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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연가]강창조 변호사, 16년 검사직 포기한 그의 사연
힘·배경 없고, 억울한 이의 입이 되고자 변호사 선택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웠던 시대가 바로 일제 강점기다. 당시 친일 매국행위를 한 자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부를 축적했다.

 

부당하게 나라를 팔아 부를 채운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이 몰래 후손들에게 그 재산을 넘겼다.

 

하지만 지금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이 후손들에게 물려준 부당한 재산들이 속속 사법부에 의해 국가로 귀속되면서 그들의 죄과마저 따져지고 있다.

 

그러한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과정에 제주인이 있었다. 그는 16년간의 검사생활을 하면서 범법자들과 싸웠고, 억울한 피해자들의 한을 풀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힘없고, 배경 없고, 가슴 아픈 이들을 대변해주고 싶다는 신념은 내내 그의 가슴팍에 자리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검사보다 변호사의 길을 선택했다.

 

법정에서 자신이 근무했던 검찰과 기꺼이 맞서겠다고, 억울한 이들을 대변해주겠다고 선택한 제주인이 바로 강창조(47) 변호사다.

 

오현고 출신으로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 사법시험(29회)을 통과해 사법연수원(19기)을 수료했고, 군 법무관으로 전역했다.

 

그리고 그는 청주지검 검사를 시작으로 광주지검 순천지청, 수원지검, 서울지검 의정부지청, 서울지검, 대구지검, 서울남부지검, 제주지검, 광주고검, 서울고검, 대전지검에서 평검사와 부부장검사, 부장검사로 활약했다.

 

고향 제주에는 두 번이나 승진하면서 자처해 근무하기도 했다. 친일재산환수단에서도 근무하면서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이 친일의 대가로 받은 부당한 재산을 되찾아오는 선봉을 맡았다.

 

그렇게 잘 나가던 그는 대전지검 형사1부장검사로 근무하던 중 2009년 돌연 "힘없는 사람들의 입이 돼 주겠다"며 사표를 던졌다. 그는 대전에서 변호사를 개업, 활동하고 있다.

 

 

-삼형제가 모두 법조인이다. 어렸을 때부터 법조인을 꿈꿨나?

 

“사실 장교가 꿈이었다. 육사를 가면 학비도 안 들고, 당시 군인들이 각계각층에서 활발하게 활동해 육사를 목표했다. 그런데 담임이 육사는 이제는 시대에 안 맞는다고 해서 법을 공부하게 됐다. 큰형이 아버지가 시험을 보는 것을 권했고, 본인도 좋아했다. 나는 대학진로 과정에서 법에 매력을 느끼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리 됐다. 동생은 법대를 고집 부려서 갔다. 부친은 공직을 선호했다. 본인이 4·3과 6·25참전 등을 겪으면서 어려운 시절을 많이 살았고, 먹고사는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안정적인 공무원을 선호했던 것 같다”

 

-16년간 검사생활을 하면서 특수부, 외사부, 형사부 등 두루 거쳤다. 가장 잘 맞았던 부서는 어떤 부서이고,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

 

“보람이 있던 부분은 특수부나 외사부다. 중앙지검에서 외사를 했고, 수원과 의정부에서는 특수를 했다. 외사는 외국과 관련된 범죄, 특히 대기업의 무역 같이 굵직한 사건이 있기 때문에 크게 볼 수가 있었다. 외국과의 관계, 대기업 실정 등도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특수는 지역의 문제점을 스크린을 할 수 있다. 사건화해서 범죄를 없애는 것이어서 특수검사도 지역에 밝다. 지역인물에 대한 정보 등도 파악하고 알게 된다. 그 두 부서가 가장 흥미로웠다”
“기억에 남는 사건은 의정부지검에 근무하던 때였다. 2000년으로 기억하는데, 40대 여성 4~5명이 사기를 친 사건이었다. 피해 금액도 워낙 컸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피해자들 중 정신병을 앓기도 했고, 피해자 모친이 충격으로 죽기도 했다. 공무원도 피해를 당했는데,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고 그것을 약점으로 해서 갈취하기도 했다. 피해자들 중에 가해자가 구속되자 ‘억울함을 풀어줬다. 한을 풀어줘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도 했다”
“여러 사건을 처리하다보니 피의자로부터 협박성 전화를 받기도 한 적이 있다. 출소 후 집으로 전화를 오는 경우도 있다. 사건 처리 후 피해자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도 많이 받았는데, 순천지청에 근무할 때에는 한 어르신이 생선을 갖고 오기도 했다”

 

-제주지검만 두 번 근무한 바 있다. 고향에서 근무하면서 다소 부담감은 없었나?

 

“그렇게 부담이 되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제주사회는 신세지는 것을 싫어한다. 베푸는 데에도 인색한 것 같다. 공직자들은 지역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는데, 주민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지 표현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러한 문화를 이해하지만 밖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섭섭해 한다. 사실 정부에서 파견한 공직자들은 돌아가면 제주도에 도움을 줄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그러한 부분에서 잘 되는 것 같은데 제주는 그렇지 않다. 제주의 궨당문화도 좋은 문화인데 이상하게 변질된 것 같아 아쉽다. 선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궨당들이 다 찢어졌다. 옛날에는 친하게 지내시던 분들도 안 좋아진 것 같은 부분들이 많다. 단합이 잘 됐으면 좋겠다”

 

-친일재산환수단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조사위원회 조사단장도 역임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한시적으로 만든 기구다. 친일파들이 그 당시에 취득해 후손들이 상속한 재산들이다. 친일의 대가로 받은 것으로서, 상속으로 받은 것이라 하더라도 나라에 해를 끼쳐 얻은 재산이기에 환수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라는 취지에서 조직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한 재산이 파악되면, 국고에 귀속시키고, 보훈처에서는 그 재산으로 국가 유공자 등에게 사용한다. 1년 동안 근무했다. 대표적인 친일파인 이완용이 1900년부터 광복 전까지 취득한 재산이 많았다. 많은 친일파들이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몇 백억 정도 국가에 귀속시켰다. 대부분 요지의 땅 같은 부동산이다. 그 후손들이 불복해서 소송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그 사람들의 항의도 많이 받았다. 항의 요지는 친일의 대가가 아니다. 친일의 대가로 받으면 귀속 하겠는데, 자기들이 벌어서 산 땅이라고 주장했다”

 

-왜 검사를 그만두게 됐나? 변호사는 왜 하게 됐나?

