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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아동 양육수기 당선작 연재]장려상-신혜수씨 수기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신혜수(42·제주시 연동)

 

“쿵쿵 딱딱~” 난타공연이 한창이다.

 

공연에 집중을 하려해도 자꾸 아이의 반응이 신경이 쓰인다.

 

언제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를 것인가.

 

하지만 아이는 1시간 반가량의 난타공연을 앞의 의자를 차지도 않고, 울며 나가자고 보채지도 않고 잘 보아 주었다.

 

주위의 다른 아이들과 부모들은 못 느꼈을 희열을 무대의 열기보다 더 진하게 느끼며 아이와 함께 제주시로 오는데 볼을 타고 내리는 한줄기 눈물은 주체할 수 없는 오열이 되어 가슴을 후빈다.

 

2004년 10월. 우리 가족은 뉴욕발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입성했다.

 

17시간의 긴 비행을 마치고 국내선으로 갈아타 제주로 들어오려는데, 아이가 너무 울어 탑승이 불가능하다는 승무원의 말에, '우리는 미국에서 오고 있는 중이고 당신이 우리의 하루 체류비용을 다 대준다면 다음날 가겠다'며 으름장을 놓고서야 겨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승무원은 우리 아이를 위해 가장 편한 곳으로 안내한다며 비행기 맨 뒷자석으로 안내했고 우리 가족은 똑같은 돈을 내고도 죄인인 양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편안히 잠든 아이의 얼굴 위로 6년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아이의 장애를 알게 된 건 너무나 우연이었다.

 

큰 아이가 한국생활에 적응을 못해 보건소 정신건강센터에 데려간 적이 있다.

 

물론 큰 아이는 지극히 정상이라는 판명이 났고 그런데 그 때 데리고 갔던 둘째 아이가 손바닥을 펴고 뛰어 다니는 모습을 본 교수님이 다음주에 둘째를 데리고 오지 않겠냐고 권했고 난 별 생각없이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둘째를 데리고 병원에 간 그날, 난 하늘이 노래지는 경험을 했다. 아이는 발달장애라는 것을 앓고 있으며 빨리 치료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모아반’을 추천받았다.

 

발달장애와 관련된 서적이며 인터넷 정보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읽고 또 읽었다.

 

혹여 의사의 잘못된 판단일 수 있다고 어느 책에서라도 증명해 주기를 바라며 책이 닳도록 읽었다.

 

하지만 읽을수록 아이의 장애여부는 더욱 뚜렷해 갔고 나와 남편은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아이에게 복지카드를 만들어 주었고 아이를 받아들이기 힘들 때마다 그 카드는 나를 현실의 세계로 끌고 내려와 줬다.

 

아이의 장애를 알고 난 후 처음으로 ‘모아반’과 ‘작업치료’를 했다.

 

엄마와 함께 들어가서 4시간여 수업을 받는 ‘모아수업’은 우리 아이에게는 너무 버거웠었는지 처음 두달간은 정말 끝도 없이 울었다.

 

난 그런 아이를 안고 교실 귀퉁이에서 달래보기도 하고 책상에 앉혀 수업을 독려해 보기도 했지만 아이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울기만 했다.

 

3개월이 지나자 아이도 지치고 엄마도 지쳤다. 그랬더니 아이의 눈물이 그쳤다.

 

수업에서도 일취월장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대로 계속 좋아지면 아이는 장애를 털어내 버릴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오만함에 우리 가족은 아이 중심이 아니라 그 때의 상황에 충실하려 했고 우리 가족은 서귀포로 이사를 갔다.

 

조그마한 마트를 하며 아이를 복지관에 보내기도 하고 어린이집에 보내기도 했지만 바빠진 엄마의 탓일까. 아이는 상향곡선으로 커 줄 것만 같던 기대를 저버리고 퇴행의 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난 궁여지책으로 제주시까지 교육을 받으러 다녀야 했고 그 와중에 알게 된 장애통합어린이집인 ‘제주 근로복지공단 어린이집’을 알게 되었고 난 아침마다 아이를 차에 태우고 서귀포에서 제주시로 통학을 강행했다.

 

마트가 늦게 끝나 잠을 충분히 못 잘 때는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경험도 하며 때론 비를 뚫고 때론 안개를 뚫고 그렇게 4개월이 채 안되는 시간을 아이와 함께 참 많은 고생을 했다.

 

제주시로 이사를 오니 남편이 식당을 하고 싶어했고 우린 아이의 교육에 방해되지 않는 한도내에서라고 생각하며 식당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를 아침에 통학시키는 것도 너무나 힘들어 전담어린이집으로 보내야 했고 장사라는 것이 아이를 자꾸 방치하게 만들었다.

 

우리 부부는 큰 용단을 내려야 했다. 주위에서 '잘 되는 식당을 왜 안하느냐'는 수많은 물음표에도 우리는 조용히 식당을 접었다.

