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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연가] 한국저작권위원회 양창윤 사무처장

파일럿을 동경했지만…

 

이제 나이 56세. 그는 어린 시절 제주시 연동 ‘판관밭 아들’로 불렸다.

 

중학 1년 때 아버지를 여의자 어머니와 제주시 서문통 무근성 지역의 ‘점빵’ 향연식품을 지키던 그다. 대학시절엔 가게 옆 세차장에 온 택시운전사들에게 라면을 끓여 팔아 성실과 인사성을 인정받았다.

 

그는 이제 서울 강남의 사무실에 출근한다. 몇 년 전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집이나 다름없는 일터였다.

 

한국저작권위원회 양창윤 사무처장.

 

그는 고향 제주시 한경면 산양리를 5살 때 아버지 손을 잡고 나와 부모가 터잡은 제주시 연동 마을에서 자랐다. 지금의 제주도지사 공관이 자리잡은 곳 인근에 30만평 가까운 농촌진흥원 시험재배지가 그의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조선조 국유농경지였기에 예부터 '판관밭'으로 불리던 곳이다. 아버지는 그 시험재배지의 관리역을 맡았고, 그는 마치 그 땅이 제 땅인 양 목에 힘을 주기도 했다. 드넓은 초원과 뛰노는 말들이 그의 무대이자 벗들이었다.

 

그 초원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씽씽 날아가는 비행기가 일품이었다. 그 비행기를 언젠가 조종해보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동경이었다.

 

고교를 마치고 그는 공군사관학교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필기시험도 무사 통과했다. 면접고사까지 마쳤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답은 ‘노’였다.

 

그때 처음 알았다. 외숙부가 4·3사건 때 좌익 무장대 활동을 했다는 그 꼬리표 하나가 공군사관학교 불합격이란 부메랑으로 되돌아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연좌제였다. 분노했다. 그러나 좌절할 순 없었다.

 

제주대 경영학과에 진학,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ROTC에 문을 두드렸더니 그곳은 받아줬다. 해병장교로 군복무를 마칠 수 있었다. 조금이나마 분이 풀리는 듯 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첫 휴가를 받아 제주에 왔더니 둘째 형이 뜬금없는 제의를 해왔다. “힘을 합쳐 사업을 하자”는 것이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비료사업으로 이름을 꽤나 알렸던 경기화학·대지상사가 그가 몸담았던 기업이다. 상무·전무 직함을 들고 다니며 회사 사옥을 짓고, 비료를 팔고자 제주도 전역 안 가본 곳이 없다. 농사현장 곳곳을 누비고 다니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사람 네트워크 최고’가 돼 가고 있었다. 절망적인 농촌의 현실도 깨달았다.

정치를 만나다

 

그게 정치현장에 나서게 된 그의 브랜드였다. 87년 6·29민주화선언에 이은 민주화 열망 속에 대선이 다가올 무렵 그는 당시 국회의원이던 정치적 스승 현경대 전 의원을 만났다. 그를 눈여겨 보던 현 전 의원은 그에게 민정당 제주도당 청년부장 자리를 맡겼다. 대선보다 그 이듬해 있을 국회의원 총선을 염두에 두고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현 전 의원의 풍모를 높이 보던 그로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현 전 의원은 88년 총선에서 맥없이 무너졌다. 한 방송사의 방송사고가 “여당의 선거조작”으로 몰려 어이없이 낙선한 것이다.

 

하지만 한번 맺은 인연은 의리다. 사업에서 손을 놓았지만 그는 현 전의원과 더 단단히 도원결의했다. 백수같은 생활도 잠시. 90년 현 전의원은 장관급인 민주평통 사무총장으로 발탁됐다. 그는 국가직 4급인 비서관으로 그를 지근거리에서 수행하는 입장이 됐다. 30대 초반 제주도의 국장급 신분으로 올라선 것이다.

