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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아동양육수기 공모전 최우수작 '아이야 이젠 엄마는 울지 않는다'

"아이야 이젠 엄마는 울지 않는다"

이광희(47·서귀포시 동홍동)

 

서른이란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고 결혼생활 5년동안 아이가 없었다.

 

일년동안 인공수정만 일곱번.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채 최종적인 결론은 남편의 정자수 부족으로 불임판결.

 

남편은 장남이라는 수식어때문에 아이를 간절히 원했다.

 

나 역시 허탈감에 우울증까지 앓았고 결국엔 이혼을 결심했다.

 

이혼 결심 일년동안 남편은 밖으로 돌았고, 우리 부부는 거의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년을 보내고 친정식구의 권유로 홀트아동복지회에 입양신청을 했다.

 

너무나 까다로운 심사 탓에 입양도 할 수 없었고 결국엔 합의하에 이혼을 결정했다.

 

서류를 제출하고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남편은 법원에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이혼은 없었던 일로 되어버렸고 서로가 서로에게 등을 돌리며 세월만 보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몸에 이상이 생겼고 먹는 음식마다 토하는 증상이 생겼다.

 

주위에서는 임신이라고 병원엘 가보라고 했지만 남편이 불임 판정을 받았는데 어떻게 임신이 될 수 있느냐며 절대 아니라고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병원엘 가보자는 친정엄마 손에 이끌려 산부인과를 갔고, 그곳에서 임신 3개월 이라는말에 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남편이 불임인데 내가 어떻게 임신을...

 

남편이 불임 판정을 받은 병원에 다시 가보자고 해서 갔는데 의사선생님 말씀이 내가 힘들어 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조금 과장해서 말했을 뿐이라고... 그 때는 의사선생님이 미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기다리는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한 배려였으리라 생각한다.

 

임신 5개월째 되던 어느 날 갑자기 많은 하혈을 해서 병원에 가보니 유산이라고 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울고 있는데 어떤 산모가 내 곁으로 와 내 손을 잡았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다른 병원에도 한번 더 가서 진찰을 받아보면 어떠냐고...

 

그래. 오진일 수도 있을거야. 아니 절대 포기할 수 없어. 어떻게 얻은 아이인데.

 

친정엄마를 설득해서 서울 병원으로 갔다.

 

분만실로 들어가라는 의사선생님 말에 "아~ 여기서 끝나는구나. 서울 큰 병원도 우리아이를 지켜주지 않는구나" 혼자서 생각하고 울고 또 울었다.

 

철제 기구소리가 십분정도 들렸고, 의사선생님이 '끝났습니다'라며 수술 장갑을 벗으면서 하시는 말씀.

 

이젠 안정을 취하는게 뱃속에 아이를 살리는 길이라며 웃으시던 그 얼굴에서 하나님이 보이는 듯 했다.

 

아이를 유산한 게 아니고 잠시 밑으로 내려온 걸 올렸을 뿐이라고 했을 때, 정말 세상이 다 내것 같았다.

 

병실에 누워서 석달을 보냈고 아이는 10개월을 다 채우지 못하고 8개월만에 세상에 나왔다.

 

 

심장이나 호흡기에 이상은 없으나 크면서 장애가 있을 수 있다고 했지만 절대로 포기 할 수 없다고 사정하자 아이는 인큐베이터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아이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돌사진을 찍을때도 뒤에서 잡아야했고, 잦은 경련으로 응급실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어려운 가정 형편때문에 아이를 보육시설에 맡겨야 했는데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거절도 당했다.

 

아이가 다쳤을 때는 각서까지 받는 보육 시설도 있었다.

 

그러다 사회복지사의 권유로 장애 보육시설인 파랑새어린이집(현재는 해인어린이집)엘 다니게 되었고 다섯살이 되도록 걷지도 못하던 아이가 선생님들의 보살핌으로 기저귀도 떼고 한발짝씩 걷기도했다.

 

아이에게서 가능성이 보이자 장애인 복지관에 치료 신청을 했고 얼마 기다리지않아 순서가 되어 치료를 받게 되었다.

 

집에서 차로 한시간 거리인 복지관과 어린이집을 다니다보니 집안일은 엉망이 되어버렸고, 아이에게 모든 신경을 쏟다보니 남편은 스스로를 포기하고 엇나가기 시작했다.

 

하루를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냈고 화를 참지못해 폭력을 썼다

 

아이로 인해 많은 빚을 졌고, 해도 해도 끝이없는 아이의 치료비는 가정을 파탄위기까지 오게했다.

 

무직자인 남편과 아이때문에 아무일도 할 수 없는 나. 빈곤층에 가까운 삶인데도 천평짜리 과수원이 있다는 이유로 정부에서는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았다.

 

아픈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치료를 받으러 갈 때면 의례껏 돈 때문에 싸웠고, 그러기를 수차례 반복하다보니 결국엔 이혼을 선택했다.

 

아이가 다섯살때 이혼을 했고 그때부터 기초생활 수급자가 되어 병원비와 생활비를 보조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혼 당시 무일푼이었던 나와 아이는 머물 곳이 필요했고 생필품이 필요했다.

 

친정 아버지의 도움으로 방 한칸을 얻긴했지만 아이가 장애라는 이유로 한달만에 그집에서 나와야 했다. 아무도 우리 모자를 받아주는 이 없어 막막해 할 때 무료 주택을 추천해주신 고마운 아주머니가 있었다.

 

말이 주택이지 밀감창고를 개조해 만든 일꾼들 숙소였다.

 

하지만 그런 초라한 집도 우리 모자에겐 궁궐이었고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였다.

 

난방시설이 없어서 아이는 감기를 달고 살았고, 장마때는 비가 새서 빗물을 받아야 했지만 어려운 형편을 알고 무료봉사해 주신 분들 덕택에 몇년을 그곳에서 보낼 수 있었다.

 

아이는 복지관에서 받는 치료로 하루가 다르게 달라졌고 돌봄 도우미 서비스를 받으면서 아빠의 빈자리를 채운 탓인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많이 좋아졌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복지관의 1대1 치료가 없어지면서 복치관 치료가 중단되었고 아이는 특수학교에 입학을 했다.

 

처음 태어날때 뇌병변장애가 있던 아이가 지금은 좋은 치료(바우처치료, 언어 음악) 덕분에 걷는 것은 물론이고 뛰기까지 한다.

 

초등학교 3학년때 말이 터졌고 지금은 초등학교 5학년 12살인데 제법 아이 티가 난다.

 

아직은 많이 산만해 여러 곳에서 가정도우미와 돌봄도우미의 도움을 받고 있어 양육하는데 크게 불편한 점은 없고, 3년 전 임대 주택에 입주하면서 생활 환경도 매우 좋아졌다.

 

언젠가 아이는 왜 장애가 있는 자기를 낳았냐고 내게 물을 때가 있을것이다

 

그러면 난 어떻게 답변을 할지 ...

 

우리 부모들은 아이보다 하루 더 살기를 바라지만 그건 생각일 뿐이고 아이가 자라서 할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만들어 아이의 삶이 윤택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아이야! 지금 너는 어느 시간에 멈춰 버린 시계지만 엄마는 멈춰버린 시계를 충전하는 충전기가 되어 너를 지켜주고 싶다

 

사랑한다 아들아! 그리고 태어나 줘서 정말 고맙다

 

네가 태어난 걸 절대 후회하지 않는 그런 세상을 우리 어른들이 꼭 만들어 줄테니 너는 그냥 너의 그모습 그대로 내 옆에만 있어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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