 

그때부터 난 하루 24시간 아이만을 생각하자며 수북이 먼지에 뒤덮인 옛날 자료들을 꺼내고 인터넷을 헤집고 다녔다. 부모교육, 장애관련 모임을 수 없이 쫓아 다니며 아이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하자며 죽기살기로 달려 들었다.

 

마트와 식당을 하며 보낸 3년이 넘는 시간 속에서 우리 아이는 '자폐성장애1급'이라는 타이틀 속에 자신을 놓아 두어야 했기에 그 책임은 분명 엄마인 나에게 있다고 생각돼 정말 아이에게 보상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아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아이는 제자리걸음 일뿐 아니라 다른 아이에게 폭력성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우려는 나에게 짐이 되었고 아이들의 상처는 나에게도 상처가 되었다.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시골에 머물기로 마음먹었다. 아는 이가 시골에 빈 집이 있어 문화 시설이 전혀 없는 그곳에서 아이와 마주 앉아 보기로 결심을 했다.

 

다니던 초등학교 1학기를 마친 시점의 일이다.

 

우리는 아침이면 도시락을 싸서 성산일출봉을 오르러 갔고 점심을 먹고 난 후엔 비자림에서 송이위를 맨발로 걸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동네를 걸었고 가끔 바다에서 알몸으로 놀기도 했다.

 

그리고 한달 반. 집주인의 사정으로 제주시로 올라와야 했고 아이는 그 새 많이 커 있음에 감격했다.

 

다니던 어린이집의 배려로 다음해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어린이집을 다닐 수 있었고 폭력성 때문에 학교까지 관뒀다는 것을 아시는지라 모두들 긴장 속에 아이의 하루하루는 별 탈 없이 잘 흘러 두 번째 졸업식을 잘 치렀다.

 

두 번의 졸업식, 두 번의 입학식.

 

아이는 집 가까운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고 지금 다니는 초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전학온 후 아이는 적응이 쉽지 않았다.

 

교실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고 보조선생님과 나는 4층을 오르내리며, 학교를 구석구석 뒤지며 아이를 찾아 해매야 했다.

 

지금은 나갔다고 해도 자기가 알고 돌아온다는 믿음이 있어 괜찮지만 처음에는 낯선 곳에서 아이가 미아라도 되면 어쩌나하는 걱정에 아이를 학교에 놔두고 오는 발걸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지금이야 좀 깨닫게 된다.

 

어떤 환경이라도 참고 견디다 보면 분명 밝은 미래가 올 것이라고, 지금은 아이도 아이를 둘러싼 환경도 모두 부족해 보이지만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했던 페르시아의 어느 왕처럼 매순간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아이도 나도 우리 가족도 그리고 아이처럼 힘든 친구들도 성장해 있으리라 믿는다.

 

아이가 4살 때 퍼시픽랜드에 갔던 일이 생각 난다. 들어는 갔는데 아이가 울고 불고 떼를 쓰며 나가자고 했다.

 

난 이대로 나가면 아이는 다시는 이런 곳에 올 수 없을거라 생각하고 아이의 손을 잡고 공연장 실내 화장실에서 1시간을 버텼다.

 

들어오는 이마다 울고 있는 아이를 보며 또 나를 보며 만가지 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난 울고 있는 아이를 안고 함께 울며 이렇게 말했다.

 

“명탁아, 괜찮아 이 정도쯤은 우리 아가 이겨낼 수 있지?”

 

…이틀 전 현란한 조명이 눈을 어지럽히고 크나큰 소리들이 청중을 압도할 때 우리 아이는 그 곳, 난타 공연장에 있었다.

 

울지도 보채지도 않았고 심지어 그 무대를 즐기는 것 같았다. 5년 전의 그 고통이 새록새록 가슴을 울린다.

 

아이의 장애를 알고 6년…

 

어제까지 보낸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아이와 함께 힘차게 보내야 하리라.

 

아이들이 우리 아이보고 “바보”라 놀린다 한다.

 

난 우리 아들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명탁아! 넌 바보가 아니라 천재란다. 너의 진짜 모습을 모르는 사람들이 널 바보라 놀리는거야.
네가 바보가 아닌 모습을 보여 주자꾸나. 그래서 너에게 바보라고 놀렸던 모든 이에게 이렇게 말하자. 아인슈타인도 에디슨도 세상이 그들을 알아보기 전까지 바보였다고. 하지만 그들은 이 세상을 바꿨고 그리고 위대했다고. 너도 분명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단다. 누군가가 널 위해 울며 기도하고 있음을 잊지 말거라. 사랑한다 아들아. 네가 있어 엄마는 행복하다.”

 

아이가 갈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님을 안다.

 

아이가 살 날도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 것이다.

 

모든 고통과 슬픔은, 그것 또한 지나갈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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