 

“검사 외에는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 또 평소에 언젠가는 한 번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한 직업을 몇 십 년 하는 것보다는 안 해봤던 부분에 대해 해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과연 퇴직할 때까지 검사만하면 행복할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 주관 아래 계획을 세워서 삶을 살아가는 것을 해보자’고 생각해 변호사를 결심하게 됐다. 제주지검에 근무할 때 불우청소년과 지체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어렵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느꼈었는데, 그 영향도 있었다. 검사는 공소를 유지하는 입장이다. 사실 변호사를 해 보니 피고인의 억울함을 변호하는 입장이어서 검사로서 법정에 섰을 때보다 변호사가 마음이 편했다. 또 그러한 분들이 많았다는 것을 느꼈다. 행정 등에서 잘못된 처분을 내린 부분도 있었다. 사건에 대해 소상히 알게 됐고, 다른 사람이 사는 것도 더 잘 알게 됐다. 검사는 피고인의 얘기를 충분히 듣기 어렵지만, 변호사는 충분히 듣고 자주 접하게 되면서 솔직하게 된다. 그들의 애환이나 살아가는 방식을 알게 돼 마음이 편하다”

 

그는 검사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운동으로 푼다고 했다. 특히 대구지검 마라톤동호회 회장도 지낸 바 있다.

 

-대구지검 마라톤동호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운동을 좋아하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업무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뛰는 경향이 많았다. 뛰면 잡념도 없어지고, 업무 외에 다른 생각도 하게 된다. 힘든 일이 있든, 안 좋은 일이 있든, 뛰면서 정리도 하게 된다. 10km 정도 뛰는 것을 좋아한다. 제주에 있을 때에도 후배 검사들과 아침에 조깅하고, 스쿼시도 했다. 제주는 굴곡이 있는 도로가 많은 반면, 대전은 평평해 뛰기 좋다. 동호회도 많다. 동호회 활동하면서 각종 대회에 참가도 많이 했다. 제주도에도 도민들이 쉽게 같이 운동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으면 한다. 제주올레길은 여기서도 평가가 좋다. 등산도 많이 다닌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근처 산에 오른다. 제주에 있을 때에도 한라산에 가끔 올라가곤 했다. 고향이 해안동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목장을 자주 왔다갔다 한 적이 있는데 그게 바탕이 된 것 같다”

 

강 변호사는 고교 졸업 후 정신없이 학업과 사범고시를 위해 공부만 했다. 졸업 후 군대에 입대했고, 바로 검사로 임용됐다. 그만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 특별히 고달팠던 기억이 없다고 한다. 그래도 생활에서 답답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고향생각에 한 걸음에 달려가고 싶어 한다.

 

-육지 생활하면서 어려웠던 점이 있나? 언제 고향제주가 많이 생각나는가?

 

“고교 졸업 후 29년을 육지에서 살았다. 대학 입학 후 사법시험 준비하고, 연수원 생활하는 등 정신없었다. 때문에 생활이 힘들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때는 다른 사람들도 다 어렵게 생활할 때였다. 하지만 마음으로 아팠던 것은 경제적으로 형편이 넉넉지 않은 부모님께 부담을 지워준 것이다”
“제주생각은 많이 한다. 그래서 두 번 지원해 근무하기도 했다. 답답할 때에는 제주에 내려가서 충전하고 싶은 생각도 많이 한다. 나름 제주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산다. 어디가나 출신지역을 묻는데 ‘제주출신’이라고 하면 부모들의 교육열이 강하고, 똑똑하고, 거짓말 안하고, 부지런하다고 한다. 이럴 때 자부심이 생긴다. 제주사람들의 신뢰도 이러한 것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제는 점점 그런 것보다는 부정적인 부분들이 많아진다. 제주가 잘 됐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여자들이 결혼을 하면 친정이 잘 살아야 기를 펴고 살듯이, 나온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자기 고향이 잘 성장하고 좋은 소식이 많고 잘 살고 하면 기가 산다. 그러면 고향에 대해 더욱 떳떳해진다. 반대로 그렇지 못하면 힘이 빠진다. 부정적인 말에 그게 아니라고 하지만 잘 했으면 한다”

 

-고향 후배들에게, 또는 법조인을 꿈꾸는 고향후배들에게 조언해 달라

 

“아이들에게 매사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목표에 연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결과는 거기에 따라 온다. 설령 결과가 자기 맘에 안 들어도 최선을 다하지 않고 결과만 바라는 것은 옳지 않다. 사건을 맡아서도 승패가 있지만, 최선을 다하면 의뢰인들에게 당당해 진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다. 꿈을 크게 갖고 세계인과 경쟁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큰 꿈을 갖고 뭐든지 자기 관심분야에서 세계적인 사람, 글로벌 인재가 돼야 한다. 지금도 글로벌 시대인데 10년, 20년 뒤에는 우리 사회는 완전 개방화된다. 법률시장도 마찬가지다. 고향 제주 후배들에게는 더욱 기회가 많다. 지금부터 ‘내 경쟁자는 미국이나 유럽에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한다면 분명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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