 

서울살이는 그 때부터 시작됐다. 그후 현 전의원은 당선과 낙선을, 천국과 지옥을 오락가락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는 현 전의원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현 전의원의 변하지 않는 수석보좌관이었다.

 

어떨 땐 먹고 살 걱정으로 “앞길이 깜깜한 적도” 있었다. 현 전의원이 낙선, 일자리가 사라지면 그는 다른 의원의 보좌관 공채에 응시했다. 국회의원 보좌관 생활 때 “성실과 겸손, 의리와 화합은 당연 양창윤”이란 말을 듣도록 밤낮없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예의바르게 움직였더니 제주가 지역구가 아닌 안경률 의원이 보좌관으로 받아들였다.

 

50줄에 정치학 박사…“아내와 두아들이 이룬 꿈”

 

그렇게 21년간 보좌관 생활을, 그것도 법사위원장과 재정위·환노위·행정위·산자위 모두 관여한 보좌관 생활을 하다 보니 국회의 법안 심사 전 시스템이 한 눈에 훤히 들어왔다.

 

하지만 실력 없고, 나이만 들어가는 보좌관은 조기퇴출 되는 현상이 눈에 보였다. 실력을 키워야 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말 그대로 주경야독했다. ‘제주도 정치문화와 선거-국회의원 선거를 중심으로“란 논문을 쓰고 숭실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던 날 집에 가서 아내와 마주 앉았더니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 어엿한 대기업에 다니는 두 아들은 그런 그의 희망이자 미래가 돼 주었기에 그래도 뚜벅뚜벅 쉼없이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제주는 그 와중에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곳이었다. 제주출신을 만나면 ‘우리 제주’를 어떻게든 키워야겠다고 생각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다보니 국회에서 근무하는 제주출신 보좌관·사무처 직원 등 전 공직자가 참여하는 ‘국회 제공회’의 회장까지 됐다. 지난해 일이다.

 

그리고 21년의 보좌관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쉴 수 없었다. 연초 한국저작권위원회의 공모에 문을 두드렸다. 면접 질문은 “국회 보좌관의 청렴도가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자신 있게 말했다. “내 차는 15년 된 기아 크레도스입니다.”

 

그리고 이젠 문화관광체육부 산하 한국저작권위원회 사무처장이 됐다. 연간 300억원의 예산을 주무르는 곳이다.

 

-저작권위 생활은 어떤가.

 

“할만 하다. 이제 1년이 다 됐다. 글로벌 문화경쟁 시대 문화산업을 지원하는 곳이다. 어문·영상·사진·연극·건축·도형 등 각종 콘텐츠의 공정 이용과 보호를 도모하는 기관이다. 그곳에서 난 인사·조직·재무·예산·노무관리 등 모든 사무를 총괄하고, 대외적 활동도 도맡아 한다. 어린 시절 기업에서 근무했던 경험, 국회 곳곳을 누비고 다녔던 경험이 솔직히 굉장히 도움이 된다. 우리 역시 예산 확보가 중요한데 그 경험이 많이 도움이 된다.”

 

-고향 제주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제주도민의 자긍심이 높아지길 원한다. 솔직히 고향에 내려가면 그렇지 않아도 작은 동네서 소지역주의 갈등이 커 걱정이 많다. 무고죄가 가장 많은 곳도 제주다. 통계도 있다. 국제자유도시를 향해 가는 곳으로서 이건 아니다란 생각이 든다. 의식 바뀌어야 한다. 관광지이기에 친절·서비스 정신이 있어야 한다. 더 세련돼야 한다. 좋은 자연환경만 믿고 가만 있으면 되는 시대가 아니다. 많이 부족하고 아쉬운 점이 많다. 많이 답답하다.”

-꼭 지적하고 싶은게 있는가.

