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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시평] 내전보다 더 나은 선거 ... 미래는 유권자가 만든다

 

긴 세월이 흘렀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따지고 보면 무수히 많은 말과 약속, 이벤트를 목도했지만 어쨌건 이젠 선택의 시간이다. 선택은 그동안 그렇게 흘러온 정치과정에 대한 판단이다. 결단이다. 물론 유권자의 몫이다.

 

선거판 얘기를 거론하자니 미국의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Adam Przeworski)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과거 거론한 적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 시점에서 재론할 만하다. 미국 뉴욕대 정치학과 교수다. 폴란드 출신으로 이제 만 74세다. 민주주의의 본질, 민주화 이행의 조건, 민주주의와 시장의 관계 등에 관한 주요저작을 냈다. 한국정치학계에서 이론가로 꼽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스승이기도 하다. 최 교수의 미국 유학시절 박사학위 논문을 지도한 이가 바로 그다.

 

그는 2010년 말 아프리카의 5개 신문과 인터넷 미디어 아프로온라인(Afronline)과 인터뷰 자리를 가졌다. 코트디부아르·튀니지·이집트·리비아 등 아프리카 지역에서 민중의 정치적 열망이 번지면서 정치적 위기와 대중혁명으로 나라마다 체제가 흔들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선거’(election)와 ‘민주주의’(democracy)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현직에 재임 중인 자가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고, 패배하면 사무실을 떠나는 것이 민주주의다. 자유롭고 경쟁적인 선거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적어도 정치적 자유를 유지하면서 갈등을 평화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방식이다. 이것은 갈등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내전(civil war)보다 더 나은 방법임이 분명하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는다. 언제나 청렴하고, 공정하고, 투명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민중(people)들이 평화와 자유 속에서 살도록 한다.”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짚어보다 보면 두 가지가 또렷해진다. 적어도 민주주의는 이념(ideology)이 아닌 제도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민주주의를 유지·작동시키는 데 있어서 선거는 대단히 중요한 제도적 장치라는 것이다.

 

좀 쉽게 풀어 쓰면 우리 사회엔 언제나 갈등이 있을 수 있고,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 무력으로 서로를 제압하기 위해 총·칼을 동원하는 것보다 선거를 통해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 더 낫다는 얘기가 된다. 이를 깨끗이 인정하는 것이 민주적 해결방식이란 소리다. 완벽하진 않지만 최악의 상황을 초래하지 않도록 하는 차선책이 민주주의란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쉐보르스키가 선거에 대해 설파한 저서의 제목도 『Paper Stones』다. 투표용지를 저항의 상징인 ‘돌’에 빗댄 것이다.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하고 싶으면 투표함을 향해 돌을 던지라는 메시지다.

 

그랬다. 폭압의 정권이던 시절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필자로선 절감하는 말이다. 그 시절 사실 우리 세대는 ‘짱돌’을 손에 쥘 수 밖에 없었던 눈물이 있었다. 선거는 요식행위로 비쳤고, 언로는 막혔으며, 군사독재는 맹위를 떨치던 시절이었다. 아마 그 시절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것이란 말을 했다간 주변의 질책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세상은 쿠테타로 뒤집어진 상황이었고 ‘혁명’이어야만 다시 엎을 수 있을 것이란 인식이 청년층에선 팽배했다. 피를 부르는, 숭고한 민주주의 제단에 희생을 요구하는 처연함이었다. 물론 실제로 80년대를 거치며 민주주의 제단엔 수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다. 필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의 최루탄 피살 사건은 지금도 생생한 역사다.

 

지난 3월 중순 원희룡 새누리당 제주지사 후보가 홀연 등장했다. 거듭되는 ‘중진차출론’ 압박에 손사래를 치던 그는 결국 출마를 결심, “대한민국의 미래를 알려거든 제주를 보라”며 출마무대에 섰다. 그리고 그의 지지율은 고공행진을 거듭했다.

노정객 신구범 새정치민주연합 제주지사의 후보의 등장은 파란의 연속 끝에 얻은 결론이었다. 합의추대 과정을 거쳐 그는 야권의 유력주자로 부상했고 이번 선거를 중앙의존 세력과 제주자존 세력 간의 대결로 규정, “제주여! 깨어나라”고 외쳤다.

 

세월호 참사로 수학여행을 오던 학생들의 참변을 목격한 네 명의 제주교육감 후보들은 교육현장의 비운을 가슴 팍에 안고 ‘안전’을 선거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제주교육, 희망찬 미래로’를 내세운 강경찬 후보, '함께 가요! 모두의 교육감‘을 내세운 고창근 후보, ’건강하고 행복한 교육을 상상하라’고 내세운 양창식 후보, ‘단 한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이석문 후보의 초접전이었다. 선거 막판 보수후보론과 진보후보론이 불거졌지만 솔직히 말하면 교육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용어였다.

 

선거전은 유권자들을 의아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마치 선(善)과 악(惡)의 싸움으로 헷갈릴 수도 있다. 진영논리가 판을 칠 수 밖에 없는 선거판에서 쉬이 드러나는 현상이다. ‘진영 논리에 빠져서 정파적인 이익에 급급하다 보니’ 그런 것이다. ‘국민과 국익을 생각하면 될 일’이고 ‘도민과 제주의 공익을 생각하면 될 일’이다. 그게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이 맞다.

 

서강대 정치외교학과에 재직하던 당시의 이상우 교수는 1996년 1월6일자 중앙일보의 ‘시평’에서 정치를 이런 말로 정의했다. 평범한 듯 보이지만 사실 비범한 말이다. 그가 밝힌 정치는 이랬다.

 

“법대로 규칙대로 열심히 일하면 밥 먹고 살 수 있고, 아이들을 공부시킬 수 있으며, 노년에 고생하지 않으리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사회에서 삶을 살 수 있기를 국민은 원한다. 그게 정치의 요체다.”

 

백성들이, 국민들이 더 원하는 게 있을까?

 

6월4일! 오늘의 선거결과로 제주도민을 대표할 도지사와 교육감, 그리고 도의원·교육의원이 선출된다. 그 선거는 쉐보르스키의 표현을 빌면 ‘마지막 의식’(final ceremony)이다.

 

선거과정만 놓고 보더라도 발견된 제주의 문제가 비일비재하다. 새 도정은, 새 교육행정은 반드시 전임 도정과 교육행정의 문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는 점이 명백하다. 결국 변화해야 한다는 소리다.

 

그 변화는 우리 제주도민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투표참여만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동력이다. 진부한 싸움이, 총칼이 난무하는 전장터가 싫다면 투표함에 종이를 던져야 한다. 그게 유권자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법대로 규칙대로 살면 고생하지 않고 노년도 행복한 사회.’ 어느 누구도 만들어 주지 않는다. 그건 바로 우리 유권자만 만들 수 있는 미래다. [제이누리=양성철 발행·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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