 급할 때에 쓰기가 어렵다는 결론이었다.

 

그렇다고 제주에는 작은 배만 있었을까? 제주의 말이나 특산물을 실어 날랐던 진공선에 대해 김유정의 연구에 의하면, “탐라의 조공·사신 일행의 규모는 70-190여명 정도였다. 대선의 인원으로 상정하면, 탐라배 한 척의 일행은 평균 약 80여명, 적을 때는 77명이었고, 많을 때는 92명 정도이니 대선에 거의 미치는 수준이었다. 이 일행은 사신과 수행원, 뱃사공을 포함한 인원”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제주에 원시적인 떼배인 테우나 한두 명이나 타는 고깃배만 있었던 것으로 착각한다. 박물관에 그렇게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유구 보물선이 닻을 내렸던 곳에는 중국에서 피난 온 중국배가 재현되어 있는데 그 옆에는 한국의 전통배 조운선, 한국의 전함 거북선, 제주의 전통배 테우가 부속품처럼 아주 작게 전시되어 있다.

 

유구의 보물선이 닿았던 산지포구 일대에는 지금 포클레인 소리가 요란하다. 탐라문화광장을 조성한다고 하는데, 조감도를 보면 탐라도, 문화도 없고 그냥 어디 가나 볼 수 있는 공원에 불과하다.

 

12년 전 중국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된다고 22억 원을 들여 재현한 중국배는 지금은 중국 관광객들이 싫어한다며 철거하겠다고 한다. 그냥 두고 그 근처에 탐라 진공선과 쾌속선을 제대로 재현시키면 어떨까?  또, 유구 보물선 사건에 대해 반면교사의 표석이라도 하나 세우고 오키나와와 친선을 다지면 어떨까? 주천석과 만산장을 능가하는 제주의 보물을 발굴하고 창조하는 어떤 계기를 모색해보면 어떨까? 

 

☞강민수는?
=어느 대기업 회장실과 특급호텔 홍보실장을 거쳐 어느 영어교재 전문출판사의 초대 편집장과 총괄임원으로 3백여 권의 교재를 만들어 1억불 수출탑을 받는데 기여했다. 어린이를 위한 영어 스토리 Rainbow Readers 42편을 썼고, 제주도와 중앙일보가 공동 주관한 제주문화 콘텐츠 전국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대안 중심의 환경운동가로 제주 최초의 마을 만들기 사례인 예래생태마을의 입안자이며 펭귄수영대회 등의 이벤트 개발자이기도 하다. 현재 제주의 한 고등학교 초빙으로 영어를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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