 

“신제주, 신개발지가 아닌 구제주 권역이 몰락하고 있는 현장을 자주 가서 느낀다. 이건 제주도의 책임자, 결정권자의 직무유기라고 본다. 무조건 구제주 권역을 부흥시킬 방책을 찾아야 한다. 상권을 북적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관덕정과 서문통 거리만 하더라도 최소한 야간조명시설이라도 설치, 무언가 눈길을 끌어야 한다. 칙칙한 어둠의 그늘만 남아 있다. 안타깝다.”

 

-혹 아이디어라도 있다면.

 

“서울의 인사동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제주의 것, 제주적인 것, 제주다운 것만 보고, 만나고, 살 공간을 만들면 좋겠다. 제주말만 들리고, 제주음악이 들리고, 제주문화가 돋보이는 공연이 열리고, 제주토속 음식을 맛보고, 갈옷 같은 제주의복을 쉽게 사고, 제주의 농·축·수산물을 편하게 싸게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말하자면 제주테마스트리트를 만들어보았으면 좋겠다. 그 거리 곳곳에 제주문화를 알리는 스토리텔링이 뒷받침되면 금상첨화다. 제주문화콘텐츠의 완결판을 한 곳에 몰아넣는 것이다. 연간 800만명에 이르는 관광객 다수가 반드시 그곳은 갈 수 밖에 없다. 그게 제주로 관광 간 이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되면 돈벌이는 쉽다.”

 

-할 얘기가 많은 것 같다.

 

“솔직히 정말 많다. 제주 안에 갇혀 생각하는 분들에게 정말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다. 사라져가는 우리 제주방언, 이건 심각한 문제다. 소중한 문화콘텐츠가 역사의 골방으로 실종될 위기다. 학교에서 정식 과목을 개설해서라도 가르쳐야 한다. 인조시절 출륙금지령이 내려진 섬, 일제강점기 7만명의 일본군이 주둔했던 섬, 4·3사건 당시 소개와 초토화작전으로 수난받았던 섬, 제주에만 있는 독특한 신구간 문화, 이런 것들을 도대체 어떤 관광객들이 알고, 느끼고, 이해하고 제주섬을 떠나는가. 왜 이런 것들이 관광의 중요콘텐츠로 등장하지 않는가. 아주 손쉽게 제주로 가는 항공기 안에서 영상 또는 음성으로 제주를 알리는 노력이 없는지 이해할 수 없다. 제주행 항공기를 타고 가는 이들에게 이건 대단한 얘깃거리다.”

 

-실상 정치현장의 한 복판에 있었다. 제주의 지방정치 현장은 어떻다고 보나.

 

“촘촘히 얽힌 다중적 네트워크 사회라고 진단한다. 초·중·고교는 물론 학연·혈연·지연 모두가 얽혀 있다. 인구대비로 보면 각종 친목·사회단체수가 육지와 비교하면 3~5배나 많다. 경조사 돌보는게 중요하지만 경조사 정치로 흐르는 건 심각한 문제다. 고뇌하고, 번민해야 하며 결단해야 할 기관장이 각종 행사나 뒤쫓아다니며 축사 진행으로 시간을 허비한다. 사색하고 고민할 짬이 없다. 그 결과는 그릇된 판단으로 다시 도민에게 되돌아간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는가.

 

“하루는 그런 적이 있다. 여당의원 보좌관시절이었다. 여당 사무총장이 최고당직자회의 도중 농담하듯 ‘제주도를 반란의 섬’이라고 말했다. 소식이 알려져 제주도에선 항의방문단까지 국회로 왔다. 그 사무총장이 항의방문단에게 손을 내밀 때 여당의원 보좌관인 내가 ‘어디서 그 더러운 손으로 악수를 청하느냐’며 악다구니를 부렸다. 다들 휘둥그레졌다. 항의방문단이 할 일을 내가 한 것이다. 그런데 안 짤렸다. 나도 지금 그게 신기하다. 그만큼 제주는 나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혼이다. 서울에서 최대한 더 역량을 다지겠다. 그 역량이 축적되면 언젠가는 고향을 위해 일하고 싶다. 제주는 내 생명이 움튼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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