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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적...원말 탐라백성을 위무한 유총관

 유총관 고적(高適)

 


 

 =제주출신 수상(총리)이었던 고조기의 손자. 삼별초란 직후 어진 덕성으로 인해 탐라의 백성들을 위무(慰撫)하는 유총관(留摠管) 직에 임해졌던 성주(星主)족. 원과 고려 사이에서 고난 했던 시절을 시로 달래고 글씨로 달랬던 인물이다.

 


 

 김석익의 「탐라인물고」에는 고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고려 탐라인이다. 문장과 글씨로 고려에 이름을 떨쳤다. 원종 신유년(1261)에 과거에 합격하여 바로 조정에 들어갔다. (후에) 부모님을 찾아뵈러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탐라가 삼별초의 난을 당하여 병사와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하였다. 이에 고적은 숲과 계곡이 있는 곳에 은거하며 산자락에 자취를 감춰 버렸다. 왕이 그의 청렴함과 정직함을 듣고 사신 유희망(柳希望)을 보내어 말이 끄는 수레로 그를 맞이하게 하고 감찰어사(監察御史;종6품)의 벼슬을 내렸다. 고려의 조정이 바다를 건너 군사를 보내어 삼별초를 토평(討平)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조정에서는) 고적이 본래 탐라인으로, 탐라인들이 그 어짊을 알아 민심을 진정시키기에 마땅하다 하여 드디어 탐라유총관(耽羅留摠管)으로 삼아 남은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도록 하니 충렬왕 2년(1276)의 일이다. 무인년(1278)에 조정으로 돌아가니 왕이 친히 금패(金牌)를 주어 위로하였다.

 

기아(箕雅;신라에서 조선 인조때까지의 시를 추려 엮은 시선집(詩選集))에 ‘원나라에서(觀風上國吟)’라는 다음의 시 한 수가 전한다.

 


 

이내 집 삼천리 떠나       / 家在三千里外程

 

낯선 땅 머무는 신세       / 身留十二帝王城   

 

옥피리 불다가 잠들면 고향 / 玉簫吹斷江南夢

 

창밖엔 한밤중 달도 휘영청 / 窓外三更月又明

 


 

마음을 편안하고 말끔하게 해주니 그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겠다."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위의 시 단 한 편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식견이 있는 자는 ‘깃털 하나만을 보고서도 봉황임을 알아 낼 수 있다(一羽知鳳).’ 하였으니 심재(心齋)는 이 시를 통해 고적의 사람됨을 드러내고 있다.

 

 여하튼 고적의 행적을 통해서도 원과 고려 사이에서 버거운 삶의 무게를 감당해 내야 했던 제주 옛 선인(先人)들의 삶을 짐작케 한다.

 

글=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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